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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연기대첩비(燕岐大捷碑), 연기대첩비공원, 고복저수지,고복자연공원

구름에 달

by 碧巖 2022. 1. 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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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대첩비(燕岐大捷碑)공원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도신고복로 586

 

김흔(金忻)장군은

충렬왕때 원나라의 반란군인 합단적(哈丹賊)이 고려를 침공하자 장수로서 고려군을 지휘하여

한희유(韓希愈), 인후(印侯) 등과 함께 연기(燕岐) 정좌산(正左山)과 목천 죽전(竹田)에서 합단적을 대파하였다.

안동김씨연기지역종친회에서는 당시 김흔(金忻)장군의 활약상을 기리기 위해

1997년 6월에 연서면 국촌리에 사적비를 세웠으며,

2000년 4월 연기군에서는 연서면 용암리 고복저수지 자연공원에 연기대첩비를 건립하고

매년 김흔(金忻)장군을 비롯한 한희유(韓希愈), 인후(印侯) 등을 기리는 연기대첩제를 시행해 오고 있다.

김흔장군은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의 차남으로 태어나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1남은 김승고(金承固)이고, 2녀는 여흥 민적(閔頔)과 평양 조련(趙璉)이다.

김승고(金承固)는 1녀를 두었는데 사위는 의성김씨 안동 입향조인 김태권(金台權)이다.

한희유(韓希愈)

한희유(韓希愈, ? ~ 1306년,충렬왕 32년)는 고려 말기의 무신으로 가주한씨(嘉州韓氏)의 시조이다.

청주한씨 시조 한란(韓蘭)의 9세손이라고 하며

1271년 대장군으로 김방경(金方慶)의 휘하에서 진도·탐라 등지의 삼별초(三別抄)를 정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1274년 여·몽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앞장서서 활약하여 상호군(上護軍),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를 거쳐

1288년(충렬왕14)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

1291년 원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합단적(哈丹賊)이 고려로 침입해 오자,

원의 장수 설도간과 함께 좌익장(左翼長)으로서 우익장(右翼長) 김흔(金忻)과 중익장(中翼長) 인후(印侯)와 함께

연기(燕岐) 정좌산(正左山)과 목천 죽전(竹田)에서 합단적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원제(元帝)로부터 회원대장군을 제수(除授)받았다.

고려(高麗) 충렬왕조에 벽상삼한찬리공신(壁土三韓贊理功臣)에 올랐다.후에 동북면 도지휘사(都指揮使)가 되었으며,

그 후 무고로 여러 번 유배되었으나 풀려나와 중대광(重大匡) 첨의중찬(僉議中贊)‧ 우중찬(右中贊)을 지냈다.

시호는 장렬(莊烈)이고, 원나라에서 졸하였다.

묘는 가산군(嘉山郡) 동면(東面) 연리(蓮里)에 있다고 전하며

가산(嘉山)은 1895년에 평안북도 박천군(博川郡)에 합하여 졌다고 한다.

인후(印侯)

연안인씨(延安印氏)의 시조로 인후(印侯,1250~1311)는 고려 시대 관리.

본명 후라타이[忽刺歹]. 시호 장혜(莊惠).  몽골인으로

1275년(충렬왕1) 충렬왕비인 제국공주(齊國公主)를 호종하여 고려에 와서 귀화,  왕의 총애를 받고 중랑장이 되었다.

1278년 장군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김방경(金方慶)의 유배를 알리는 등 그 후에도  4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다녀왔다.

1281년 소용대장군 진변만호(佋勇大將軍鎭邊萬戶) 때는 횡포를 부려 백성들을 괴롭혔다.

1286년 응양군상장군 등을 거쳐 지도첨의(知都僉議)가 되었으며,

1291년 첨의참리(僉議參理) 때  중익장(中翼長)으로서 좌익장(左翼長) 한희유(韓希愈)와

우익장(右翼長) 김흔(金忻)과 함께 연기(燕岐) 정좌산(正左山)에서 합단(哈丹)의 침입을 막았다.

1292년 원나라에서 진변만호부(鎭邊萬戶府) 다루가치[達魯花赤]에 임명되었으며,

1293년 왕과 공주를 수행, 원나라에 갔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한 잠시 동안 광정사 참지기무를 거쳐 첨의시랑찬성사, 판병조감찰사사를 지냈다.

1299년 재상 한희유(韓希愈)를 무고, 유배시켰으나 사실이 드러나 파직되었다가 1300년 원나라의 특사로 풀려났다.

1309년(충선왕 1) 평양군(平陽君)에 책봉되고 자의도첨의사사(諮議都僉議司事)가 되었다.

연기대첩비문(燕岐大捷碑文)

연기(燕岐)는 그 땅이 아름다워 걸출한 인물들이 수없이 배출되었고

오랜 역사의 향기를 전해 주는 문화 유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이 같은 연기의 역사와 전통은 이 땅위에서 오랜 역사와 함께한 연기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만들어낸 값진 유산들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연기지역은 忠孝烈의 정신과 인맥이 끊임없이 이어진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충효열의 정신사적 전통은 저 멀리 백제 멸망 직후 국보106호 국보 108호 석불비상을 조성하였던

백제 유민들의 염원에서 비롯되기도 하였을 것이고 국난을 당했을 때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쳤던

수 많은 이 지역의 충절 인물들이나 각 가문에서 배출된 효자 열녀 열부의 행적이 바로 그러한 전통을 무르익게 한

원천이었으리라. 어디 그 뿐이랴 또 하나 연기 사람을 자랑하고 자랑할 커다란 역사의 흔적이

우리 앞에 그 웅대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연기대첩(燕岐大捷)의 역사요 정신이라 할 것이다.

연기대첩은 고려시대 대표적 역사서인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도 상세하게 전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고려 충렬왕 17년(1291) 5월에

연기 지역에 침략했던 원나라 반란군인 합단(哈丹)의 무리를 궤멸시킨 대승첩(大勝捷)이었다.

 

합단의 군대는 고려 충렬왕 16년(1290) 5월 고려의 동북면 지역으로 쳐들어와

함경도와 강원도 경기도를 차례로 유린 약탈과 살상의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합단적은 이어 원주와 충주로 진출하였다가 이곳에서 지역민들의 치열한 저항에 직면하여 상당한 타격을 받고

진로를 바꾸어 결국 우리 고장 연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합단적이 우리 연기땅에 발을 내디딘 것은

충렬왕 17년(1291) 4월로 이들은 당시 연기 서면 쌍전리의 정좌산에 주둔하면서 삼남 지역으로 진출을 도모하였으니

참으로 이는 우리 역사상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일대 국난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합단적을 무찌르기 위하여 고려의 한희유(韓希愈), 김흔(金忻), 인후(印侯) 등 삼장군과

원나라의 연합군은 5월 1일 밤 은밀히 목천(木川)을 출발

적의 예상을 뒤엎는 강행군으로 이틑날 새벽 동이 틀 무렵 정좌산에 도착 합단적을 포위하고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적의 반격도 만만치 않아 고려군의 공격이 부진하였다.

이에 김흔 장군은 장졸들에게 후퇴하는 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독전하니 이석(李碩)과 전득현(田得賢)이

앞장서 나가 적의 적의 선봉을 목베고 이에 힘을 얻은 전군이 합세하여 총공격을 감행하자 합단적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고려군은 달아나는 적을 공주 금강까지 추격하니 쓰러진 시체가 30여리에 이르고

물에 빠져 죽은 자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날 하루의 전투로 적의 주력은 거의 궤멸되고 날랜 기병 천여기가 강을 건너 도망갔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7일후인 5월 8일에 정좌산 전투에서 패퇴하여

강을 건너 도망갔던 합단적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남면 원수산(元帥山) 방면으로 공격해 왔다.

이때 적중에는 백발백중으로 활을 잘 쏘는 자가 앞에 버티고 있어 군사들이 겁을 먹고 진격하지 못하였는데

이것을 본 한희유 장군이 긴창을 겨누고 말을 달려 적진으로 돌진하여 활 잘 쏘는 자를 잡아서 한칼에 참하고

그 머리를 창에 꿰어 적에게 보이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이틈에 전군이 일제히 공격하니 적은 말과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

그로부터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합단적은 6월 5일 단적 580여명이 한희유 장군에게 투항하므로서

전후 2년에 걸친 합단적의 침입은 우리 연기땅에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연기대첩은 고려에 침입한 합단적으로 하여금 다시는 전세를 회복할 수 없도록 완전 섬멸하여

일대 국난을 극복한 역사적 전투였으며 대첩이었다. 만일 연기대첩으로 합단적을 궤멸시키지 못하였다면

가깝게 충청도 내륙은 물론 전라도 경상도 지역도 그들의 말발굽 아래에서 온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연기대첩은 후대의 역사 기록에서 소홀하게 취급되었고

대승첩을 기록할 어떠한 유적도 연기땅에는 남아있지 않운 실정이다.

더욱이 700여년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숭고한 연기대첩의 사실마저 올바르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드물고

다만 정좌산 부근의 창고개 전승골 군량골이라든가 원수산의 장군바위와 항서바위등의 지명과 구전만

이 당시 외적을 맞아 의롭게 싸웠던 연기 현민들과 고려군의 용맹 충절 흔적을 아스라하게 느끼게 할 따름이다.

뒤늦었지만 이를 아쉬워하는 연기군민들은 뜻을 모아 잊혀져가는 연기대첩의 역사를 바로 알리고

그 거룩한 뜻을 후세에 기리고자 이 기념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곳을 찿는 수많은 연기군민들이 연기대첩 당시의 용전(勇戰)과 충절(忠節)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여

충효열 정신으로 뭉쳐진 도덕적 인간상이 현대와 미래의 연기군민상(燕岐郡民像)으로 정립되기를 기대한다.

서기 2000년 4월 15일

건 립 자 연기군수  홍순규

연기대첩비건립추진위원회

위 원 장 조치원문화원장  장   영

사실고증 연기향토사연구소고문  김재붕

글 공주대학교사학과교수  이해준

글 씨 송암  민복기

조 각  박대순

국보 106호 석불비상=연기군 전동면 비암사 출토

                             국립청주박물관소재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

국보 108호 석불비상=공주박물관소재  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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