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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찬1543(중종38)∼1599(선조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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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碧巖 2007. 3. 25.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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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찬1543(중종38)∼1599(선조32)

조선의 문신. 자는 숙진, 호는 눌암.

 익원공(휘 사형)의 후손으로 형조참의 언침의 아들.

 1567년(선조즉위) 진사가 되고, 156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1570년에 검열이 되고, 이후 대교·봉교·전적·형조정랑·검상·사인·이조정랑 등의 관직과 지평·집의·정언·헌납·사간·수찬·교리·응교 등 삼사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1573년 평안 삼도사로 나가 군적을 정리하였으며,

다음해에는 평안도 순무어사로 활약하였다. 1584년 이후로는 전한·직제학·승지·좌참찬·동지중추부사·대사헌·대사간·대사성·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임금의 파천을 반대하였으며, 대사헌으로서 선조를 호종했다. 임금 일행이 개경에 이르자 동인 이산해의 실책을 탄핵하여 영의정에서 파직시키고,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김공량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뒤에 체찰부사를 역임하고, 양호감찰사로 전쟁의 뒷바라지를 하였으며, 1594년 접반사로서 명나라 지원군을 인도하고 일본군과 강화회담을 하는 등 크게 활약했다.

  또, 일본과 강화회담을 벌일 때 공을 세워 임진왜란을 종전국면을 맞게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부터 예조판서·지의금부사·대사헌·이조판서를 연이어 지냈고, 우참찬까지 승진하였다. 대사헌 때 가족을 멀리 피난시켰다고 탄핵을 받고 체직되는 등 소소한 정치적 부침을 겪기도 하였지만, 행정가로 정치가로 대문장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경세가로 경제문제에 밝고 외교적 수완이 능숙한 명신중의 명신이였다. 임진왜란 수습의 막후 인물로서 3국간의 외교적인 절충을 성공시킨 명신으로 특히 경제정책의 전문가이자 명문장가였다. 임진왜란 뒤 전쟁의 수습과정에서 죽자, 선조는 조회를 정지하여 추모의 뜻을 표했다. 諡號시호는 효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