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 조선 가부장사회 ‘규방 세계’ 초월한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과 두 아이의 작은 집
유독 애틋한 묘가 있다. 허난설헌(許蘭雪軒)의 가족묘가 그러하다. 광주군 지월읍 초월리. 중부고속도로 바로 옆이라 눈여겨보면 지나는 길에도 알아볼 정도다. 묘역은 안동 김씨의 위력을 보여주듯 잘 정돈돼 있다(경기도기념물 제90호).
조선 최고의 여성시인, 허난설헌. 시비가 우뚝하다. 이숭녕의 비문(증정부인양천허씨지묘,贈貞夫人陽川許氏之墓)은 구구절절 난설헌의 삶을 일깨우고, 두 개의 작은 묘가 보는 이의 발을 오래 붙잡는다. 아프게 앞세운 두 아이의 묘.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잃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구나. (……) 하염없이 슬픈 노래 부르며, 피눈물만 속으로 삼키노라”
난설헌의 ‘곡자(哭子)’에 오빠 허봉의 시가 다시 얹힌다. “피어보지도 못하고 진 희윤아, (……) 맑고 밝은 얼굴에 반짝이던 그 눈! 만고의 슬픔을 이 한 곡(哭)에 부치노라”
난설헌과 허씨 형제들 허초희(許楚姬), 난설헌의 삶은 짧았다(1563~1589). 그는 스물일곱 아까운 나이에 꽃처럼 졌다. 하지만 그에게는 시가 있었다. 고독해도 높다란 정신적 거처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허씨 형제의 긍지인 문향(文香)이 뿌듯이 서려 있었다.
난설헌은 강릉에서 초당 허엽의 3남 3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천부적인 재능 덕에 난설헌은 아버지와 오빠의 뜻으로 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스승은 손곡 이달(蓀谷 李達)로, 허봉의 친구이자 동생 허균의 스승이었다. ‘성당 3 시인’으로 불리는 당대의 문장가이지만 기녀 아들이라 뜻을 펼 수 없는 손곡 이달을 허씨 형제의 스승으로 모신 것이다. 여기서 허씨 집안의 진보적 면모가 드러나는데, 그런 세계관이 선구적 여성시인 난설헌과 『홍길동』 저자 허균을 낳았을 터다.
15세경에 난설헌은 김성립과 혼인을 한다. 그런데 남편이 좀 달렸던지, 몇몇 얘기가 전해진다. 그 중 기생집 출입이 잦은 남편 친구들의 장난에 난설헌이 술과 안주를 보내며 의연하게 답한 시는 유명하다. “정금 명월주로 노리개 만들어 그대에게 채웁니다. 길가에 버리는 건 아깝지 않지만, 새 여자 허리띠에는 매어주지 말아요” 그의 자존심이 묻어나온다. 비록 사랑하지 않는 남편이라도 남편과 시어머니의 홀대는 난설헌을 외롭고 힘들게 했다. 그 정황은 누나를 늘 생각했던 허균의 글에서 확인된다.
이후 난설헌에겐 불행이 겹쳐온다. 두 아이를 앞세우고 실의에 빠져 지낼 때 오빠 허봉은 유배 후의 방황 끝에 객사한 것이다. 이듬해(1589년)에 난설헌도 셋째를 가진 채로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내 시를 모두 불태우라”는 말과 함께…. 그 후 과거에 급제한 남편 김성립도 임진왜란에서 전사하고, 동생 허균 역시 광해군 연간에 역모 죄로 처형된다. 가문의 멸망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난설헌과 허균에 대한 폄훼로 이어진다.
흔히 난설헌의 삶을 불행하다지만,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을 듯하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허봉과 허균이 영혼의 벗이자 아낌없는 후원자였으니 말이다. 오빠 허봉은 ‘누이에게 보내는 글’에서 “신선나라에서 예전에 보내준 문방사우”를 보내며 무엇이든 그리고, “두보의 소리가 누이의 소매에서 다시 나오기를 바랄 뿐”이라는 글로 독려했다. 동생 허균 또한 이름 없이 사라질 조선의 여자 난설헌을 중국에까지 널리 알렸다. 이 모두 난설헌의 재능을 높이 친 데서 나온 것이니 참으로 아름다운 우애요 자긍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의 ‘여자’라는 굴레와 시적 구원 “조선에, 여자로 태어나,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 난설헌은 이 셋을 한탄했다. 자의식 강하고 재능 많은 여성에게 그것이 치명적 굴레임은 충분히 짐작된다. 더욱이 여자는 이름도 필요 없다던 가부장사회 아닌가. 그 와중에 남편도 마음에 차지 않았으니 난설헌이 오직 시를 도피처이자 구원처로 삼았을 법하다.
시를 통한 해방과 구원은 ‘유선시(遊仙詩)’에 특히 많다. 유선시는 신선에 대한 고사와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필력은 물론, 우주를 아우르는 상상력을 요해서 본래 남성의 장르로 여겨졌다. 그런데 사대부도 못 쓰는 유선시를 난설헌이 써냈고, 이는 세간의 입방아를 타게 된다. 많은 말 중에 난설헌이 유선시를 7세에 지은 천재라는 소문도 있었는데, 그 이름이 중국에서 유명해지고 떠돌며 ‘전설’로 변한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난설헌은 유선시를 87수나 남기고 있다. 허균이 간직한 게 그 정도니, 난설헌이 유선시를 얼마나 더 지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향기로운 달빛 차가운데 밤은 깊어만 가고(香寒月冷夜沈沈) 웃으며 이별하며 교비 옥비녀를 뽑아준다(笑別嬌妃脫玉簪) 금채찍 다시 들어 돌아갈 길을 가리키니(更把金鞭指歸路) 벽성 서쪽 언덕에는 오색구름이 자욱하다(碧城西畔五雲深)
이 시에서 난설헌은 ‘교비’라는 여신이 누군가에게 옥비녀 뽑아주는 장면을 그린다. 여신이 주도하는 만남을 통해 여성의 주체성을 부각하며 금지된 자유를 초월하는 즐거움을 담아낸 것이다. 이렇듯 시비할 특성이 종종 보이는 데다 여자가 높은 기상의 유선시를 쓴 것 자체가 남자들에겐 못마땅했을 것이다.
허초희 난설헌은 호 외에 ‘경번(景樊)’이라는 자(字)를 가질 만큼 자의식이 강했다. 그런데 여자가 호 하나로도 과하거늘, 심지어 자를 갖고 있다고 시비 거는 남자가 많았다. 당(唐)의 유명한 시인 번천(樊川, 두목의 호)을 따르려 했거나 여신 번(樊)부인에 대한 경모이거나, 난설헌의 기개가 마뜩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유교적 세계관에 갇힌 남자들의 질타와 조롱에도 난설헌의 자존과 시적 추구는 꿋꿋했다. 자가 무엇을 의미하든, 그가 꿈꾼 세계가 거기 있었으리라.
개인시집을 가진 첫 여성 한류 시인 허난설헌, 조선시사에서 그는 하나의 사건이다. 상징적 사건이다. 여성에겐 출판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절 아닌가. 게다가 중국의 내로라하는 시인들도 난설헌 시집을 구하고자 야단이었다. 요즘으로 보면 시인이 그것도 여성시인이 한류 스타였던 것이다. 『난설헌집(蘭雪軒集)』은 그런 상징성을 지닌 여성의 첫 개인시집이다. 물론 이는 허균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허균이 없었다면 시집도 당연히 없었을 테니 말이다. 난설헌의 시를 갖고 있던 허균은 1608년 드디어 『난설헌집』(목판본)을 공주에서 출판한다 (1590년 유성룡의 발문을 받아놨지만 전쟁으로 늦어짐). 명의 사신 주지번·양유년 두 사람의 서문이 있는 책은 명에서도 서로 구하려는 바람에 금세 유명해졌다. 이전에 명의 오명제가 조선의 시를 모아 출판한 『조선시선(朝鮮詩選)』(1600년) 덕에 난설헌의 이름이 중국에 이미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일본에서도 『난설헌 시집』이 출판되니, 1711년 분다이야 지로에 의해서였다. 이로써 난설헌은 한·중·일에서 시집을 출간한 한류의 원조격 스타시인이 되었다.
그런데 후대로 올수록 난설헌을 폄훼하는 글이 많아진다. 그 중에도 진보적 지식인으로 알려진 홍대용, 박지원 등의 남성우월 시각과 비판은 실망스럽다. 난설헌을 인정하는 일부 남자 외에는 대부분 비판을 일삼았던 것이다. 조선은 과연 남자들의 나라였다. 자신들이 금줄 쳐놓은 세계 안에서만 얌전하게 살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여자는 “재주 없는 게 덕”이었을까. 그러니 난설헌처럼 난 여자가 조선에 여자로 태어난 것을 어찌 한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런 여건에서도 난설헌은 규방의 여인이 보고 듣는 세계를 뛰어넘는 시세계를 보여준다. ‘빈녀(貧女)’처럼 소외된 약자나 열악한 현실에 대한 시도 많다. 그 때문인지 난설헌 시가 대부분 허균의 작품이라는 설이 있었고, 지금도 표절 혹은 위작이라는 의심을 품는 학자들이 있다. 죽을 때 시를 다 태우라고 한 것과 그 많은 어려운 시를 어린 나이에 썼다는 게 믿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허봉이나 허균의 인정에서 확인되듯, 난설헌은 천부적 재능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스물일곱 송이 붉은 부용꽃’을 기리며 스물일곱에 갈 것을 이미 알았던 것일까. 난설헌이 23세 때 꿈을 꾸고 나서 쓴 시는 그의 삶을 더 선명하게 각인한다.
벽해의 바닷물이 하늘바다로 스며들고(碧海侵瑤海)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 기대어 있다(靑鸞依彩鸞)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늘어지며(芙蓉三九朶) 붉게 떨어지니 달빛서리 차구나(紅墜月霜寒)
난설헌의 삶은 짧았다. 불행했다. 여자나 어머니로서는 그러했다. 그러나 시인으로서는 행복하다고 할 만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누렸고, 조선의 대표적 여성시인이라는 명성도 얻었다. 게다가 중국, 일본 문사들이 앞 다퉈 시집을 찾은 스타였다. 조선의 여인 중 그렇게 널리 떨친 이름이 있었던가. 더욱이 개인시집을 가진 여성이 있었던가. 그리고 자기 묘 앞에 버젓이 시비를 세운 여자 문사가 있었던가. 그런 되새김 때문일까, 난설헌 묘에서 무언의 채근이 자꾸 들린다. 더 큰 꿈을 꾸라는…. 더 멀리 높이 나아가라는…. [경기일보 2008-7-22] 담당/정수자 시인·문학박사/사진=조남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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