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陵홍릉은 제26대 고종(1852~1919)과 명성황후 민 씨(1851~1895)의 능이다.
고종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익종의 비인 신정왕후 조 씨(조 대비)의 지명으로 왕위에 올랐다.
고종이 왕위에 오를 때 조 대비는 남편인 효명세자를 양부로 하고 자신을 모친으로 입적했다.
적통으로 왕위를 받았다는 서류 처리에 완벽을 기한 것이다.
고종은 조 대비에게 수렴청정을 맡기고, 흥선대원군에게 국정을 총괄하게 했다.
조선 시대 역사상 살아 있는 왕의 생부는 흥선대원군이 처음이다.
그전에 있었던 덕흥대원군(선조의 생부)과 전계대원군(철종의 생부)은 모두 사후에 추증된 대원군이었다.
1866년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 씨는 민치록의 딸을 고종의 비로 천거했다.
대원군이 8세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으로 자란 민비를 왕비로 간택한 이유는
외척에 의해 국정이 농단된 3대(순조, 헌종, 철종) 60여 년의 김씨 세도 정치의 폐단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고종이 친정을 하자 그녀는 민씨 척족을 활용해 강력한 쇄국 정치를 폈던 대원군에 맞섰다.
고종의 재위 시에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난다.
개화파와 수구파 사이가 악화되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 농민 운동과 청일 전쟁이 발발했으며
아관파천 등 근대 한국의 주요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다.
고종은 1897년 주변 국제 관계의 영향으로 대한 제국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다.
하지만 그전에 고종에게 씻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1895년 을미사변으로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살해된 것이다.
주한공사 미우라 고로는 일본을 경원하던 명성황후를
별기군 참령으로 봉직하던 우범선(우장춘의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에서 시해하고,
시신은 경복궁 뒷산 녹원에서 불태웠다.
우범선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정국이 바뀌자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자객 고영근에게 살해된다.
경위가 어떻든 명성황후의 사망은 고종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 이어진다.
왕비조차 살해당하게 할 정도로 무능했기 때문에 조선 왕조가 멸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고종은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다방면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 밝혀졌다.
고종의 밀사이자 대한 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한 역사학자 호머 헐버트는
"황제가 유약하다는 사람들은 틀렸다"라고 했다.
또 고종의 황제 즉위식 때 『독립신문』 1면 논설은 감격적인 희망을 장식했다.
"광무 원년(1897) 10월 12일은 조선 역사에 제일 빛나고 영화로운 날이 될지라.
조선이 몇천 년 동안 청국의 속국 대접을 받은 때가 많더니
하나님이 도으사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만드사 대황제국이 되었으니 어찌 감격한 생각이 아니 나리요."
이런 기록에서는 한국인들이 흔히 알고 있는 무능한 왕이라는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다.
적어도 고종은 대원군의 도포 자락에 숨거나 명성황후의 치마폭에 휘둘리기만 한 어리석은 군주는 아니었던 것이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명성황후가 일제에 살해된 지 6개월 후
고종과 왕세자(순종)는 두 대의 가마를 타고 궁궐을 몰래 빠져나와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했다.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한다. 그리고 같은 날 고종은 온 백성들에게 선언한다.
"8월의 변고는 만고에 없었던 것이니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역적들이 명령을 잡아 쥐고 제멋대로 위조했으며
왕후가 죽었는데도 석 달 동안이나 조칙을 반포하지 못하게 막았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생각하면 뼈가 오싹하고 말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사나운 돼지가 날치고 서리를 밟으면 얼음이 얼게 된다는 경계를 갑절 더해야 할 것이다.
을미년(1895) 8월 22일 조칙은 모두 역적 무리들이 속여 위조한 것이니 다 취소하라."
명성황후를 폐서인으로 삼은 것은 황제의 뜻이 아니었으니 취소하라는 뜻이다.
아관파천으로 만든 좁은 틈새로 고종은 본격적인 홀로서기를 준비한다.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 개혁을 꿈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야심찬 의지가 있어도 고종 역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었다.
결국 고종은 순종에게 황제 지위를 물려주고
근대 개혁을 미완의 과제로 남긴 채 1919년 1월 덕수궁 함녕전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일제 강점기이므로 대한제국 황제였던 고종의 장례는
황제의 국장도 아닌 왕족의 장으로 치렀는데 그마저도 7개월도 아닌 3개월로 했다.
처음에는 조선의 국장제인 '상례보편제'를 따랐는데
갑작스럽게 일제가 개입해 장례위원회를 도쿄 국내성에 두고
조선 총독부가 칙령에 따라 일본식으로 치르도록 했다.
이왕 직제로 이루어져 조선의 상왕제에 일본식이 가미된 특이한 장례였다.
고종의 능이 남다른 것은 명 태조의 효릉을 본떠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홍유릉은 왕릉이 아니라 황제의 능이다.
그러므로 홍살문으로 들어가는 우측에 조선 왕릉 중 가장 큰 연지(蓮池)가 있다.
조선의 왕은 천원지방의 연못을 기본으로 했는데 이곳은 연못 전체도 원형이고 가운데 섬도 원형이다.
연못에는 부들과 연꽃 등 수생 식물이 자라며 원형의 섬에는 향나무, 소나무, 진달래 등이 식재되었다.
금천교 안쪽 좌측에는 일반 재실보다 규모가 큰 재궁이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이는 황제 능에만 있는 특이한 형태다.
정자각도 변형되어 중국의 황제 능처럼 일자 모양의 침전을 세웠다.
침전은 고종의 신위를 봉안한 제전이다.
침전의 기단 아래 홍살문까지 참도가 깔려 있는데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좌우보다 한 단 높게 마련된 중앙 길은 황제와 황후의 영혼이 다니는 길이다.
참도는 어도와 신도 두 단으로 구분되어 있던 기존 왕릉의 것에 비해 가운데가 높고 양옆이 한 단 낮은 삼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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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이 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