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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번,김생해.김극효,청음 김상헌,김상용,김수흥,김수항의 묘역

구름에 달

by 碧巖 2015. 5. 18.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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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번(金璠, 1479~ 154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문서(文瑞), 본관은 신안동(安東).

아버지는 사헌부 장령 김영수(金永銖), 어머니는 강릉김씨로 현령 김박(金博)의 딸.  

세조때 국사(國師)로 유명한 학조대사의 조카.

김번의 묘 배위 남양홍씨((한성부윤 홍심(洪深)의 증손녀이며 판관 홍걸(洪傑)의 딸

-이들 남양홍씨 산소가 와부읍 덕소리에 있음))의 친정 땅으로 방앗간을 하고 있던 자리였다고 한다.

남양홍씨 부인의 친정에서 방앗간을 하고 있던 곳을

그의 조부 김계권의 아들 즉 김번의 큰 아버지인 학조대사(學祖大師)이곳을 들렀다가

이곳이 천하명당임을 알아차리고 홍씨부인에게 남편의 사후 이곳에 묘를 쓰도록 권고받았다.

<조대사는 일찍 출가하여 세조시절 불경을 번역하여 간행하였고 해인사 중창에도 간여하였다고 한다>

그 뒤 홍씨부인은 친정집을 설득하여 부군인 김번이 죽자 이곳에 안장하려 묘자리를 준비하던 중

홍씨부인의 친정에서 이곳이 천하명당임을 알아차리고 급기야 야간에 광중에 물을 퍼부어 물이 나니

묘를 쓰면 안된다고 했지만 홍씨부인은 이를 눈치채고 그냥 쓰겠다고 하여

결국 김번을 여기에 안장하였다 한다.

김번의 묘역은 조선 8대 명당중 한곳이라고 하며

옥 항아리에 물을 담은 형국의 玉壺貯水形(옥호저수형)명당이라고 한다.

 

김상헌 金尙憲1570(선조 3)1652(효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신안동(安東).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서간노인(西磵老人). 서울 출생.

김번()의 증손자, 할아버지는 군수 생해(生海), 아버지는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극효(克孝),

어머니는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딸. 우의정 상용(尙容)의 동생.

1590(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6년 전쟁 중에 실시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후 부수찬(副修撰좌랑·부교리(副校理)를 거쳐

16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길운절(吉雲節)의 역옥(逆獄)을 다스리기 위한 안무어사(安撫御史)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왕에게 결과를 보고하고, 고산찰방(高山察訪)과 경성도호부판관(鏡城都護府判官)을 지냈다.

1608(광해군 즉위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교리·응교(應敎직제학을 거쳐, 1611(광해군 4) 동부승지.

 

그러나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 배척에 앞장선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했다가 광주부사(廣州府使)로 좌천.

1613년 칠서지옥(七庶之獄)이 발생,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이 죽음을 당할 때

혼인관계(김상헌의 아들 광찬(光燦)이 김제남의 아들 내()의 사위가 됨.)로 파직되자

집권 세력인 북인의 박해를 피해 안동시 풍산으로 이사.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자 공신 세력의 보합위주정치(保合爲主政治)에 반대,

시비(是非)와 선악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해 서인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어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부제학을 거쳐,

1626(인조 4) 성절 겸 사은진주사(聖節兼謝恩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육조의 판서 및 예문관·성균관의 제학 등을 지냈다.

1632년 왕의 생부를 원종(元宗)으로 추존하려는 데 반대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1635년 대사헌으로 재기용되자 군비의 확보와 북방 군사 시설의 확충을 주장하였다.

이듬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 귀국하였다.

1645년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사에 들어갔다.

 

효종이 즉위해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으며,

김육(金堉)이 추진하던 대동법에는 반대하고 김집(金集) 등 서인계 산림(山林)의 등용을 권고하였다.

1585(선조 8)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서 경사(經史)를 수업하고, 성혼(成渾)의 도학에 연원을 두었다.

이정구(李廷龜김유(金楺신익성(申翊聖이경여(李敬輿이경석(李景奭김집 등과 교유하였다.

165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61(현종 2) 효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 봉명서원(鳳鳴書院),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제주 귤림서원(橘林書院),

정평 망덕서원(望德書院), 함흥 창덕서원(彰德書院), 경성 경산서원(鏡山書院), 의주 기충사(紀忠祠),

광주 현절사(顯節祠), 상주 서산서원(西山書院), 종성 화곡서원(華谷書院), 안동 서간사(西磵祠),

예안 운계사(雲溪祠), 정평 모현사(慕賢祠)에 제향되었다.

 

시문과 조천록(朝天錄남사록(南槎錄청평록(淸平錄설교집(雪窖集남한기략(南漢紀略) 등으로 구성된

청음전집4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신도비

 

김상헌 부친 김극효묘역

 

김상헌 조부 김생해(生海)묘역

 

김광찬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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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백당(松柏堂)은  경기도 양주 석실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세월이 지나 송백당이 허물어 지고 중건하려 하였으나 비석을 세우는 것이 더 좋다는 의견에 따라

이 곳 남양주 김상헌의 묘소 근처에 세웠다.

철종12년 (1861)에 김문근 (金汶根)이 비문을 짓고, 김보근(金輔根. 이조판서)이 글씨를 썼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중심 인물들로 특히 김문근은 입양되어 哲宗의 장인이 된다.

송백당(松柏堂)은 청음 김상헌이 휴식을 취하던 곳으로 남양주 와부읍의 석실(石室)에 있었으며,

유허비(遺墟碑)란  先人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를 말한다.

취석(醉石)...

우암 송시열이 도산정사를 건립할 당시 김상헌의 손자 김수증(金壽增)에게 준 글로

김수증이 이 것을 4년 뒤안 1672년 지금의 비석 양면에 각자(刻字)한 것이다. 

취석은 도연명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도산정사는 원래 석실서원(石室書院)이었다.

김상헌의 손자 김수증이 김상헌의 뜻을 기리고자 남양주 와부읍에 석실서원을 지었는데,

이퇴계의 도산서원과 이름이 중복된다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송시열이 주장하여 도산정사로 명명되었다.

석실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지금은  조말생의 묘소 아래에 그 흔적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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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용(金尙容, 1561년 ~ 1637년 1월 22일) 조선시대 중·후기의 문인, 시인, 정치가, 서예가,

선조 문과급제 관작은 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판돈녕부사,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문루에 화약을 쌓고 불을 붙여 자폭.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계옹(溪翁),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신)안동

외할아버지 좌의정 임당 정유길이 살고 있던 서울의 수진방(현 수송동·청진동)에서 태어났다.

김상용은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였으며,

행동이 단정하고 법도에 맞아 주위에서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칭찬하였다고 한다.

16세 때 영의정 권철(도원수 권율의 아버지)의 손녀와 혼인해 3남3녀를 두었고,

권씨 사후 사계 김장생의 누이를 얻어 1남4녀를 두었다.
성인이 되자 스스로 호를 지어 선원(仙源)이라고 불렀으며, 또 풍계(楓溪)라는 호도 지어 별호로 썼다.

1582년(선조 15) 진사(進士)가 되고,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에 등용되었다.

그 뒤 좌의정 정철(鄭徹), 이조판서 효헌공 김찬(金瓚)의 종사관으로 있었다.

 

병조좌랑, 응교 등을 역임하고, 1592년 임진왜란때에는 처삼촌 도원수 권율을 따라 호남·영남 지방을 왕래했으며,

정유재란이 종결되면서 1598년 승지로 등용되고,

그해 겨울 명나라에 사신이 파견되자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연경에 다녀왔다.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외보로 정주목사, 상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광해군의 가까운 인척이었음에도 권세에는 관심이 없었다.

광해군 때 한성부판윤·호조참판·승정원도승지·지의금부사·사헌부대사헌·

지의금부사·형조판서·지중추부사 등을 지냈으나 '폐모론'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도총관과 지중추부사를 지내는 동안 인목대비가 폐비되자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원주(原州)로 낙향했다.


이후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치중하여 임시정(林時定) 등의 문하생을 배출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다시 부름을 받고 관직에 나갔다.

이후 김상용은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한 사람으로 판돈령부사를 거쳐 인조 즉위후 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626년 3월 좌참찬에 제수되고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1628년 판의금부사, 이조판서, 1629년 예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1630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노령으로 치사(致仕)하고 관직을 사퇴하려고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631년 다시 치사를 청하였으나 불허되었고,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냈다.

32년 우의정에 임명되자 거듭 사퇴하여 허락받았다.

1635년 우의정을 사퇴하고 영돈령부사로 전임되었다.
1636년 판돈녕부사가 되어 그해 8월 노령을 이유로 사퇴를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 세자빈과 원손 등 왕족을 모시고 강화도에 건너갔으나

적병이 강화성으로 쳐들어와 함락당하게 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폭하였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명신으로 알려져 있다. 저서에 《선원유고》 등이 있다.
그의 묘 옆에는 서손(庶孫) 김수전(金壽全)의 묘가 있다.

김상용의 죽음에 대해 그가 순절한 것이 아니라

종에게 자기 옷을 입히고 숨어 있던 중에 담배를 피우다가 화약에 불이 붙어 폭사한 것이라는 주장도 존재했는데,

김상용의 아들들은 김상용이 실수가 아닌 순절을 한 것이라 주장하며

당시 13세였던 김수전이 순절하는 할아버지를 따라 죽겠다고 간청해 불에 뛰어들었다고 주장했다.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갸륵한 효심을 기려

사후에도 할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도록 할아버지 김상용의 묘 옆에 그의 묘를 안장하였다고 한다.

한편 묘역 입구의 충효각에는 김상용의 충신정려와,

숙종 때 예조판서 민진후의 주창으로 세워진 김수전의 효자정려가 모셔져 있다.

 

글씨에 뛰어났는데,

그 서체는 이왕체(二王體:왕희지와 왕헌지의 글씨체)를 본뜨고 전(篆)은 중체(衆體)를 겸하였으며,

시조로 유고(遺稿)에 《오륜가(五倫歌)》(5편)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9편) 등이 있고,

그 밖에도 《가곡원류(歌曲源流)》 등에 여러 편의 시조가 실려 있다.

사후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

인천의 충렬사(忠烈祠), 양주(楊州)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상주(尙州)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안변(安邊)의 옥동서원(玉洞書院),정주(定州)의 봉명서원(鳳鳴書院), 정평(定平)의 모현사(慕賢祠) 등에 배향되었다.

1758년 영조의 특별명령으로 의정부영의정이 증직 추서되었다.

 

 

 

 

 

 

김수항 金壽恒   1629(인조 7)~ 1689(숙종 15).조선 현종 때의 문신.

 

서인으로 2차례의 예송(禮訟) 때 남인과 대립, 뒤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자 노론의 영수가 됨.

본관은 안동. 자 구지(久之), 호 문곡(文谷).

할아버지 우의정 김상헌(尙憲), 아버지 동지중추부사 김광찬(光燦). 영의정 수흥(壽興)의 아우.

1651(효종 8) 알성문과에 장원급제, 1656년 문과 중시(重試) 급제.

정언·교리 등을 거쳐 이조정랑·대사간. 1659(현종 즉위) 승지.

이듬해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입을 상복이 문제가 되었다.

그는 송시열과 함께 기년설(朞年說1)을 주장해 남인의 3년설을 누르고,

3년설을 주장한 윤선도(尹善道)를 탄핵하여 유배시켰다(1차 예송). 그뒤 이조참판 등을 거쳐 좌의정을 지냈다.

1674년 효종비가 죽은 뒤 일어난 제2차 예송 때는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주장했으나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되었다.

1675(숙종 1) 남인인 윤휴(尹鑴허적(許積허목(許穆) 등의 공격으로

관직을 빼앗기고 원주와 영암 등으로 쫓겨났다.

1680년 서인이 재집권하자 영의정이 되었고, 1681현종실록편찬총재관을 지냈다.

서인이 남인에 대한 처벌문제로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으로 갈릴 때 노론의 영수로서 강력한 처벌을 주도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진도에 유배된 뒤 사약을 받았다.

 

저서로 문곡집송강행장 松江行狀이 있다.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영평 옥병서원(玉屛書院), 진도 봉암사(鳳巖祠), 영암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김수흥(金壽興, 1626-1690)은 조선후기문신 의정부우의정,영의정

() 기지(起之), 호 퇴우당(退憂堂동곽산인(東郭散人), 시호 문익(文翼), 본관은 신안동

우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손자, 동지중추부사 증 영의정 김광찬의 아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형으로

좌승지(左承旨)를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신 백부(伯父) 김광혁(金光爀)의 계자(系子)로 들어갔다

 

 

        

 

김삼근金三近

김계권金係權

김영수金永銖 장령

김번金璠 서윤공

김생해金生海 신천군수 증좌찬성

김대효金大孝 삼가공, 김원효金元孝 증 판서공, 김극효金克孝 돈녕도정공

김상헌金尙憲 문정공 청음 의정부우의정 , 김상용金尙容 문충공

김광찬金光燦 증 의정부영의정

김수흥金壽興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의정부영의정 문곡

김창집金昌集 의정부영의정 몽와夢窩, 충헌공忠獻公

김이중金履中 서흥부사 증 영의정

김조순金祖淳 증 의정부영의정, 풍고楓皐, 충문공忠文公

김좌근金左根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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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 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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