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출처 광진구 향토사학자 김민수님의 연구논문에서
아차산에서 내려다 본 강동대교 방면
◈ 아차산성
1. 위치와 연혁
아차산성(阿且山城, 峨嵯山城)은 광진구 광장동 산33번지와 산5-11번지 일대에 걸쳐 있으며, 1
973년 사적 제234호로 지정되었다.
산성의 대부분은 서울특별시에 속해 있지만, 북쪽 성벽은 구리시 아천동에 접하여 있다.
아차산성은 아차산에서 한강으로 빠져들기 직전 마지막 봉우리에 축조된 산성이다.
강남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오고 북쪽으로 아차산 제1보루를 비롯하여
아차산과 용마산 일대가 조망되는 입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북쪽을 기지로 하여 남·서쪽의 한강 유역을 경계하는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풍수지리적으로는 북악[土德]을 중심으로, 남쪽의 관악[火德], 서쪽의 계양산[金德],
북쪽의 감악산[水德]과 더불어
동쪽[木德]을 이루고 있어, 한양 명당을 지키는데 없어서는 안될 산세를 가지고 있다.
아차산성은 일명 아단성(阿旦城), 아차성(阿且城·峨嵯城), 양진성(楊津城), 광진성(廣津城) 등으로 불리운다.
아차산성에 대한 문헌기록은 <광개토왕비문>의 영락 6년조에 광개토왕이 백제로부터 빼앗은 58성 가운데
아단성 이름이 보이며, 광개토왕의 능을 지키기 위해 뽑아 올린 점령지 주민의 출신지로서 기록되고 있다.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 권24 책계왕 24년조에 고구려가 대방을 치자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의 왕녀 보과를 취하여 부인을 삼았으므로 이로 인하여 이르기를
'대왕은 우리의 구생(舅甥)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군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왕은 고구려의 침구를 두려워하여 아단성과 사성을 수리하였다. 고 기록되어 아단성이 확인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권25 개로왕 21년조에 고구려 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내려와
북성을 7일 만에 빼앗고 남성을 공격하여 성문에 불을 놓자 왕이 달아났다.
이에 고구려 장수 걸루와 만년 등이 개로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조금 있다가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
그 죄를 헤아린 다음 아단성 아래로 묶어 보내어 살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을 통해 아차산성은 한강 건너 맞은편에 있던
백제 왕성인 한성의 방위에 절대적 비중을 가진 전략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이끈 군대가 왕성인 한성을 포위 함락시킴에 따라
개로왕은 생포되어 아단성 아래서 처형되었음을 볼 때,
당시 아단성은 고구려 군대가 주둔한 군사진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 뒤 77년간 한강 유역을 통치한 고구려의 전방기지로서 기능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아차산의 원래 이름은 아단산인데 임금의 이름자를 피하여 아차산·아차산성으로 변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즉 조선 태조 이성계의 뒤 이름이 단(旦)이므로 차(且)로 고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피휘(避諱)는 의미가 같은 다른 글자로 바꾸는데,
단을 차로 바꾼 것은 이 용례와 맞지 않아 이 주장은 따르기 어렵다.
또 여러 문헌에 '아단성'이라 표기되어 있으나,
≪삼국사기≫ 정덕본에는 '아단성'과 '아차성'이 혼용되어 피휘를 적용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또 금석문 자료에 보면 '旦'과 '且'가 목판의 새김에 따라 서로 혼용되었고,
고려 이전의 지명을 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峨嵯山'이 보이므로
음이 같은 '阿且'로 표기된 시기를 조선시대 이전으로 소급해서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산과 산성의 이름과 그 표기가 아단성(阿旦城)에서 아차성(阿且城)으로,
다시 아차성(峨嵯城)으로 변화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삼국사기≫에서 두 글자가 혼용된 사례에서 유래되어 점차 오늘날 지명표기로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조선 후기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 양주 성지조에 의하면
아차산에는 '양진성'과 '아차산고성'이라는 2개 성곽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양진성은 아차산 동쪽 절벽의 광진 위에 구부려 한강수에 임하고 있는데,
광주 평고성과 더불어 강을 격하여 상대하고 있다."고 하고,
"아차산고성은 산정에 있는데 유지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양진성은 한강 북안에 위치하여
남안의 평고성 즉 풍납리토성과 상대하고 있음을 통하여 나루를 방비하기 위한 성곽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유구나 문헌자료를 통해 볼 때
광나루 북방 아차산의 가지봉우리인 약 100m 높이의 동남면에 위치한 광진성,
즉 현재 광장동에 위치한 워커힐 뒤에 있는 아차산성 사적지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아차산고성은 어떤 성인가?
아차산에는 조선시대 살곶이목장성으로 추정되는 닫치지 않은 장성(長城) 유구는 있지만,
양진성 이외에 면적을 가진 성곽 유구는 오늘날 밝혀진 고구려보루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대동여지도>에 보이는 망우리 방향 아차산에 있는 성곽을 아차산고성의 유지로 보고 있다.
망우리쪽 성벽은 장성의 다른 구간과 달리 내부의 병력 이동과 배치를 위한 통로가 확연히 드러나 있으므로
본래 면적을 가진 성곽 유구일 가능성이 있다.
또 기존의 목장 구간에서 벗어나
동편의 동사골쪽으로 토석 혼축의 성벽이 흘러 내려가고 있는 점이 뚜렷이 확인된다.
특히 이 성벽은 아차산 정상과 근접한 위치에 있으므로
≪대동지지≫의 기록에 보이는 아차산정의 아차산고성으로 보고,
그 실체로 '아차산 제4보루'나 '시루봉 보루'의 성곽을 연계하여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아차산성은 1962년 워커힐호텔이 건립되면서 그 경내에 포함되어 일반인 출입을 제한하고 있으며,
예비군 참호 구축과 낙엽송 등 속성수를 심는 과정에서 성 내부의 유구가 훼손되고 있는 실정이다.
아차산 답사에는 아차산 고구려유적 발굴의 주도자인 향토사학자 김민수선생님의 해설과 안내를 받음.
-홍련봉 2보루 1호 석곽저장시설
석곽저장시설 바닥에서 출토된 철제깃대
문지(門址)는 전체적으로 성벽이 무너지고 토사가 덮여 그 위치를 확인하기가 어렵지만
대략 확인된 남문지와 서문지 그리고 2개소의 동문지가 확인되었다.
남문지는 성의 주된 통로로 성을 지키기 위한 주요 물자가 이곳을 통하여 공급되었을 것이다.
당시 기와를 얹는 건축물이 흔치 않았을 것을 감안할 때,
아차산성에서 기와가 다량 조사된 것은 아차산성에 중요한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기와에 새겨진 명문은 대부분 '北', '北漢', '漢山○', '受', '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이미 보고된 '北漢受國蟹口船'의 파편으로 생각된다.
또한 '北漢山○'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기와도 다량 조사되었는데,
신라가 한강 이북에 북한산성을 축성하였다는 기록과 비교하여
아차산성의 역사적 성격을 규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성벽은 화강암을 다듬어서 쌓아 올린 석축 성벽이며
성 내부에서는 많은 건물지와 온돌·배수로·연지(蓮池) 등이 조사되었다.
성 내부는 지대가 높은 장대지부터 가장 낮은 지역까지 평탄면과 경사면이 반복되는
계단상의 지형을 하고 있는데, 각각의 평탄면에는 병영과 같은 건물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곽은 지형적 여건을 이용하여 성벽의 석재를 쌓기 전에
경사진 능선 비탈면을 평탄하게 다듬고 능선을 따라가며 축조되었다.
정상부 평탄한 곳에는 20~30cm 크기의 편평한 할석을 약 10cm 정도 높이로
장축 8.5m, 단축 7.1m 규모의 타원형으로 깔아놓았으며,
건물 초석으로 보이는 받침돌 주변에서 몇 점의 기와편이 발견되고 장대지가 있었던 곳임을 고려할 때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쪽 장대지 이외에도 성벽이 굽어지는 지점마다 돌출된 각루 같은 시설이 있고
평탄하게 조성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소규모 장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150여년생 왕벗꽃나무
아차산 주먹바위
옆으로 누워있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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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발굴되지 아니한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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