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릉(思陵)은 조선 제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의 능으로 단릉 형식이다.
사적 제209호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에 위치하고 있다.
정순왕후 송씨는 1440년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태어났다.
1454년 음력 1월 22일에 15살에 한살 연하였던 단종과 혼인하여 왕비에 책봉되었다.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일임 상왕이 되자 왕대비가 되어 의덕(懿德)의 존호를 받았다.
그러나 1457년,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추진하던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자
상왕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었고, 의덕왕대비는 군부인이 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1457년 단종이 세상을 떠난 지 64년 후인
중종 16년 1521년 음력 6월 4일 왕후가 82세의 일기로 승하하고,
177년이 지난 숙종 24년(1698) 11월 종묘에 신위가 모셔졌고 능호를 사릉이라 하였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자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 초가집에서 평생 흰 옷만을 입고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처음에는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출가한
해주 정씨 묘역이었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민간 신분의 묘로 조성되었다.
그 후 중종 때 대군 부인의 예로 복위되고,
숙종 때(1698년) 왕후의 능으로 추봉되어 다른 능에 비하여 단출하면서 간소하다.
능침의 규모는 매우 작고, 병풍석 난간석을 설치하지 않았으며,
문석인과 석마만이 자리 잡고 있다. 양석과 호석도 한 쌍 씩으로 간소화되어 있다.
사릉의 정자각은 맞배지붕으로 되었으며
배위가 짧기 때문에 전체 건물의 모습이 정(丁)자형 보다는 정사각형의 느낌을 준다.
정자각으로 연결되는 신도 및 어도가 동계와 연결되지 않고 끊어져있다.
사릉은 문화재청이 관할하는 궁과 능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는
양묘사업소 묘포장이 있어서 많은 전통 수종의 식물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정순왕후는 1521년(중종 16) 6월 4일 소생 없이 승하하였다.
중종은 단종부터 7대에 걸친 왕대를 산 정순왕후를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정순왕후는 후사가 없었으므로 경기도 양주 남쪽 군장리에 있는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시가인
해주 정씨의 가족 묘역에 안장하고 제사를 지내주었다.
1698년(숙종 24) 11월 6일 숙종에 의해 노산군이 단종대왕으로 복위되자 부인도 정순왕후로 복위되었으며,
신위는 창경궁에 모셔져 있다가 종묘에 안치되었다.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일생을 보냈다 하여 능호를 사릉(思陵)이라고 붙였다.
그 후 1986년부터 사릉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 생졸년도 : 1440년 ~ 1521년
정순왕후는 판돈녕부사 송현수의 딸로, 1440년(세종 22)에 태어났다.
1453년(단종 1) 14세의 나이에 타고난 성품과 검소의 미덕을 인정받아 간택되었고,
그 다음해에 어린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당시는 단종의 숙부였던 수양대군이 영의정으로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때였으므로,
단종과 정순왕후 부부는 스스로 아무런 일도 결정할 수 없었다.
결국 1455년(단종 3) 6월 11일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수강궁에 머무르게 되었다.
2년 후인 1457년(세조 3) 사육신의 주동으로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던 사건이 발각되자,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되고, 정순왕후는 부인으로 강봉되었다.
궁궐을 나온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의 동망봉 기슭에 초가집을 짓고
시녀들이 해오는 동냥으로 끼니를 잇다가, 염색업을 하며 평생을 살았다.
1521년(중종 16) 장장 7대 왕대에 걸친 삶을 마감하였으니 이 때, 춘추 82세였다.
정순왕후는 15세에 왕비가 되었다가 18세에 단종과 이별하고,
부인으로 강등되어 평생을 혼자 살아가야했던 불운한 인물로,
그녀의 비극에 얽힌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단종은 1457년(세조 3)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도,
복위사건으로 인해 영월로 유배당하고, 결국 유배지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순왕후는 아침저녁으로 산봉우리에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렸으며
온 마을 여인들이 땅을 한 번 치고 가슴을 한 번 치는 동정곡을 했다고 전한다.
그후 이 봉우리는 왕비가 동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하여 동망봉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한경지략』에 의하면 영도교 부근 부녀자들만 드나드는 금남의 채소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왕비를 동정한 부녀자들이 끼니 때 마다 왕비에게 채소를 가져다주다가
궁에서 말리자 왕비가 거처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장을 열어 주변을 혼잡하게 하고,
계속해서 몰래 왕비에게 채소를 전해주려는 여인들의 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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