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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왕 단종의 장릉(莊陵),엄흥도 정려각,박충원 낙촌비각,금부도사 왕방연 , 청령포

구름에 달

by 碧巖 2015. 6. 17.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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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들을 위한 배식단으로 매년 단종 제향을 올린후 제사를 모시는 제단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사릉에서 가져온 소나무

 

 

 

 

 

 

엄흥도 (嚴興道, ?~?) 는 조선 전기의 문신, 충신이다. 본관은 영월이다.

강원도 영월(寧越) 호장(戶長)으로 있을 때, 세조의 명을 받은 금부도사에 의해 단종이 사사되었는데 

단종이 세조에 의해 영월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사람들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려 하지 않자  

어느날 밤 영월 청령포에 가서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고  관을 비롯한 장례 기구 일체를 혼자서 마련하였다.

그러나 겨울이라서 토지가 얼어붙어 매장할 곳이 마땅하지 않았으나,

어느 날 매장지를 찾던 중 노루(또는 사슴)이 앉았다가 사라진 양지바른 자리를 발견하고

그 곳에 단종의 재궁을 안치하였다 한다.

그리고 벼슬을 내놓고 아들을 데리고 숨어 살았다.

현종 때 송시열의 건의로 그의 자손이 등용되었고,

영조 때 그의 충성심을 기념하는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공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사육신과 함께 영월의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중초(仲初), 호는 낙촌(駱村)·정관재(靜觀齋). 조(藻)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행주기씨(幸州奇氏)로 찬(欑)의 딸이다.

1528년(중종 2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1년에 승문원에 올라 홍문관에 참예하였다.

다음해사국(史局)에 돌아가 검열(檢閱)이 되었고, 이어 설서·승정원에 전직되었다.

그 뒤 독서하라는 명으로 당후(堂後)에서 대기하다가 장악직장(掌樂直長)이 되었다.

1534년에 예문관봉교가 되었다가 전적(典籍)이 되고, 이어 정언이 되었다.

다음해이조정랑·사간원정언·이조좌랑·헌납·홍문관부교리가 되었다. 1537년에 병조정랑으로 있다가 이조정랑으로 옮기었다.

 

조부상을 당해 3년 뒤 다시 승문원교검에 보직되었다가 영월군수로 발령되었다.

이때 이 군에 3태수가 죽어나가 요담(妖談)이 흉흉해 모든 사람이 이곳에 부임하기를 꺼렸으나,

박충원이 초연하게 행동해 기괴한 소문이 사라졌다.

 

1545년 인종이 중국사신 영접사로 부름을 받아 나가기도 하였다.

그 후 직강(直講)이 되었고, 이어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사성·성천부사를 거쳐 중시에 발탁되어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올랐고,

통례원우통례 겸 교서관판교가 되었다.

1552년(명종 7) 좨주(祭酒)로 있다가 해서(海西)를 안무(按撫)하였다.

1554년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온 뒤 형조참의가 되었고 1556년 세번째 승정원에 들어갔다.

1558년 한성우윤·병조좌랑을 거쳐 밀원군 겸 홍문관제학(密原君兼弘文館提學)에 제수되었다.

이어 예조판서·사헌부로서 호남·호서를 안무하였다.

1564년 명종이 ‘大提學兵曹判書朴忠元(대제학병조판서박충원)’이란 10자를 친필로 하사하였다.

 

 

 

 

왕방연(王邦衍 )

사육신을 중심으로 한 단종복위사건이 사전에 발각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중인 노산군(魯山君 : 단종)에게 1457년 사약이 내려질 때 그 책임을 맡은 의금부도사였다.

그는 영월에 이르러 사약을 받들고 노산군 앞으로 나아가려 하였으나 감히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렸다.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재촉하자 하는 수없이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을 때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때 단종을 항상 곁에서 모시던 공생(貢生 : 관가나 향교에서 심부름하던 통인과 같은 사람)이 이 일을 담당하였다.

이때의 괴로운 심정을 읊은 시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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