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山墳庵사산분암 憂樂齊우악제
宋應瑞송응서 1530(중종 25)∼1608(선조 4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서원(瑞元). 충청도 회덕 출신.
군자감정(軍資監正) 요년(遙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여즙(汝楫)이고, 아버지는 승사랑(承仕郎) 세영(世英)이며,
어머니는 곡산연씨(谷山延氏)로 감찰 인(仁)의 딸이다. 성제원(成悌元)의 문인이다.
1556년(명종 11) 천거에 의하여 순릉참봉(順陵參奉)이 된 뒤
광흥창부봉사(廣興倉副奉事)·종묘서직장(宗廟署直長)·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옥과현감·은율군수·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판관(判官)·중추부경력(中樞府經歷) 등 내외 관직을 거쳐,
1606년(선조 39) 기로(耆老)로서 절충장군(折衝將軍)·부호군(副護軍)에 올랐다.
송응서의 묘역 측면에서
송응서의 부친 송세영묘역
송응서의 조부 송여즙 묘역
군자감판관 송세확묘역
묘역 후면에서--- 맨 아래가 송응서의 묘역
송국전(宋國銓)묘역
1595년(선조 28)∼1649년(인조 27). 조선 중기 효자. 자는 방형(邦衡)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조부는 임천군수(林川郡守) 송남수(宋枏壽)이고, 부친은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 송희원(宋希遠)이다.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종형제(宗兄弟)이다. 부인은 안경인(安敬仁)의 딸 순흥안씨(順興安氏)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친이 병에 걸리자 손수 탕약을 끓여 병수발을 들었으며,
돌아가실 때가 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입에 흘려드렸다.
그러나 별 효험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극진한 예로 상례(喪禮)를 치렀다.
홀로된 모친을 극진히 봉양하며 살았는데, 1649년(인조 27) 병이 걸려 죽음앞에서
홀로된 모친을 두고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을 애통해하며 눈물을 흘리자,
모친 또한 하늘이 효자를 빼앗아간다며 슬피 울었다.
슬하에 3남 예조판서(禮曹判書) 제월당(霽月堂) 송규렴(宋奎濂)‧
첨지(僉知) 송규연(송奎淵)‧감역(監役) 송규락(宋奎洛)을 두었다.
사후 1685년(숙종 11) 장남 송규렴이 강양관찰사(江襄觀察使)에 임명되면서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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