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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주(李國柱), 연선부원군(延善府院君), 연안이씨.

구름에 달

by 碧巖 2016. 2. 1.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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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4일 오늘날씨  철원최저 영하24도, 서울 영하18도, 체감온도 영하 30도, 철원여행에 제일 좋은날씨?

 

 

 

연선 부원군(延善府院君) 이국주(李國柱)[1487~1556]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복경(攴卿).

홍문관 수찬 통훈대부 지제교를 지낸 이세범(李世範)

대사헌 이우민(李友閔), 의정부 좌찬성 이호민(李好閔),

 생부-형례(亨禮, 숙황의 자),

 

아들 우민 사민 희민 호민 상민

 子 이호민(李好閔) : 대제학, 좌찬성, 부원군, 문희공

 

 -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지현리 산5

 위치 : 화현면사무소 옆에 있는 화현초등학교의 병설유치원 길을 지나

         크리크골프장 길을 따라 1.5키로미터 정도 안에 있음

     골프장 끝에 다다르니  웅덩이가 있는데, 묘역이 바로 옆 산이라 뉘 소유인지?

석축 계단을 따라~~~

연안인(延安人)이국주(李國柱)[1487~1556]는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영특하여 학문에 열중하였다.

1525(중종 20)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갔다.

상사생(上舍生)이 된 뒤 조예가 더욱 깊어져 모범적인 행동으로 동료들을 감복시켰다.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해 실패하였으나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성품이 준엄하고 결백하였으나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항상 온화하였고,

 자신을 검속할 때는 세심하였으나 다른 사람을 책망할 때는 간략히 하였다.

     

효성을 다해 양모를 모시고 뜻을 거스르지 않아 환심과 사랑을 얻었고, 친척들은 친소를 따지지 않고 똑같이 대하였다.

 가까이서 방문한 사람이나 멀리서 여행해 온 사람을 막론하고 쉬어 가게.” 하고 음식을 접대하였으므로

해마다 들어오는 수입은 넉넉하였지만 항상 쪼들렸다.

비명횡사한 친척이 있으면 분개하여 먹지도 않고 관청에 소송한 뒤에야 그쳤으나,

간혹 이치에 맞지 않는 일로 자신을 가해한 자에게는 따지지를 않았다.

어떤 사람이 너무 재물을 낭비하고 가계를 돌보지 않는다.”고 하자, “일가친척과 나는 모두 한 사람의 몸에서 나왔다.

가난해 먹을 것이 없는 친척이 있으면 차라리 내 것을 주고 같이 굶고 같이 먹어야 마음이 편하다.

내가 어찌 명예 때문에 그러겠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또한 인근의 부랑자들에게도 빠짐없이 베풀었다.

당시의 권력자가 이국주의 행의(行誼)를 높이 평가하여 의장고 낭청에 천거하여 오랫동안 재직하였다.

그 후 제용감 주부로 승진하였다가 종부시로 옮긴 뒤 사축서와 조지서로 옮겼다.

이들 관직은 모두 한직으로서 우대한 것이었다.   나중에는 외직으로 나가 이천 현감이 되었다.

평소 앓고 있던 지병이 조금 차도가 보이자 친구들이 산중 고을은 업무가 간편해 휴양하기 좋다.”고들 하였으나

아무리 병중이라도 국록을 거저먹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업무를 폐하지 않았다.

좌우에서 적극 말렸으나 듣지 않아 끝내 병세가 더욱 악화하여 영영 일어나지 못하였다.

 

묘는 1557(명종 12) 2월 경기도 양주의 천마산 언덕에 안장하였다가

이듬해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지현리 산5번지에 있는 현재의 장소로 반장하였다.

늦게 둔 넷째 아들 호민이 부원군에 봉해졌을 때 연선 부원군(延善府院君)의 작호가 내려졌다

 

 

이국주 선생은 조선 성종18(1487)에 출생,

중종20(1525) 사마시에 합격한 뒤 의장고(儀仗庫)의 낭청, 제용주부가 되었다.

그는 이때 부인 여주 민씨의 상배를 당해 독신으로 지내던 중

51세 때 아들 우민(友閔)의 주선으로 비안(比安) 박씨 문중의 17세 낭자와 재혼했다.

67세 때 아들을 두었는데 그 아들이 바로 선조때 명현으로 좌찬성을 지낸 오봉 이호민이다.

선생은 늦게 아들을 얻어 호민이 어릴때 이천현감(伊川懸監)으로 재직중에 별세하니 나이 70세였다.

아들이 현달한 뒤 연선부원군에 추증되었다.

묘는 증정경부인인 여주 민씨와 비안 박씨 두 부인과 합장묘로서 봉분의 높이 1.6m, 둘레18m이며,

비의 석재는 대리석이며 높이 119cm, 48cm, 두께12cm의 규모이다.

고풍스러운 동자석

망주석이 문양도 좋고 석호 조형물도 예쁘게...

조선 중기의 문신 연선부원군(延喜府院君) 이국주(李國柱, 1487~1525)의 묘갈

 

1556년 양주(楊洲) 천마산(天磨山) 정향원(丁向原)에 초장(初葬)되고

이듬해 현 위치로 이장(移葬)하면서 후손들에 의해 건립된 이국주의 묘갈이다.

이 비석은 비좌관석(碑座冠石)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비좌는 마모가 심하여 문양을 식별할 수 없다.

 

이국주(1487~1556)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천현감(伊川縣監)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찬자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공조판서 ·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시문과 음률에 뛰어났고 글씨에도 능했던 정사룡(1494~1573)이다.

서자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송인(1517~1583)이다.

그는 중종(中宗)의 셋째 서녀인 정순옹주(貞順翁主)와 결혼하여 여성위(礪城尉)에 봉해졌으며,

글과 글씨에 능하여 산릉(山陵)의 지()와 궁전의 액()으로부터 사대부들의 비갈(碑碣)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오흥(吳興)의 필법을 받아 해서를 잘 썼다.

비문의 전반부에는 연안(延安) 이씨(李氏)의 탄생과 계보를 밝히고 있다.

중반부에는 공()의 관직생활과 성품에 대한 내용이다.

후반부에는 양주에서 현 위치로 이장한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 공()의 부인과 후손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담고 있다.

이 비석은 조선 전기의 전형적인 형식인 비좌관석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연안이씨의 계보(系譜)도를 담고 있는 등 중요한 자료이다.

 

 

  비두 전면의 중앙에는 구름속에서 떠오르는 태양과 날아가는 삼족오를 표현하고

 

후면의 중앙에는 구름속의 달을 표현

 

이국주 선생 묘(李國柱 先生 墓) 후면에서


조부 이숙기李淑琦 호조판서 연안군延安君 정양군靖襄公

   부 이세범李世範 홍문관수찬 증 좌찬성

       이국주李國柱 연선부원군延善府院君, 자 복경(攴卿).

               장자 이우민李友閔 수졸재守拙齋, 첨지중추부사,경상도황해도관찰사,장예원판결사

               차남 이사민

               삼남 이희민李希閔

              사남 이호민李好閔 문희공 오봉 文僖公 五峯, 동지중추부사, 좌찬성,연릉부원군

              오남 이상민李相閔 창성부사 증 이조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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