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약재 김구용(惕若齋 金九容)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559, 546
高麗國直亮同德佐理功臣三重大匡中書侍郞平章事 永昌君金承澤之壇 配樂浪國夫人慶州金氏
고려국직량동덕좌리공신삼중대광중서시랑평장사 영창군김승택지단 배낙랑국부인경주김씨
高麗國榮祿大夫成均館大司成判典校寺事 文溫公金九容先生之壇 配唐城郡夫人南陽洪氏
고려군영록대부성균관대사성판전교시사 문온공김구용선생지단 배당성군부인남양홍씨
척약재김구용 惕若齋金九容 1338(충숙왕 복위 7)∼1384(우왕 10). 고려 후기의 문신.
<자>경지(敬之), <호>척약재(惕若齋), 육우당(六友堂), <시호>문온(文溫)
경력 삼사좌윤, 성균관대사성, 판전교시사
작품/저서 주관육익, 척약재집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제민(齊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惕若齋) 육우당(六友堂).
첨의중찬 방경(方慶)의 현손으로 묘(昴)의 아들.
공민왕 때 16세로 진사에 합격하고, 왕명으로 모란시(牡丹詩)를 지어 일등을 하여 왕으로부터 산원직(散員職)을 받았다.
18세에 과거에 급제해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가 되었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이 중건되자, 민부의랑겸성균직강(民部議郎兼成均直講)이 되어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후학의 훈화에 노력해 성리학을 일으키는 일익을 담당하였다.
1375년(우왕 1) 삼사좌윤(三司左尹)이 되었을 때, 이인임(李仁任) 등의 권신들이 북원(北元)이 보낸 사절을 맞으려 하자,
이숭인·정도전(鄭道傳) 등 당시 친명파와 함께 도당(都堂)에 상서해 이를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귀양갔다.
뒤에 여흥(驪興)으로 옮겨 강호에 노닐며 거처하는 곳을 육우당이라 이름하고, 시와 술로 날을 보냈다.
1381년(우왕 7)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어 왕의 절제 없는 거둥을 경계하는 글을 올려 직간하였다.
이듬해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1384년 행례사(行禮使)가 되어 명나라에 갈 때, 국서와 함께 백금 1백냥과 세저(細苧)·마포 각 50필을 가지고 갔다.
요동에서 체포되어 명나라 서울 남경(南京)으로 압송되었는데,
명나라 태조의 명으로 대리위(大理衛)에 유배되던 도중 노주 영녕현(瀘州永寧縣)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사장(詞章)을 잘해, 특히 시로 유명하였다.
이색(李穡)은 그의 시를 가리켜, “붓을 대면 구름이나 연기처럼 뭉게뭉게 시가 피어나온다.”고 하였다.
『동문선』에 그의 시 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무창시(武昌詩)가 유명하다.
허균(許筠)은 이 시를 들어 청섬(淸贍)하다 하였고,
신위(申緯)도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에서 그의 시를 들어 감탄하고 있다.
『주관육익(周官六翼)』을 찬했으며, 문집인 『척약재집』이 전하고 있다.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의 용장서원(龍章書院)에 배향되었다.
高麗國三重大匡中書平章事上洛君金昴之壇 配三韓國夫人驪興閔氏
고려국삼중대광중서평장사상락군김묘지단 배삼한국부인여흥민씨
▲ 포천 금수정(金水亭) 정자 옆 문온공 척약재 김구용 시비
주위에는 창옥병(蒼玉屛)을 비롯해서 준암(岩), 연화암, 동천석문(洞天石門)등
기승지(奇勝地)가 펼쳐져 있어
옛부터 시인, 묵객들이 이 정자를 찾아 시주(詩酒)와 풍류(風流)를 즐겼던 곳이라고 한다.
▲ 포천 금수정(金水亭) 정자 옆에는 봉래 양사언 선생의 시조인 “태산이 높다하되…” 시조비가 있다.
포천 금수정(金水亭)은 포천 영평8경중 2경으로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546에 영평천에 위치하고 있으며 향토유적 제17호로 지정되어
1989년 복원되었고 인근관광지는 창옥병, 옥병서원, 연화암 등이 있다.
"금수정은 영평천으로 둘러싸인 옛 영평현의 구읍지와 인접한 이곳 절벽위에 위치하여
옛부터 영평 8경의 하나로 손꼽혀 왔다.
이 정자는 본래 부사 김호가 세울 당시 이곳이 풍수지리적으로 소의 머리 형국이라 해서 우두정이라 했다가
1608년경에 봉래 양사언이 금수정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주위에는 창옥병을 비롯해서 준암 연화함 동천석문 등 기승지가 펼쳐져 있다.
옛부터 시인 묵객들이 이 정자를 찾아와 시화와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따라서 이곳에는 일세의 시인이며 명필인 양사언을 비롯하여
사암 박순, 한음 이덕형, 석봉 한호, 척약재 김구용, 한호, 강산 이서구 등
역대의 명류들과 얽힌 일화와 유적이 남겨져 있다.
지금도 볼 수 있는 동북쪽 암벽에 금수정이란 양사언 선생의 글씨를 비롯하여
10미터 위 바윗돌에 새긴 "취대"라는 글씨
그리고 냇가 한복판 바위에 "경도"라고 쓴 각자 등은 그 옛 자취의 일부이다.
양사언 선생의 편액이 달려있던 본래의 금수정은 6.25때 멸실되었고
그 기단과 장초석만 남아 있던 것을
1980년 관계 문헌과 현지답사 등의 고증을 받아 포천시에서 현 건물을 복원 중수한 것이다."
▲ 포천 금수정(金水亭) 정자 전경
금수정은 영평천(永平川)의 물에서 약 8m 되는 절벽위 평평한 대지(垈地)에 위치해 있고
영평천으로 둘러싸인 옛 영평현의 구읍지와 인접해 있던 금수정은 영평8경의 하나로 손꼽히던 정자이기도 했다.
▲ 포천 금수정(金水亭) 정자 각자들의 모습
▲ 포천 금수정(金水亭) 정자 각자들의 모습
▲ 포천 금수정(金水亭) 정자 각자들의 모습
인근 안동김씨 고가
▲ 금수정 정자 방향쪽으로 금수정(金水亭)이라 새겨진 글씨가...
▲ 영평천으로 내려가 무릉(武陵) 바위글씨를 먼저 보고
▲ 답사 당일인 2016년 1월 24일은 철원 영하 23도의 기록적인 기온으로 꽁공 얼어버린 얼음을 딛고 경도(
瓊島)라 새겨진 바위를...
▲ 영평천 가운데 기기묘묘한 한 무리의 바위가 있는데 경도(瓊島)라고 새겨진 바위글씨가 있어서
▲ 초서(草書)로 새겨진 시(詩)는 <증 금옹(贈 琴翁)>이란 제목으로 「봉래시집(蓬萊詩集)」1권에 실려 있다고...
봉래 양사언선생은 금수정 주인 琴翁(금옹) 金胤福(김윤복) 의 사위라고 한다.
봉래시집(蓬萊詩集)에 <금옹에게 드리다(贈 琴翁,증 금옹)>이라는 시가 실려 있는데,
제목 옆에 작은 글씨로 세주(細註)를 적어 놓았다고 한다.
그 글귀에 “금옹은 금수정 주인이다. 이 시를 준암에 새겼다.
(琴翁。錦水亭主人也。刻此詩於尊岩。)”라고 하였다.
琴翁 金胤福금옹 김윤복은 金禮生(김예생)의 서자(庶子)로,
김예생은 예안현감으로 재임할 당시 충렬공 김방경의 묘소에 묘갈을 세웠다.
금옹 김윤복은 아드님이 없이 따님만 한 분 두었는데, 그분이 봉래 선생에게 출가 하였다.
이 때문에 금수정이 한동안 봉래 양사언선생이 관리하였고,
그 후 봉래 선생 사후에 철원부사공 金穫(김확) 이 사들여서 오늘날까지 문온공 종손가에서 소유하고 있다.
이처럼 봉래 양사언 선생은 직접 자신의 시에 금수정 주인이 금옹이라 적었다.
▲ 회란석(廻瀾石)은 바위에 瀾자가 살짝 보여서 바위에 붙은 마른 풀들은 걷어내야지...
▲ 란석(瀾石)이라는 한자가 보이기 시작하고
▲ 란석(瀾石)이라는 한자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 원래는 회란석(廻瀾石)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바위가 깨어져 나가서 란석(瀾石)만 남아...
▲ 회란석 바위 후면에 동천(洞天)이란 글씨가
▲ 동천석문(洞天石門)이란 글씨 중에 석문(石門)이라는 글씨는 땅속에 묻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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