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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7대손-포천공 정종선--사헌부감찰 정규징(鄭奎徵),경기수군방어사 정도징(鄭道徵),통덕랑 정찬술(鄭纘述)

구름에 달

by 碧巖 2016. 4. 6.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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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 10대손 사헌부감찰 정규징(鄭奎徵)

 

사헌부감찰 정규징(鄭奎徵, 16371694)   字 文伯

1676년 무과에 급제하고, 경상우병영우후 등을 지냈는데,

1689년 조정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문안하여 미움을 받았고,

장희빈에게 경하드리는 예도에는 불참하고

인현왕후의 사저 앞을 지날 때에는 예를 갖추었다.

 

 

         증조부 포천공 정종선(抱川公  鄭從善)

             조부 부사과 정길(鄭佶)

             부친 정공한(鄭公翰)

             모친 고성이씨, 이즙(李檝)따님

                      사헌부감찰 정규징(鄭奎徵)

                               子 정찬서(鄭纘緖)

          

 

 

 

          司憲府監察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迎日鄭公諱奎徵之墓 淑夫人水原崔氏祔左 淑夫人德水李氏祔右

          사헌부감찰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영일정공휘규징지묘 숙부인수원최씨부좌 숙부인덕수이씨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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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의 10대손 경기수군방어사 정도징(鄭道徵)

 

포은 정몽주의 10대손 경기수군 방어사 정도징(鄭道徵, 1654~1730)

성여(聖餘).

1676(숙종 2)에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1689(숙종 15)에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가 되었다.

그 후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중추부사·도총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1677(숙종 23)에 희천군수(熙川郡守)가 되었다.

이때 선정을 베풀어 고을 주민들이 선정비를 세웠다.

서산군수·충청도병마우후를 거쳐 1724(경종 4)에 대구영장으로 승진하였으나,

이듬해 금군장에서 병마사로 좌천되었다.

1726(영조 2)에 경기도수군방어사를 역임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아들이 원종공신에 책봉되어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통훈대부 행 희천군수 경기수군방어사 동지중추부사 정도징(鄭道徵, 1654~1730] 성여(聖餘).

   증조부 포천현감 정종선(鄭從善)

      조부 승지 정간(鄭侃)

      부친 신창현감 정주한(鄭周翰)

              자 통덕랑 정찬술(鄭纘述)

 

                 有明朝鮮國京畿水軍防禦使贈兵曹判書鄭公道徵之墓 貞夫人全州李氏祔左

                    유명조선국경기수군방어사증병조판서정공도징지묘 정부인전주이씨부좌

 

포은 10대손 정도징(鄭道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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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鄭道徵정도징의 아들 정찬술

 圃隱11代孫  정찬술(鄭纘述)

술보(述甫)

생년 갑자(甲子) 1684

 부친 정도징(鄭道徵) 통훈대부(通訓大夫) 전 행희천군수(前 行煕川郡守)

 생부  정덕징(鄭德徵)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동생 정찬혁(鄭纘爀)

   

1725(영조 1) 전라병사가 되었고,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포도대장으로 발탁되었다. 

1743년 평안병사가 되었다가 파직되었는데, 평안감사 이종성(李宗城)이 훌륭한 장수임을 역설하여 구제되었다.

1749년 통제사, 1752년 총융사가 되어 금위영·어영청의 대장을 겸직하였으나,

부하를 검칙(檢飭)하지 못하였다는 영남이정사(嶺南釐正使) 민백상(閔百祥)의 탄핵으로 고신을 환수당하였고,

1755년 무고한 백성을 죽인 까닭으로 파직되었다가 1758년 다시 총융사에 올랐다.

한편, 1746년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요청으로

그의 증손이 정몽주의 사손(祀孫)으로 정하여짐으로써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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