贈 左承旨 後又 贈 吏曹判書 金仁伯 墓域
13세손 김인백의 묘 경기도 의왕시 왕곡동 산8
김인백[金仁伯, 명종 16년(1561)∼광해군 9년(1617)], 자는 군수(君壽), 본관은 청풍(淸風),
김인백은 관직에 나간 적이 없이 처사로 살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록이 많지는 않으나 평생 예를 지키며 선비의 삶을 살다가 5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묘표에는 ‘贈 左承旨 金仁伯之墓 後又 贈 吏曹判書’라 기록되어 있어 후일 후손들이 현달하여
좌승지에 贈職되고 이어서 또 이조판서에 증직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증조는 정주목사 김우증(金友曾),
조부는 대호군 김여광(金汝光),
아버지는 김계(金繼),
어머니는 사직 안광옥(安光沃)의 따님 순흥안씨,
배위는 현령 권대훈(權大勳)의 따님 안동권씨이다.
1남 김익려(金益礪)
2남 김극부(金克孚)
3남 공조정랑 김극형(金克亨)
贈 左承旨 金仁伯之墓 後又 贈 吏曹判書
贈 吏曹判書 金仁伯 墓域 측면에서
贈 吏曹判書 金仁伯 墓域 측면에서--옆의 3기는 차남 金克孚김극부와 배위 문화유씨, 함평이씨 묘소
贈 吏曹判書 金仁伯 墓域 후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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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품김씨 가계 발복도●]
10세 김우증(金友曾) 의왕시 입향조-정주목사,증병조판서 청평군:중종반정공신,
11세 김여광(金汝光)
12세 김계(金繼)
13세 김충백 - 14세 김익신- 15세 김수 - 16세 김간 - 17세 태로(이하 5대 봉군 배출)
13세 김인백 - 배위 안동권씨(1564~1632) : 술좌진향, 와혈: 조선 8대 명당이라 함
14세 김극형(1605-1663, 공조정랑, 화순현감) : 명당 대지, 충주시 가금면 봉황리
15세 김징(1623~1676, 관찰사) - 의왕시 왕곡동 홍치골 (횡룡입수혈, 축좌)
16세김구(우의정)- -17세 김희로 -18세 김치만 - 19세 김종수(1728(영조4)~ 1799(정조23)좌의정)
17세 김재로(1682(숙종 8)~1759(영조 35)영의정) -18세 김치인(1716(숙종 42)~ 1790(정조 14)영의정)
16세 김유(대제학)- 17세 김약로(숙종 20년(1694)∼영조 29년(1753.좌의정)
17세 김상로(숙종28년 (1702)~(1759년)영의정)
13세손 김인백의 처 안동권씨 음택 - 청풍김씨 발복의 근원지라고 평가하는 8대명당 중 한곳.
경기도 의왕시 고천동 산 31 (의왕시 도서관 옆)
판서공 김인백 배위 안동권씨 묘역. 현령 권대훈(權大勳)의 따님 안동권씨
●명당찾아 삼천리
청풍 김씨 김인백의 부인 안동 권씨의 묘
==박상근의 웰빙 풍수 명당(明堂) 이야기 ==
청풍 김씨 김인백의 부인 안동 권씨의 묘가 천하 명당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 유택은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 왕곡리에 있다.
산세는 수원 북쪽에 있는 광교산맥으로 한 줄기가 뚝 떨어져 서쪽으로 오다가
지지대고개에서 산머리를 다시 북으로 돌려 자그마한 봉우리 다섯 개를 이루어 놓았으니 이를 오봉산이라 한다.
장백산맥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줄기는 남쪽으로 수천 리를 달려
충청도 속리산에 이르고 여기에서 꺾인 한 줄기가 수백 리를 뻗어 수원의 광교산에 이른다.
오봉산 주맥이 곤산용으로 신방술에서 반환하여 다시 머리를 돌려 신술입수에 서좌묘향으로 동향판이다.
맑은 물줄기는 선사방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흘러간다.
산 형국은 마치 닭이 둥우리에서 알을 품고 있는 듯 한 금계포란형이다.
이러한 명당자리에 김인백 공의 부인 안동 권씨부인이 잠들어 있다.
원래 이 묏자리는 묏자리가 아니었다.
부자인 석(石)씨의 집터였다.
당시 도승 두 사람이 천문에 밝아 모든 사람들은 이들을 기인이라 불렀다.
이들 도승들은 팔도강산을 유람하며 명승지는 물론,
산을 벗 삼아 명당을 찾아다녔지만 항상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여 말다툼을 했고 그럴 때마다 서로 지술을 견주었다.
한번은 그들이 파주 땅을 지나다가 역시 천하명당 자리를 발견하자 서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때마침 그들이 있는 가까운 곳에서 더벅머리 총각이 땀을 식히고 있다가 두 도승들의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다.
총각은 그들이 보이지 않는 나무 밑으로 자리를 옮겨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贈 吏曹判書 金仁伯妻 贈貞夫人 安東權氏 之墓
증 이조판서 김인백처 증정부인 안동권씨 지묘
“이 자리는 천한 사람이 들어갈 자리요.
지금이 2월이니 이때쯤 이 자리에 묘를 쓰면 8월 보름에 발복이 될 것이오.”
“아니요. 8월이 아니라 9월 보름날이어야 발복이 된다니까요.”
총각은 이들 모르게 나무지게를 걸머지고 다시 도승들이 있는 곳으로 와서는
땅에 코가 닿을 정도로 엎드려 절을 하며 자기는 천민으로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다고 했다.
머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두 도승은 약속이나 한 듯
“마침 잘 됐군, 우리 둘 중에 누가 알아맞히나 내기하세.”
“그럽시다.”
“이보게 총각, 자네 아비 무덤을 당장 이리로 옮기게.
우리들은 9월 보름에 다시 오겠네.” 이렇게 약조하고 두 도승은 떠나버렸다.
총각은 즉시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였다.
그 후, 총각이 머슴으로 살고 있는 이대감이 8월 보름에 온 식구를 대동하고 뒷산 선영 묘에 제사를 지내려 올라갔다.
제사를 차리다가 집에 곶감을 두고 와서 총각에게 광 선반에 곶감을 두고 왔으니 그걸 갖고 오라며 심부름을 시켰다.
머슴이 뛰어 내려가서 광에 들어가 선반을 쳐다보니 너무 높아 곶감을 내릴 수가 없었다.
마땅히 디딜만한 것이 없어 주인 딸에게 도움을 청했다.
총각이 땅에 엎드리고 아가씨가 등 위에 올라가서 곶감을 내리게 하다가
그만 넘어져서 두 사람은 광속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인연을 맺고 말았다.
그 후, 이 대감의 딸의 혼담이 오고가자 아가씨는 마음을 굳게 먹고 아버지에게 총각과의 관계를 털어 놓았다.
이대감은 몹시 화를 내었으나
이미 벌어진 일이라 총각에게 딸을 시집보내기로 하고 길일을 택하는데 9월 보름에 혼례를 치르기로 했다.
딸을 머슴에게 시집보내기로 정하자 가문의 창피로 생각하고 집안 식구들만 모여 혼례를 올리기로 했다.
식이 거행되자 두 도승이 나타나서 한마디씩 말을 했다.
“내가 무어라 했다. 9월 보름이라고 하지 않았나”
8월 보름이라고 우겨대던 도승은 머리만 끓고 있었다.
혼례를 치른 신랑은 두 도승을 안방으로 모시고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것 보게 8월 보름이 맞지.” 두 도승은 얼굴을 마주 쳐다보며 껄껄 웃음을 토해냈다.
두 도승은 오대산을 향해 걸었다.
“과연 대지로군”
“그러게 말일세 명당이야.”
“장곡봉이윤습(長曲峰而潤濕)이니 최씨 아니면 석씨의 집터로군
묏자리에 혈을 비키고 집을 지으니 물각유주(物各有主)로다.”
아닐세, “앞으로는 김씨네가 소유할 자릴세 그려.
무동봉이 뛰어나니 3대 정승은 무난하겠네.”
두 도승은 솔잎을 두어줌씩 따서 한데 모아 끈으로 꼭꼭 매어
그 자리를 서너 자 파더니 솔잎을 땅에 묻었다.
“내년 이맘때 와서 파보세”
때마침 이 길을 가던 청풍 김씨 김인백의 아들 김극향이 이 이야기를 듣고 솔잎을 묻은 자리를 확인하고
이듬해 정월에 와서 그 자리를 파보니 그때 묻었던 솔잎이 황금빛으로 변했고 송진은 얽히어 딱딱한 돌처럼 바뀌었다.
그는 도승들이 했던 것처럼 솔잎을 새로 따서 그 자리에 묻고 가 버렸다.
그 후 두 도승이 그 자리에 와서 땅을 파보니 아직도 솔잎이 푸른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탄식하며 돌아갔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석씨네는 점점 가세가 기울어져 가더니 화재로 인하여 몰락하고 말았다.
이 틈을 타서 김극향은 그 자리를 사들여 어머니 안동 김씨를 안장했다.
청풍 김씨는 조선 후기의 명문세족으로 예종부터 영조까지 많은 영웅호걸을 배출했다.
상신 8명을 비롯하여 명성왕후, 효의왕후 등이 태어났다.
또한 3대상과 부자 영상을 배출하여 더욱 그 가문을 빛내는데
3대 정승을 배출한 성씨로는 청풍 김씨, 청송 심씨, 달성 서씨 세 가문뿐이다.
부자가 같이 영의정을 지낸 성씨로는 그리 많지 않다.
청송 심씨, 장수 황씨, 남양 홍씨, 해평 윤씨, 안동 김씨, 연안 김씨이며 3대상 과 부자 영상은 오로지 청풍 김씨 뿐이다.
3대 정승에 부자 2대 정승을 배출한 청풍 김씨
청풍김씨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것은 조선시대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육과 청백리로 유명한 김진국,
그리고 현종 때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김징 등 세 사람이다.
김육은 정치, 경제, 천문, 지리, 병략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던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다.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발행했을 뿐만 아니라 송도지, 해동명신록 등을 남겼다.
숙종 때는 6조 판서를 두루 거쳐 우의정에 오른 김구는
노론과 소론의 당쟁완화에 진력하였으며 글씨와 문장에 뛰어났고,
그의 아들 김재로는 영조 때 영의정에 올랐다.
김재로의 아들 김치인은 영조 때 영의정에 오르니 바로 3대 정승이요. 부자 영상이다.
김재로는 40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20년 동안 정승의 자리를 지켰고, 영의정만 4차례 역임했다.
그는 영의정 재임기간 사화 때 죽은 김창집 등 노론들을 복권시켰으며
세조의 왕위 찬탈 과정에서 억울하게 숨진 황보인, 김종서 등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도 했다.
그의 아들 김치언은 정조의 명을 받아 대전통관을 편찬하였고, 영조 때는 영의정을 지냈다.
숙종 때 대제학을 지낸 김유(金楺)는 우의정을 지냈는데 김구(金構)의 동생이다.
그의 첫 아들 김취로는 공조, 예조, 호관을 지냈고, 둘째 김약로는 좌의정, 셋째 김상로는 영의정을 지냈다.
근대 인물로는 김윤식과 김규식이 있다.
김윤식은 구한말 독립운동가다.
그는 한일합방 후 자작의 직위를 받았으나
3.1 운동때 민족진영에 가담하여 조선독립청원서를 일본정부와 조선초독부에 제출하였다가 관작이 삭탈되고
그 후에도 흥사단, 대동학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김규식은 상해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파리평화회담의 전권대사로 참석하여 일본을 규탄하였고
해방 후에는 입법의원의장을 역임하였으며
안동인 김구 (金九)와 함께 남북협상에 참석했으나 실패하자 공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6.25 사변 때 납북 당했다.
<박정수 소설가>
贈 吏曹判書 金仁伯妻 贈貞夫人 安東權氏 墓域 측면에서
贈 吏曹判書 金仁伯妻 贈貞夫人 安東權氏 墓域 후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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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손 處士 金克孚 처사 김극부묘역
□소재지 : 경기도 의왕시 왕곡동 산8
김극부(金克孚)는 김인백[金仁伯의 둘째아들로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김극부 묘는 부친인 김인백 의 묘 옆에 있는데 묘역에는 묘표와 상석 향로석이 있다.
김극부, 문화류씨, 함평이씨의 봉분 3개를 一자로 배치한 합장묘이다.
묘표의 전면에는 (處士金公克孚墓 元配文化柳氏祔 后配咸平李氏祔)
“처사김공극부묘 원배문화류씨부 후배함평이씨부”라 기록되어 있고,
후면에도 글씨가 있으나 마모가 심하다.
건립연대는 1595년(선조 28)이다.
處士金公克孚墓 元配文化柳氏祔 后配咸平李氏祔
처사김공극부묘 원배문화류씨부 후배함평이씨부
증 이조판서 김인백과 둘째아들 處士 金克孚 처사 김극부묘역
處士 金克孚 처사 김극부묘역 후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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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손 관찰사공 金澄김징선생 묘역
관찰사공 金澄김징선생 묘역(1623 - 1676) (횡룡입수혈, 축좌)
의왕시 왕곡동 198-1번지 윗산(홍치골)
字 원회(元會)
號 감지당(坎止堂)
15세손 金澄김징선생(1623 - 1676)
字 원회(元會)
號 감지당(坎止堂)
공조정랑 화순현감 좌찬성에 추증된 사천(沙川) 김극형(金克亨)의 아들이었다.
관직은 전라도 관찰사에 이르렀으며 사후 아들 金構김구 (1649년), 金楺김유 (1653년) 등이
현달하여 사후 증직으로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貞敬夫人 咸平李氏로 되어 있어 남편인 김징선생과 달리
아들인 金構김구와 金楺김유가 부귀현달하는 것을 생전에 직접 목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全羅道觀察使 贈領議政坎止堂 金公諱澄之墓 貞敬夫人咸平李氏祔左
전라도관찰사 증영의정감지당 김공휘징지묘 정경부인함평이씨부좌
坎止堂감지당金澄김징선생 가계도(1623 - 1676)
고조부 : 김우중(金友曾)
증조부 : 김계(金繼)
조부 : 김인백(金仁伯)
조모 : 안동권씨(安東權氏)
생부 : 김극형(金克亨)
생모 : 청송심씨(淸松沈氏)
생모 : 광주정씨(光州鄭氏)
감지당 김징(坎止堂 金澄) 전라도관찰사 동부승지
부인 : 함평이씨(咸平李氏)
장남 충헌공 김구(忠憲公 金構) 우의정
손자 김희로(金希魯) 호조참판
증손자 고은당 김치만(高隱堂 金致萬) 세자익위사 시직(侍直
현손 문충공 몽오 김종수(文忠公 夢梧 金鍾秀)대제학 좌의정
손자 충정공 청사 김재로(忠靖公 淸沙 金在魯) 영의정
증손자 헌숙공 고정 김치인(憲肅公 古亭 金致仁) 영의정
차남 문경공 검재 김유(文敬公 儉齋 金楺) 이조참판 대제학
손자 김정로(金正魯)
손자 충헌공 김취로(忠獻公 金取魯) 대사헌,병조,예조,이조,호조판서
손자 김성로(金省魯)
손자 충정공 만휴암 김약로(忠正公 晩休庵 金若魯) 좌의정
손자 익헌공 하계 김상로(翼獻公 霞溪 金尙魯) 영의정
증손 : 김치양(金致讓)
증손 : 김치영(金致永)
삼남 : 김무(金楙) -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김규식의 7대조부
손자 : 김흥로(金興魯)
손자 : 김익로(金益魯) -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김규식의 6대조부
증손 : 김치명(金致明) -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김규식의 5대조부
현손 : 김종민(金鍾敏) -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김규식의 고조부
관찰사공 金澄김징선생 묘역 측면에서
관찰사공 金澄김징선생 묘역 측면에서
관찰사공 金澄김징선생 묘역 후면에서
수원-영흥부사 이추(李錘), 광교 문암골 여주이씨, 부사공 이추 (0) | 2016.05.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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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문경공 검재 김유(文敬公 儉齋 金楺),검재 김유, 문충공 김종수, 몽오산인 김종수(夢梧山人 金鍾秀), 김익선 (0) | 2016.05.10 |
진천-신헌 고가, 장숙공 위당 신헌 고가(壯肅公 威堂 申櫶 古家), 진천 왜가리번식지 (1) | 2016.05.06 |
진천-신숙,신한장,신현복,노은영당, (0) | 2016.05.04 |
진천-신화국,신잡 평천부원군 충헌공 ,신경희 (0) | 2016.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