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감동 화장장은 원래 서구 아미동에 있었다.
부산대학교 병원에서 괴정으로 넘어가는 까치고개입구에서
까치고개 쪽으로 약 250여 미터 정도를 오르다 보면 나타나는
하늘색 페인트의 현재 천주교아파트자리가 바로 당감동 이전의 아미동 화장장 자리였다.
아미동은 1909년 대신동의 화장장이 이전해 와서
1959년에 당감동으로 이전해 가기 전까지 화장장이 있는 마을이 되었고
이 자리에 화장장이 들어서게 된 이유는
일본인들의 공동묘지가 주거지 외곽의 아미동 산 19번지에 조성되었기 때문이었다.
1876년 부산항이 강제 개항된 이래로 일본인들의 부산 이주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개항 전까지 용두산 아래 존재했던 세계 유일의 일본 외 일본인 마을이었던 초량왜관은
일본인들의 전관거류지가 되었고 골드러시와 같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일본인들의 주거지는
현재의 광복동과 남포동, 충무동 일대로 순식간에 확대되었고
어느 순간 넓은 갈대밭이었던 부평동,
부민동 일대까지 부산항 근처의 얼마 되지 않는 평지란 평지는 다 일본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일본인의 주거지가 확대됨에 따라 개항 초 외곽지에 형성되었던
복병산(현 중구청이 있는 용두산 맞은편 산)의 일본인들의 공동묘지도 주거 외곽지인 아미동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죽으면 살아생전의 종교와 관계없이 불교식으로 화장을 하고 뼈를 골함에 넣어 납골묘에 모신다.
이러한 과정에 따라 망자의 시신은 까치고개 입구에 있었던 염불막(현 까치고개 입구 아동보호종합센터자리)으로 왔다.
이곳에서 스님의 염불소리에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아미동 화장장으로 옮겨졌고
화장이 된 망자의 뼈는 골함에 담겨 일본인의 공동묘지였던 아미동 산 19번지 납골묘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렇듯 이곳은 매일같이 일본인들의 망자가 찾아 들어오는 죽음 자의 마을이 되었고
일본인들도 이곳을 타니마치(곡정-谷町)라 불렀다.
1945년 8월 15일 갑작스러운 해방 함께 일본인들은 황망히 부산에서 쫓겨났다.
가재도구를 챙길 겨를도 없이 짐 보따리 두 개만을 허락받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당장의 목숨이 걸려있는 상황 속에서 아무리 조상이라지만 죽은 자의 무덤까지 돌볼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사라지고 난 뒤 아미동 산 19번지에는 화강암으로 된 납골묘만이 공동묘지 형태로 남았고
1950년 발발한 6.25전쟁 시기 부산으로 내려온 피란민들에 의해 묘지 위로 천막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전쟁 후에는 부산시 차원의 산복도로 판잣집 강제철거와 강제이주정책, 화재 등으로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이주민들은 비교적 일터가 가까운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죽은 자의 집은 크기 그대로 산자의 집으로 바뀌게 되었다.
원래 묘지 사이의 길이었던 비석문화마을의 좁디좁은 골목의 바닥은
딱 봐도 어색한 돌들이 여기저기에 박혀 있기도 하고 놓여 있기도 하다.
집의 아래쪽 기초 부분에 놓여 있는 돌들, 바닥과 집의 입구에 놓여 있는 어색한 돌들은 모두가 묘지석이다.
화강암으로 된 납골묘의 비석, 주춧돌, 난간, 상석 등
길바닥과 담처럼 쌓아 올린 축대에서 발견되는 화강암들은 모두가 묘지의 일부분들인 것이다.
이 마을에서 건축을 많이하였다는 한 어른은
집을 지을 때 다들 기초공사를 하지 않고(땅을 파면 뭐가 나올지 몰라)
주변의 돌들을 쌓아 수평만 잡고 집을 올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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