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사는 의자왕 15년(655년) 백제의 법명(法明) 스님이
유마경(維摩經)을 독경하며 병을 고친 후 세웠다는 절 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있는 곳으로 더 유명하다.
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
修善寺수선사 내에 있는 최익현 순국비
구한말 대 유학자이자 구국 항일투쟁의 상징인 최익현은 쓰시마에 유배되어 순국하셨다.
장례는 백제의 비구니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수선사에서 치러졌으며 유해는 부산으로 이송되었다.
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1986년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힘을 모아 수선사에 비를 세웠다.
면암 최익현 선생 순국비
최익현1833(순조 33)∼1906. 조선 말기의 애국지사.
본관 慶州경주. 字 贊謙찬겸, 號 勉菴면암
선생은 구한말의 독립 운동가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박제순 등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상소운동이 실패하자 전국에 걸쳐 반일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포고팔도사민〉을 각지에 보내 우리 민족이 당당한 자주민임을 밝히고, 국권회복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1876년 1월 일본과의 통상조약 체결이 추진되자 도끼를 지니고 궁궐 앞에 엎드려 화의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895년 8월 민비학살사건이 일어나고,
11월에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포천군 내의 양반들을 모아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고 단발령에 반대할 것을 꾀했다.
최익현 선생은 74세의 나이에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8도 사민(유생)에게 포고문을 낸 후 의병 활동을 호소하게 된다.
그의 제자 임병찬(독립의금부 수장으로 고종의 지원을 받던 의병단체) 등과 더불어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의 침략에 맞섰고
곡성 및 순창을 돌며 의병 활동을 계속 이어갔지만 결국 마지막 항전지 순창에서 항복을 한다.
항복의 사유는 대치하고 있는 일본군 내에,
고종 황제의 관군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같은 민족끼리 총칼을 겨눌 수 없다고 생각,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항복을 한 후에는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령이 떨어진다..
면암선생은 일제가 주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 하여 단식 투쟁을 벌였고
이후 단식 투쟁을 중단하긴 했지만 당시에 얻은 질병으로 인해 1907년 1월 1월(화) 순국하신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이즈하라의 수선사에 잠시 머물렀기에
선생의 넋을 기리기 위해 순국비를 세운 것으로
면암 최익현 선생에 대한 현재의 역사적 평가는 엇갈리고 있지만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를 끝까지 지키고자
목숨을 걸고 투쟁한 것을 보면 진정한 보수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분인 것 같다.
[면암 최익현 선생 초상/채용신 작품/국립중앙박물관]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에 있는 최익현 선생의 동상
대마도에서 한국까지 49.5km
대마도에서 후쿠오카까지 138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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