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羅濟通門나제통문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과 무풍면을 가로지른 산줄기의 암벽을 뚫어 만든 문.
높이 3m, 길이 10m의 자연암석을 인위적으로 관통시킨 인공동굴로서,
설천면과 무풍면의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덕유산국립공원 경역(境域) 안에 속하며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의 입구에 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윗부분에 ‘羅濟通門(나제통문)’이라는 글자가 남아 있다.
설천면은 무주읍에서 구천동으로 가는 길목으로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 양국의 경계였다고 한다.
지금도 동굴 양쪽에 위치한 자연부락인 무풍 방면의 이남(伊南)과 무주 방면의 새말〔新村은
1㎞ 정도 떨어져서 행정구역으로 모두 소천리에 속하지만 언어와 풍속이 서로 다르고 통혼(通婚)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각기 풍속과 전통이 판이하게 유지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는 삼국시대와 관계된 유적이나 전설이 많다.
부근의 야산에 산재한 약 3백여 기의 고분은 신라와 백제간에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며,
파리소(沼)라는 연못은 양국의 격전시에 시체가 산처럼 쌓여 파리가 모여들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그리고 통문은 삼국통일전쟁시에 신라의 장군 김유신(金庾信)이 왕래했다고 하여 ‘통일문(統一門)’이라고도 불린다.
인근의 무산성지(茂山城址) 근방 사선암(四仙巖)이라는 크고 평평한 바위는
김유신 등 4명의 화랑이 바둑을 두며 놀던 장소라고 전해지며, 지금도 바위에 바둑판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전설의 사실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이 지역이 신라·백제 양국의 전쟁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신라·백제 양국은 5세기 이전에는 주로 조령·죽령 방면과 추풍령 방면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뒤 가야 제국(加耶諸國)이 신라에 흡수되어 소백산맥을 경계로 백제와 맞대게 되면서부터
양국은 육십령(六十嶺)을 넘나들며 전투를 벌였다.
통문은 육십령 부근에 위치하고 있어 실제로 신라군과 백제군이 자주 내왕했을 것이고,
『삼국사기』에 김유신이
백제의 장군 의직(義直)과 무산성(茂山城 : 지금의 전라북도 무주)에서 싸웠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김유신에 관한 전설도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통문은 삼국시대가 아닌 후대에 통문의 역사적 의미가 전해져 내려오다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혹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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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문을 지나면 열녀경주김씨지비가 서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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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兵將 姜武景像 의병장 강무경상<1878(고종 15) ~ 1910>
姜武景강무경1878(고종 15) ~ 1910
전라북도 무장 출신. 필묵상을 경영하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6년 심남일(沈南一, 또는 沈守澤)로부터 의병을 일으키자는 서신을 받고
기삼연(奇參衍)·김준(金準)·김율(金聿) 등과 협의하여 김율의 의진에 입대, 심남일과 더불어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김율이 전사하자, 심남일을 통수로 추대하고 전군장(前軍將)이 되어 의병을 거느리고 전남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1907년 8월 한국군 강제해산 후 심남일과 협의하여 11월 1일 함평군 신광면에서 의거하여 심남일의 선봉장이 되었다.
심남일 의진은 1908년 2월 13일 신광면을 떠나 남평으로 행군, 3월 7일강진군 오치동에서 접전하여
적 수십명을 살상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다.
4월 15일에는 장흥 곽암(藿巖)에서 적 3명을 사살하고,
6월 11일에는 남평 장담원(長淡院)의 접전에서 적 5명을 사살하였으며,
25일 반촌(坂村)에서 머무르던 중 접전하여 적 5명을 살상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7월 그믐에는 적장 고토〔琴平山의 부대와 접전하여 적장 이하 10여명을 사살하고 당산촌(堂山村)으로 후퇴하였다.
그뒤 장흥의 대치·해남 등지에서 접전하여 많은 전공을 올렸다.
1909년 3월 능주 일대에서 적과 크게 접전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두문(杜門)으로 후퇴하였다.
5월 12일 석호산(石虎山) 일대에서 의병전을 전개를 위하여 의병장 안규홍(安圭洪)과 연합전선구축을 기획하였으나,
의병을 해산하라는 순종이 7월 21일 내린 조칙(詔勅)조칙을 받고
마침내 1909년 9월 5일 전남 영암군 금마면 고인산 아래에서 의병부대를 해산하게 된다.
'장수와 군사들 쓸쓸히 이별 눈물 뿌리고/
고인산 떠나는 말조차 더디구나/
왜적을 없앨 날 언젠가 있으리니/
지난 3년 맹세한 일 부디 잊지 마세.'
심남일 대장이 남긴 한시다.
의병을 해산한 후
강무경 의병장은 심남일 대장과 함께
신병 치료를 위해 화순 풍치의 바위굴(현 전남 화순군 청풍면 이만리 화악산 기슭)에서 은거했다.
석굴은 마을에서 1㎞ 정도 떨어진 곳이었는데,
의병들이 일본 군경의 눈을 피해 아침저녁으로 밥을 지어 몰래 제공하기를 한 달여,
밀정이 그 사실을 밀고해 부인 양방매 여사와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니, 이날이 10월 9일이었다.
양방매 여사는 18세 때인 1908년 9월 구국의 일념에 불탔던 강무경 의병장과 혼인,
남편을 내조하다 1909년 3월부터 남편 부대에 가담하여 맹활약해 왔던 터였다.
12월 강무경 의병장은 광주에서 대구감옥으로 이감된 뒤,
교수형을 받아 32세의 젊은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10년 8월 27일이었다.
1962년 건국훈장국민장이 추서되었다.
항일투사 순국의병장 강무경, 홍일점의병 양방매 부부사적비
호남3대 의병장 중 한분이시자 일제가 가장 위험한 의병장으로 지목했던 심남일(沈南一,守澤)의 결의형제이자
선봉장으로 여러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던 의병장 강무경.
그의 아내로 어린 여자의 몸으로 총을 들고 의병전쟁의 길로 나선 홍일점 의병 양방매 여사.
결국 의병을 해산하고 부부가 함께 일제에 피체되어
1910년 강무경 의병장은 순국하고
양방매 여사는 이제 갓 스물, 어린 여자임이 감안되어 석방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1986년 9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의병장의 아내로 수절하였다.
1960년 강무경 의병장이 먼저 독립유공자로 표창되고
2005년 뒤늦게 양방매 여사도 그 공훈이 인정되어 건국포장을 받고
국립묘지에서 부부가 함께하게 되었다.
눌인김환태문학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