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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군-서벽정棲碧亭, 문충공 송병선. 전북 기념물 제80호.

구름에 달

by 碧巖 2016. 7. 22.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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棲碧亭 서벽정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80

전북 무주군 설천면 두길리 2109

전북 무주군 설천면 두길리에 있는 조선 말기의 정자.

정면 4,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집.

전라북도 기념물 제80.

한말의 유학자 연재(淵齋)송병선(宋秉璿)1886(고종 23)에 건립하였다.


이 일대는 천연의 절경을 이루어 예부터 많은 선비들이 즐겨 찾았으며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각 계곡을 무계구곡(武溪九曲)이라 명명하고 아홉 군데의 명소마다 명칭을 붙였다.

서벽정은 그 중 제4곡인 일사대(一士臺)에 위치한다.

본래 수성대(水城臺)라 부르던 곳인데,

송병선이 이곳에 정자를 짓고 후진을 양성할 때 이 고장 사람들이 그의 학리(學理)를 보고

 동방에 하나밖에 없는 선비라 하여 동방일사(東邦一士)라는 별호를 붙이고

그가 사는 곳이라 하여 일사대(一士臺)라 했다고 한다.

淵齋 宋秉璿연재 송병선(1836~1905)

본관은 은진(恩津)

화옥(華玉)연재(淵齋)동방일사(東方一士)

諡號 문충(文忠)

진안 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개항기 순국지사.

 

송병선은 송시열(宋時烈)9세손으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수일을 단식하고 왕에게 소를 올리려다

고향인 대전 석남촌에 강제 이송되고 말았다. 이에 그는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 자결하였다.

그가 조선 말의 세태를 비관하며 은둔생활을 할 때 이곳을 찾아와 수려한 산수에 반해 지은 정자가 서벽정이다.

평면은 중앙 2칸이 마루이고, 마루 좌측에는 전면에 툇마루를 둔 한 칸 반 크기의 방을 들였으며,

우측 칸은 전면을 한 단 높게 하여 누마루같이 구성하고 뒤쪽에 방을 만들었다.

전체적인 평면의 형식이 정자라기보다 서원의 강당형식과 같다.

정면은 칸마다 모두 4짝 띠살 분합문을 시설하였고,

방과 청() 사이에도 분합문이 있어 필요할 때 하나의 공간으로 터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자 안에는 1897년 그의 제자인 무주군수 조병유(趙秉瑜)가 봉안한 주자(朱子)와 송시열의 초상이 있다.


송병선(宋秉璿)[1836~1905]은 대전광역시 회덕에서 태어났다. 큰아버지인 송달수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1882년에 공조 참판,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충청북도 옥천에서 정자를 짓고 유학을 가르치면서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5적의 처단과 을사조약의 파기를 건의하였다.

을사조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경무사 윤철규(尹喆奎)에게 인치(引致)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고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하여 세 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겨 놓고 자결 순국하였다.

유서에는 을사 5적의 처형과 을사늑약의 파기 및 의로서 궐기하여 국권을 찾을 것 등을 호소하였다.

저술로는 무계만집(武溪壹輯), 근사속록(近思續錄), 패동연원록(浿東淵源錄),

동감강목(東鑑綱目)53권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연재집(淵齋集)이 있다.

송병선은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회복하고자

우선 동지들을 규합하고 사상적 무장을 확대하고자 제자를 양성하는데 주력하였다.

그 실천으로 송병선은 1867년 옥천 이지당(二止堂)에서의 강회 활동을 시작으로

기국정(杞菊亭), 영산의 풍천당(楓川堂), 금산의 용강 서당(龍江書堂), 임피의 낙영당(樂英堂),

고암 서당(考巖書堂) 등지에서 강회를 개최하고,

서천의 풍옥헌(風玉軒), 성주의 노강(老江)등지에서 향음례(鄕飮禮)를 행하였다.

이밖에 영동의 빙옥정(冰玉亭)에서 강론하였고 그해 7월 무주 구천동에 서벽정(棲碧亭)을 중건하여

매년 봄·가을로 선비들을 모아 강학(講學)하였다.

이러한 명망에 무주 군수 조병유(趙秉瑜)는 인근의 선비들을 모아놓고 송병선에게 강론을 청하기도 하였으며,

경남 거창의 병산서재(屛山書齋), 경상도 지례의 세심대(洗心臺)등지에서도 활발한 강론 활동을 펼쳤다.


특히 전라북도 임피면 낙영당에서의 강회 때에는

화서학파의 거두이자 태인 의병을 이끌었던 최익현(崔益鉉)이 참석하여 송병선의 영향력을 과시하기도 하였고,

이외에 임피 향약[1891. 4], 회덕 향약[1905. 5] 등 향약을 통해 지역 사회의 결집을 주도하였다.

송병선은 1867년 옥천 이지당에서의 강회 활동을 시작으로 1905년까지 충청 지역은 물론 전라, 경상도 등지에서

유림들과의 접촉을 통해 위정 척사 운동의 여론 확산을 도모하면서 문인들을 규합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다.

송병선은 고종을 직접 만나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한 방책을 강구하고자

190512, 70세의 노구를 이끌고 상경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한국 식민지화의 걸림돌로 인식되어 차단되었다.

송병선은 19051228일 대전으로 압송되자 나라와 도()의 수호를 위해 죽음을 선택하여 1230일 자결하였다.

송병선이 순국하자 고종 황제는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를 추서하였고,

1917년에 이관구는 삼현묘(三賢廟)에 최익현·유인석·송병선을 3현으로 배향하였으며,

황현의 매천야록, 송상도의 기려수필, 조소앙의 유방집등 한말 독립운동가 열전에는

송병선이 포함되는 등 그의 사상과 항일의 정신은 한말과 일제 강점기라는 어두운 시절을 비춘 밝은 등불이 되었다.

송병선이 순국한 후, 송병선의 제자들은 그의 주검을 고향 회덕이 아닌 전라북도 임피에 모셔다가 장례를 치렀다.

또한 사당을 지어 매년 제사를 모시고, 송병선의 뜻을 이어 교육 사업을 펼치면서 아름답고 의로운 죽음을 기려왔다.

송병선은 송자대전수차, 벽사설, 근사속록, 동유연원록, 무계만집, 동감강목등의 저술을 통해

조선을 유지해 온 성리학 사상을 널리 확산시켰고 이를 통해 외세에 대한 사상적 무장을 강화하였다.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술산리 383-1에 묘소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14년 충청북도 영동군 문충사(文忠詞)에 배향되었는데

1970년 대전광역시 동구 용운동으로 이전되어 용동 서원(龍洞書院)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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