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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우성전, 문강공

구름에 달

by 碧巖 2016. 7. 30.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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禹性傳우성전

1542(중종 37)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단양(丹陽). 경선(景善), 추연(秋淵연암(淵庵). 諡號 문강(文康)

   

1561(명종 16) 진사가 되고, 1564년 성균관 유생들을 이끌고 요승 보우(普雨)의 주살을 청원하기도 하였다.

1568(선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봉교(奉敎), 수찬(修撰) 등을 거쳐

1576년 수원현감으로 나가서는 명망이 높았다.

한때 파직되었다가 다시 장령(掌令사옹원정을 거쳐 1583년에 응교(應敎)가 되고 뒤에 여러 번 사인(舍人)을 지냈다.

 

동서분당 때 동인으로 분류되었고, 그 뒤 이발(李潑)과 틈이 생기자 

禹性傳은 남산에 살아서 남인,

이발은 북악(北岳)에 살아서 북인으로 분당되었다.

남인의 거두로 앞장을 섰으며, 동서분당 때나 남북의 파쟁에 말려 미움도 사고 화를 당하기도 하였다.

1591년 서인인 정철(鄭澈)의 사건에 연좌되어 북인에게 배척되고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집해 군호(軍號)추의군(秋義軍)’이라 하고 소금과 식량을 조달해 난민을 구제하였다.

또한 강화도에 들어가서 김천일(金千鎰)과 합세해 전공을 세우고 강화도를 장악해 남북으로 통하게 하였다.

병선을 이끌어 적의 진격로를 차단했으며,

권율(權慄)이 수원독성산성(禿城山城)에서 행주에 이르자 의병을 이끌고 지원하였다.

 

그 공으로 봉상시정에서 대사성으로 서용되었다.

그 뒤 계속 활약, 용산의 왜적을 쳐서 양곡을 확보해 관군과 의군의 식량을 마련하였다.

그 뒤 퇴각하는 왜군을 경상우도 의령까지 쫓아갔으나 과로로 병을 얻어 경기도 부평에서 사망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계갑록(癸甲錄)·역설(易說)·이기설(理氣說)등이 있다.

諡號는 문강(文康)이다.

 

曾祖父 禹桓(우환)

祖父 禹成允(우성윤) 承仕郞승사랑

父 禹彦謙(우언겸) 현령

丈人 許謙(허엽) 대사헌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有朝鮮國贈資憲大夫吏曹判書 弘藝文大提學行大司成知製敎 諡文康丹陽禹公性傳墓 配贈貞夫人陽川許氏祔左

유조선국증자헌대부이조판서 홍예문대제학행대사성지제교 시문강단양우공휘성전묘 배증정부인양천허씨부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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