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東寧이동녕선생 묘소
신흥무관학교 소장,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한국국민당 당수
1869(고종 6)-1940. 독립운동가. 정치가. 행정가.
1906년 북간도 용정촌에서 이상설, 여준 등과 서전의숙을 설립하였고,
1907년 귀국하여 안창호, 양기탁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1935년에는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여 당수가 되었다.
본관은 연안(延安). 字 봉소(鳳所), 號 석오(石吾, 石五, 石梧)·암산(巖山).
충청남도 천안 출신. 아버지는 영해군수를 지낸 병옥(炳鋈)이고, 어머니는 광주안씨이다.
고향 서당에서 전통 교육을 받고
10세 때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의 할아버지 석구(錫九)의 집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1885년 일가가 상경, 서울 종로 봉익동에 정착하였다.
1886년 아버지를 따라 경상북도 영해읍으로 갔으며, 1888년 평양으로 갔다.
1892년 응제진사시(應製進士試)에 합격하였다.
1893년 아버지를 따라 원산으로 가서 육영사업에 조력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 개화 민권의 기수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897년 독립협회 주최로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열렸을 때 잘못된 정치를 탄핵하고
상소하며 국민운동 일선에 나섰다. 이로 인해 이준(李儁)·이승만(李承晩)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1898년 7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뒤 이종일(李鍾一)이 창간해 경영하는
『제국신문 帝國新聞』에 사설을 집필하면서,
이종일의 가르침을 받아서 본격적으로 민족의식과 사상 정립을 위해 수련하였다.
『제국신문』 논설위원으로 개화 논설 수십 편을 집필하였다.
1903년이상재(李商在)·전덕기(全德基)목사 등 종교인과 손잡고 YMCA운동을 전개하였다.
1904년 한일협약이 강제 체결되자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전덕기·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조성환(曺成煥) 등과 같이
청년회를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면서 김구(金九)·이회영(李會榮) 등과 교유하기 시작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되자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이 조약이 체결된 덕수궁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면서 조약의 무효와 파기를 선언했다가
일본 헌병에 잡혀 2개월 간 고문을 받았다.
1906년 만주 북간도 용정촌(龍井村)으로 망명, 이상설(李相卨)·여준(呂準) 등과 같이
서전평야에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 한국 동포와 2세의 민족 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해 독립운동의 기수들을 길러냈다.
1907년 이준·이상설·이위종(李瑋鍾)이 헤이그특사로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가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안창호(安昌浩)·전덕기·양기탁·이동휘(李東輝)·이갑(李甲)·노백린(盧伯麟)·유동열(柳東說)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또 안창호·이회영과 협력해,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발행을 지원하였다.
대성학교(大成學校)와 오산학교(五山學校) 설립에도 조력했으며,
상동학교(尙洞學校)를 설립·교사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1910년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뒤 만주 서간도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망명하였다.
이석영(李石榮)·이철영(李哲榮)·이회영·이시영(李始榮)·이상룡(李相龍) 등과 함께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해 교포들의 신분 보장과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섰다.
곧이어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고 초대 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학교는 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확장, 개편되어 항일독립군 양성의 중추기관이 되었다.
1913년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으며,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2년 뒤 이상설의 알선으로 시베리아총독 보스타빈이 약속한 한국군관학교(韓國軍官學校) 설립을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3개월 간 투옥되었다. 1915년 이상설·이동휘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정부를 수립하였다.
독립운동가의 사업기관으로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해
『대동신문(大東新聞)』과 『해조신문(海朝新聞)』을 발행·보급하였다.
1918년 길림성(吉林省)에서 대종교 김교헌(金敎獻) 외에 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김좌진(金佐鎭)·여준 등
민족 대표 39명이 1919년 2월 1일 독립선언서(대한독립선언서)를 내외에 선포할 때
대종교 서도본사(西道本司)의 포교책으로 활약하였다.
그 해 2월 블라디보스토크와 니콜리스크에서 상해로 건너가 정부 조직을 모색하였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4월 13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 초대 의장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을 주선하였다.
4월 13일 28명의 동지들과 임시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고 얼마 뒤 국무총리로 취임하였다.
그 해 9월 국내·노령·중국 3갈래의 임시정부가 통합되고,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면서 내무총장(內務總長)이 되었다.
1921년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돌아와 국무총리로 지명하자 사양하다가,
이동휘 일파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사퇴한 뒤 국무총리대리를 맡아 위기를 극복하였다.
그 뒤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의 소집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불신이 표면화되었다.
이에 그는 안창호·여운형·조소앙·이시영·차이석(車利錫)·홍진(洪震)·노백린(盧伯麟)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 대동단결을 호소하였다.
전장(鎭江)에서 요양 중 상해로 와서 1924년 국무총리로 정식 취임했고,
군무총장(軍務總長)도 겸임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 궐석으로 직무수행이 어렵게 되자 대통령 직권을 대행하였다.
1925년에 두 번째로 의정원의장[11대]이 되었다.
1926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무령 제도로 개정되자 잠시 국무령(國務領)이 되었으며,
법무총장도 겸임하였다.
다음 해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主席)이 되어 약화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1929년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 이사장에 추대되었고,
당기관지 『한보(韓報)』·『한성(韓聲)』을 발행하였다.
1929년 10월 세번째로 의정원의장[13대]이 되어 존폐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1930∼1932)이 되는 중책을 짊어졌다.
1932년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의거를 김구·이유필(李裕弼) 등과 지도, 윤봉길의 쾌거를 이룩하였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과 같이 저장성(浙江省)자싱(嘉興) 수륜사창(秀綸紗廠)으로 피신하였다.
1935년 세번째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1935∼1939)이 되었다.
이때 양우조(楊宇朝)·엄항섭(嚴恒燮)·이시영·조성환·차이석·송병조(宋秉祚)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조직해 당수로 추대되었다.
1937년 한국국민당 대표로 대한광복진선(大韓光復陣線)을 결속하고 진로를 모색하였다.
193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네번째 주석(1939∼1940)이 되어
김구와 합심해 전시 내각을 구성, 시안(西安)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였다.
그 뒤 급성폐렴으로 쓰촨성(四川省) 치장(綦江)에서 죽었다.
조국광복 후 1948년 사회장으로 봉환식을 거행했고, 효창원에 안장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李東寧이동녕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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曺成煥 조성환선생 묘소
1875(고종 12)∼1948. 독립운동가.
임시정부 군무부차장, 한성정부 평정관, 북로군정서 군사부장, 대한독립군단 외교부장, 대한독립촉성회위원장
본관은 창녕(昌寧). 일명 욱(煜). 號는 청사(晴簑). 서울 출신이다.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나 군부의 부패함을 숙청하려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3년 만에 칙령으로 특사되어 참위(參尉)로 임관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906년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해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하였다.
1907년 1월 연해주로 망명해 헤이그특사 파견 때 이상설(李相卨)을 원조하였다.
그리고 1908년 노우키에프스크(煙秋)에서 최재형(崔在亨)과 구국 방략을 협의하고
북경으로 가서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그 후 귀국해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다.
그 뒤 북경으로 건너가서 북경을 근거지로 간도·연해주를 왕래하면서
중국혁명 원로 진기미(陳其美)와 함께 한중공동전선을 형성해, 항일투쟁을 전개할 것을 주창하였다.
1912년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桂太郎)가 중국동북지방[만주]을 시찰하는 기회를 이용해 암살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체포되어 거제도에 1년간 유형(流刑)되었다.
석방된 뒤 또다시 항일독립운동의 진원지인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망명하였다.
그 뒤 지린성 당국과 교섭해 흑룡강성(黑龍江省)오운현(烏雲縣)에 약 5, 000호가 거주할 수 있는 농지를 마련하고
항일독립운동의 기지와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려고 기도했으나
러시아혁명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일(徐一)·계화(桂和) 등과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상해로 건너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해 군무부차장에 임명되었다.
1919년 4월 10일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에 노령(露領) 대표의원으로 당선되고 군무부위원이 되었다.
또한, 1919년 4월 23일 국내에서 13도대표로 구성된 국민대회에서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가 조직되자
평정관(評政官)으로 피선되었다. 1919년 8월 7일 상해에서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서일·현천묵(玄天默)·김좌진(金佐鎭) 등과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고
12월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해 군사부장에 취임, 청산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청산리 전쟁 이후 작전상 밀산(密山)으로 이동하여, 전만군사단체(全滿軍事團體)를 통일,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해 외교부장이 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극동당국·동북군벌당국과 군사문제·재만한인문제를 교섭하였다.
그 뒤 대종교 총본사전리대판(總本司典理代辦)으로서 제2회 교의회에서 홍범규제(弘範規制)를 수정하고
박찬익(朴贊翊)과 함께 정교가대형호(正敎加大兄號)로 승진하였다.
1925년 대종교의 민족의식과 북로군정서의 정신을 계승해 신민부(新民府)를 조직, 외교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신민부가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자 이 학교의 고문으로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경주하였다.
1925년과 1926년 두 차례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926년 북경에서 북경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北京韓國唯一獨立黨促成會)를 조직하고,
1927년 상해에서 개최된 각지 촉성회연합회 북경대표로 참가하였다.
1931년 임시의정원 경기도위원으로 당선되었고, 1933년에 재선되었으며, 1934년에는 국무위원에 피선되었다.
1936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군무총장으로 봉직하였다.
1937년 한국광복전선(韓國光復戰線)을 결성할 때에는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의 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
1938년 군사학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군사학을 편수하였다.
1939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피선되었다.
그 해 11월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장으로 시안(西安)에 파견되어
중국정부와 협의해 한국광복군 창설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41년 대원수부(大元帥府)의 막료로 군무부장에 임명되어 다시 최고원수부의 판공처장(辦公處長)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12월 임시정부 요인과 같이 환국한 뒤 한국장교단장·대한독립촉성회위원장·성균관부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曺成煥 조성환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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車利錫차리석묘소
車利錫차리석,차이석(, 1881년 ~ 1945년 9월)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일명은 서입환(徐立煥)이고 號는 동암(東巖)이다. 평안북도 선천군 출신.
1881년 7월 27일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차시헌(車始軒)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으나 신학문에 뜻을 두어,
1900년에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04년 5월 정규과정 첫 졸업생이 되었다.
졸업 후에 1907년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안창호와 양기탁 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평양지회에서로 활동하였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3·1 운동 운동 이후 독립당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했으며, 1922년 시사책진회와 흥사단 원동위원부에 참여하였다.
193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했다.
김구 등과 함께, 1935년 한국국민당의 창당에 참가했다.
1935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서실장에 선출되었다.
1939년 10월 25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40년 9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비서부장에 선출되었고,
1944년 4월 다시 임시정부 국무위원겸 비서부장에 재선되었다.
1945년 8월 쓰촨성에서 광복 소식을 접하였으나 병원에 입원하였다.
1945년 9월 9일 환국 직전 사망하였다.
사망하기 직전 광복이 되었는데 왜 귀국하지 못하고 죽어야 하느냐며 병상에서 애통해했다 한다.
“차이석 선생은 해외 혁명운동자 가운데 특히 강력한 정신력을 소유하시기로 유명하시었다.
탁월한 사무처리의 기능이나 병 중에서도 최후의 일각까지 맡으신
사명을 완수하신 강한 책임감은 한국독립운동에 피가 되고 살이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1948년 사회장 당시 이시영, 김구 의 추모담 중에서—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1962년에 독립장이 서훈되었고, 1995년 9월의 이 달의 독립 운동가에 선정되었다.
늦도록 슬하에 자녀가 없던 그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중매로 30대의 과부 홍매영과 재혼하였다.
홍매영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딸이 있었으며,
이때 차리석은 60대였다.
車利錫차리석선생
첫째 줄 왼쪽부터 (박찬익, 조완구, 김구, 이시영, 차이석
둘째 줄 왼쪽부터 성주식, 무영, 무명, 무명, 무명, 김붕준
맨뒷 줄 왼쪽부터 조성환, 조소앙, 이청천, 이범석, 이름 미상
성남-문충공 백헌 이경석 묘(文忠公 白軒 李景奭), 전주이씨 (0) | 2016.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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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서봉산 쉰길바위 (0) | 2016.09.01 |
서울-삼의사의 묘.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안중근의사 가묘, 효창공원, (0) | 2016.08.21 |
서울-의열사와 창열문, 효창공원 백범김구,삼의사,이봉창,윤봉길,백정기/이동녕,조성환,차리석 (0) | 2016.08.21 |
서울-백범 김구, 백범기념관, 효창공원-사적 제330호 (0) | 2016.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