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기록하는 붓은 아무나 잡을 수 없다' -채세영
임진당 채세영(任眞堂 蔡世英)선생 묘소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 산12번지
주차를 의왕시 포일동 53번지 근처에 세우고
채세영 신도비(蔡世英 神道碑) 이항복(李恒福)찬
1682년(숙종 8년)에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에 건립된 채세영(蔡世英)의 신도비이다.
비의 찬자는 이항복(李恒福)이고 서자는 허목(許穆)이며 제액(題額)도 전서(篆書)로 썼다.
비문에 의하면 채세영(1490∼1568년)의 본관은 평강(平康),
字는 영지(英之), 號는 임진당(任眞堂)으로
아버지는 첨정 자연(子涓)이며, 어머니는 유효용(柳孝庸)의 딸이다.
1510년(중종 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1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19년 검열을 거쳐 춘추관기사관이 되었다.
이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밤 김근사(金謹思)가
그의 붓을 빼앗아 조광조(趙光祖) 등의 죄를 대역죄인으로 고치려 들자,
사필(史筆)은 아무나 가지는 것이 아니라고 다시 빼앗는 기개를 보여 세상에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 때문에 파직당하였다.
이 후 다시 세자시강원의 문학에 제수되고 계속 승진하여
공조판서·호조판서를 지내고 벼슬이 좌참찬에 이르렀다.
천문과 의약에 밝았고, 중국어에도 능하여 1548년 이문정시(吏文庭試)에 장원하기도 하였다.
그가 비록 처음에는 기묘사화로 청명(淸名)을 얻었으나
후일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 내전에 친하려 든다는 비난을 듣기도 하였다.
채세영 개인의 행적 및 가계, 성품 외에도
1519년(중종 14년)에 발생한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전개과정을 수록하고 있어
조선 중기의 정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비문이다.
신도비명
有明朝鮮國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 同知經筵知義禁府事世子 左賓客蔡公 神道碑銘 幷序
유명조선국자헌대부의정부좌참찬겸 동지경연지의금부사세자 좌빈객채공 신도비명 병서
推忠奮義平難忠勤貞亮竭誠效節恊策扈聖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
추충분의평난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
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鰲城府院君李恒福撰 中直大夫守尙衣院正許穆書篆額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세자사 오성부원군이항복찬 중직대부수상의원정허목서전액
곧은 소나무[貞松]가 산언덕에 나서 백초(白草)와 푸르름을 같이하다가,
모진 풍설(風雪)이 몰아쳐서 천지(天地)가 혹독하게 추워질수록 빛이 더욱 푸르러진 다음에야
그를 사모하여 우러러보는 이가‘소나무로다’라고 하는 것이다.
상고하건대, 우리 채 참찬 임진공(蔡參贊任眞公)은 기묘년의 처음을 당하여 사관(史官)으로 있었는데,
당시의 사류(士類)들은 한창 심신(心身)을 깨끗이 하고 나와서
스스로 자기 재능을 과시하여 진취하기를 도모했으나,
공은 교격(矯激)한 행동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자신의 표치(標置)를 높게 하지도 않아서 매우 삼가고 두려워하여 마치 무능한 것처럼 하였으되,
제배(儕輩)들 가운데 공만이 유독 그러하였다.
사화(士禍)가 일어남에 미쳐서는,
공이 변(變)을 듣고 대궐에 나아가 보니, 이미 문지기가 계엄(戒嚴)을 펴서 떠들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이 먼저 와서 자리에 앉아 있으므로,
공이 총총히 가서 일의 발단에 대하여 물으니, 정광필이 말하기를,
“나도 뒤늦게 와서 감히 알 수가 없다.”
고 하자, 다시 남곤(南袞)에게 옮겨 가서 물으니,
남곤은 말을 머뭇거리면서 마치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자 정광필이 돌아보고 말하기를,
“사씨(史氏)는 다만 자기가 본 것을 기록할 뿐이다.” 하였다.
이에 남곤이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과 함께
먼저 조정암(趙靜庵) 등을 대역(大逆)으로 몰아서 처자(妻子)들을 관노비(官奴婢)로 삼고 재산을 몰수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차등에 따라 논죄(論罪)하여 그 판옥(判獄)의 문서(文書)를 임금에게 올리자,
정광필이 이들을 극력 구해(救解)하였으니, 이에 관한 말은 정씨(鄭氏)의 가승(家乘)에 나타나 있다.
당시에 김근사(金謹思)가 가승지(假承旨)로서 죄안(罪案)을 고치려고 창졸간에 문득 공의 붓을 가져가자,
공이 급히 일어나서 붓을 빼앗아 돌아와서 말하기를,
“이것은 사관의 붓이니, 다른 사람이 쓸 바가 아니다.”하니, 들은 이들이 숙연해졌다.
공은 인하여 말하기를,
“신(臣)은 간관(諫官)이 아니니, 지위를 벗어나서 말하는 것은 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겠습니다만 이들이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지금 그러는 것입니까?
삼자(三刺)가 시행되지 못했으니, 원컨대 죄명(罪名)을 듣고 싶습니다.” 하였다.
이때 우상(右相) 안당(安瑭)은 밖에 있으면서 임금 앞에 들어오지도 못했으므로,
공이 안당을 불러서 의논하기를 청하니,
좌우에서 공의 행위를 보고는 모두 두려워서 목을 움츠리고 감히 바로 보지 못하였고,
안당 또한 공이 화를 면치 못할까 두려워하여 수시로 돌아보고 헛기침을 하면서 눈을 부릅뜨고 보았다.
그러자 정광필이 따라서 강력하게 정쟁(廷爭)을 벌이니,
상(上)이 이때문에 위엄을 거두고 약간 은대(恩貸)를 내리었다.
유용근(柳庸謹)은 이 사실을 듣고 공을 장하게 여겨 말하기를,
“채모(蔡某)가 어떤 태도를 지을지 몰랐는데, 능히 그렇게 하였단 말인가.” 하였고,
유감(柳堪), 민기문(閔起文) 또한 서로 말하기를,
“세상에 군자(君子)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는데, 오직 노채(老蔡) 한 사람이 있을 뿐이로다.” 고 하였다.
공은 끝내 이때문에 4년 동안 폐기되었다가,
뒤에 비록 기용은 되었으나 그래도 구차하게 남들과 영합하려 하지 않고
백료(百僚)의 밑에서 거의 십 수년 동안을 그럭저럭 지냈었다.
그러나 혹 공이 굽은 허리로 길을 가노라면, 공을 아는 이는 그래도 몰래 공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상(上)의 앞에서 붓을 빼앗은 분이다.”
하고, 시인(時人)들이 서로 퇴피(退避)하여 공을 눈여겨 바라보았다.
당금(黨禁)이 풀림에 미쳐서는, 한때의 정사(正士)들이 이미 남김없이 제거된 뒤였는데,
오직 공만이 우뚝하게 홀로 빼어나서 사림(士林)들에게 끝까지 지조를 지키는 기대의 대상이 되어,
노쇠한 얼굴과 누렇게 된 머리털로
조관(朝官)들 사이에 빛을 발휘하면서 품계는 자헌(資憲)이 되고 관직은 참찬에 이르렀다.
79세의 나이로 집에서 작고하였으니, 이 해가 바로 무진년 1월 2일이었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이 조시(朝市)를 정지하여 애도하고,
부의(賻儀)와 조제(弔祭)를 후히 하였으니, 죽으나 사나 영예(榮譽)로움이 전하여 나라의 영광이 되었다.
그 후 공의 손자 증광(增光)은 나의 중씨(仲氏)와 좋게 지내는 친구 사이로서
벼슬은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였는데, 그가 하루는 가장(家狀)을 나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것으로 묘(墓)에 명(銘)해 주기를 바랍니다.” 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그 가장을 받아서 읽어 보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의 사람됨에 있어서는, 자품이 영명하고 의연하며,
흉금이 고아하고 소박하여, 응중(凝重)하고 신묵(愼黙)하며, 염정(恬靜)하고 독실(篤實)하였다.
그리고 평소에는 엄숙하고 정중하여 사람들이 감히 범할 수가 없으나,
서로 대하여 담소를 나눌 적에는 온화한 기색이 얼굴에 가득하였다.
이량(李樑)이 요로(要路)에 앉아서 공과 서로 추중(推重)하도록 하려고 할 적에
공은 더욱 스스로 소외하여 의리상 그의 문에 가지 않았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오묘한 뜻을 깊이 연구하여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힘썼고,
일찍 상서(庠序)에 유학할 적에는 글을 짓기만 하면 매양 으뜸을 차지했으므로,
당시에 가부(賈傅)의 문장(文章)이라 일컬어졌다.
그리고 자람에 미쳐서는 경사(經史)를 널리 보면서 밤낮으로 피곤함도 잊었고,
천문(天文), 의약(醫藥)으로부터 화어(華語)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맛있는 음식을 반드시 준비하고 약과 음식을 반드시 친히 살피었으며,
뜻을 받드는 것을 힘써서 있고 없는 것을 따지지 않았다.
그래서 엄한 아버지도 자식을 공경하여 관(冠)을 쓰지 않고는 보지 않았다.
부모의 상(喪)을 당해서는 효성을 다해 복상(服喪)하였는데,
양기(兩期)를 여묘살이하는 동안에 사람들이 공의 웃는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임금을 섬기는 데 있어서는, 일을 만나면 힘을 다하여 진자리 마른자리를 가리지 않았고,
경악(經幄)에서 기밀한 일에 참여할 때에는 말을 내기만 하면 임금을 감동시켰으며,
늘그막에 이르러서도 매양 국기(國忌)를 만나면 소식(素食)을 하였다.
집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산업(産業)을 일삼지 않았고, 성품이 치우치게 좋아하는 것이 없었으며,
부귀(富貴)의 화려함을 마치 뜬구름처럼 보았다.
세상의 권문 세가(權門勢家)들이 흔히 양민(良民)을 강압하여 노비로 삼는 것을 보고는
수시로 자제들을 보내서 향장(鄕莊)을 점검하게 하여 세상의 병폐를 따르지 말도록 경계하였다.
그리고 두 형과 두 손위의 누이들은 마치 어버이처럼 섬기었고,
여러 조카들을 어루만져 사랑하되 은혜로운 정이 마치 자기 자식에게와 같았다.”
나는 이 가장을 읽고 나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아니다. 이것이 어찌 공에게 경중(輕重)이 될 수 있겠는가.
또 나는 들었노니, 뼈마디 하나가 수레에 가득한 데에서 방풍씨(防風氏)임을 충분히 알 수 있겠거니와,
선비의 백행(百行) 가운데서는 한 가지 선(善)만을 취하여 시호(諡號)를 정하는 것은 옛날의 도리였다.
그 큰 것이 우뚝하였고 보면 그 자잘한 것은 대략 알 수 있는 것이니,
지금 나에게‘기묘당인채태사지묘(己卯黨人蔡太史之墓)’라고만 쓰게 하면 충분할 것이다.
어찌 글을 지을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세계(世系), 이력(履歷) 및 종파(宗派)의 나뉨 같은 것들은 기재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마침내 그것을 서술하여 주는 바이다. 그 세계의 서술은 다음과 같다.
채씨(蔡氏)는 강원도(江原道) 평강현(平康縣)에서 나왔는데, 그 선대는 신라의 옹주(翁主)에게 장가들었고,
그 후에 휘 자화(子華)는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졸관(卒官)하였다.
그로부터 오세(五世)를 지나 효순(孝順)에 이르러서는 면천 군수(沔川郡守)로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고,
군수가 휘 담(潭)을 낳았는데 담은 사헌부 감찰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감찰은 휘 자견(子涓)을 낳았는데 자견은 돈녕부 첨정(敦寧府僉正)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니,
모두 공의 귀(貴)로 말미암은 것이다.
판서공이 함안 군수(咸安郡守) 유효용(柳孝庸)의 딸에게 장가들어 홍치(弘治) 경술년에 공을 낳았는데,
공의 휘는 세영(世英)이고 字는 영지(英之)이며 임진(任眞)은 그의 號이다.
그 이력의 서술은 다음과 같다. 정덕(正德) 경오년에 진사가 되었고,
정축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천거를 받아 사국(史局)에 들어갔다.
기묘년에 사화(士禍)를 만났다가, 가정(嘉靖) 임오년에 복관(復官)되었고,
계사년에 비로소 시강원(侍講院)에 들어가 문학(文學), 필선(弼善), 보덕(輔德)을 역임하였다.
그 후 간원(諫院)에서는 세 번 사간(司諫)이 되었고, 헌부(憲府)에서는 두 번 집의(執義)가 되었으며,
옥당(玉堂)에서는 부응교(副應敎)ㆍ응교(應敎)를 세 번, 전한(典翰)을 두 번 역임하고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러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를 겸하였다.
정유년에는 특별히 당상(堂上)에 승진되었다가, 무술년에 어떤 일로 파면되었다.
무신년에는 이문 정시(吏文庭試)에 장원하여 가선(嘉善)에 올랐고, 무오년에는 특별히 자헌(資憲)에 승진되었다.
통정(通政)으로 있을 적에는 호조ㆍ예조ㆍ병조ㆍ공조의 참의ㆍ참지와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하였고,
가선으로 있을 적에는 이조ㆍ호조ㆍ형조의 참판,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외직으로 경기(京畿)ㆍ청홍도(靑洪道) 등의 관찰사와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역임했으며,
자헌으로 있을 적에는 한성부판윤 겸 세자좌우빈객, 공조ㆍ호조의 판서, 의정부좌우참찬 겸 지경연사를 역임하였다.
그런데 항상 병으로 사퇴했기 때문에 서추(西樞)에는 전후로 모두 아홉 번이나 임명되었다.
광주(廣州)의 의곡(義谷)에 장사지냈고, 부인(夫人) 문화 유씨(文化柳氏)를 부장(祔葬)하였다.
그 종파의 서술은 다음과 같다.
아들이 둘인데, 큰아들 계흥(繼興)은 통선랑(通善郞)이고, 다음 윤흥(胤興)은 승사랑(承仕郞)이다.
딸 한 사람은 통사랑(通仕郞) 신효변(申孝邊)에게 시집갔다.
계흥은 현령 이원(李瑗)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명(銘)을 청한 사람이다.
딸은 남원 부사(南原府使) 손여성(孫汝誠)에게 시집갔다.
윤흥은 남숭원(南崇元)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는데
그는 사산 감역관(四山監役官) 김익휘(金益輝)에게 시집갔다.
효변은 1녀를 낳았는데 그는 별좌(別坐) 정호인(丁好仁)에게 시집갔다.
사어(司禦)는 1남 이첨(爾瞻)을 두었는데 일찍 죽었고, 딸은 사인(士人) 정신언(鄭愼言)에게 시집갔다.
여성은 1남 길(佶)을 두었다.
익휘는 1남 현(俔)을 낳았는데 유업(儒業)에 종사하고, 딸은 승문원 부정자 이기준(李耆俊)에게 시집갔다.
호인은 4남을 낳았는데, 언선(彦璿)은 진사이고 나머지는 언기(彦琦), 언호(彦瑚), 언우(彦瑀)이다.
딸은 구길(具佶)에게 시집갔다. 이첨은 좌랑(佐郞) 신종원(辛宗遠)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준길(俊吉)을 낳았는데 유업에 종사하고, 딸은 생원 조빈(趙贇)에게 시집갔다.
길은 2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현은 4남을 낳았는데 영승(永承), 영찬(永纘), 영창(永昌), 영견(永肩)이고,
큰딸은 신식(申恜)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이수현(李守賢)에게 시집갔다.
기준은 2남을 낳았는데 중기(重基), 후기(厚基)가 모두 진사가 되었다.
언선은 2남 1녀를 낳았고, 언기는 1남 1녀를 낳았으며, 언호는 1녀를 낳았고, 구길은 1남 1녀를 낳았으며,
준길은 1녀를 낳았고, 빈은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중기는 2남을 낳았는데 행건(行健), 행원(行遠)이 모두 유업에 종사하고,
큰딸은 사인 정용(鄭涌)에게 시집갔고 나머지 한 사람은 어리다.
후기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큰아들은 행안(行安)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식은 2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지난 기묘년에 / 在己卯歲
채공이 나와서 덕은 우뚝했으나 / 有蔡公出德崛岉
광채를 감추고 깎아 버리어 / 含光剷彩
겉은 마치 지졸한 듯했지만 / 外若遲拙
중심은 좌절하여 부진하지 않아서 / 中則不躓而不振
발굴 전의 명검 기운 성대한 것 같았네 / 如劍未掘氣鬱嵂
만년에야 날개를 힘차게 떨쳐 / 桑楡奮翼
넓은 길 나가서 순탄하게 활보했으나 / 進塗以豁平步闊
오직 지조를 돌보다 굳게 지켜 / 惟介于石
능히 정길을 보전하고 숭질에 올랐도다 / 克保貞吉躋崇秩
내가 명한 말은 거짓이 아니니 / 我銘非誣
과분한 칭찬 아님을 귀신에 질정할 만하네 / 幽鬼可質美不溢
오직 후세에 음덕을 끼치었으니 / 維後之貽
하늘의 보우를 입어 남은 복을 기필하리라 / 以嘉天隲餘慶必
蔡世英神道碑채세영신도비
蔡世英左參賛 神道碑 체세영좌참찬 신도비
有明朝鮮國資憲大夫議政府左參賛兼同知 經筵知義禁府事 世子右賓客蔡公神道碑銘并序
推忠奮義平難忠勤貞亮竭誠効節恊策扈 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
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 鰲城府院君 李恒福撰
中直大夫守尙衣院正許穆書并篆
채세영(蔡世英, 1490년 ~ 1568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평강(平康). 字는 영지(英之). 號는 임진당(任眞堂)이다.
1510년(중종 5) 진사시에 합격하고, 1517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19년 춘추관기사관가 되던 해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가승지 김근사(金謹思)가 조광조(趙光祖) 등의 죄를 대역죄인으로 고쳐 하달하려고 그의 붓을 빼앗자
채세영이 급히 일어나 그 붓을 도로 빼앗으며 말하기를,
“이 붓은 사관의 붓이니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없다.”고 하니,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숙연해졌다.
이 일로 인해 4년간 소외당하였고
뒤에 비록 등용되었어도 와합(瓦合)하려고 하지 않아 백관의 밑에서 거의 십수년간 한가로히 지냈다.
1533년 세자시강원 문학이 되었고,
사헌부 집의를 역임한 뒤 홍문관 직제학을 거쳐
1537년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539년 예조참의와 형조참의를 지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서 천추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46년 호조참의·병조참의를 지내고, 1547년 우승지에 올랐다.
1550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
1557년 호조참판, 1558년 한성부판윤,
1560년 의정부 우참찬을 거쳐 공조판서(工曹判書), 호조판서(戶曹判書),
의정부 좌우참찬(議政府左右參贊) 겸 지경연(兼知經筵)을 지냈다.
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 知經筵義禁府事 世子左賓客 贈諡 蔡公之墓 貞夫人文化柳氏之墓
자헌대부의정부좌참찬겸 지경연의금부사 세자좌빈객 증시 채공지묘 정부인문화유씨지묘
//임진당 채세영(任眞堂 蔡世英) 가계//
증조부 : 면천군수 채효순(蔡孝順) - 문하시랑평장사 채자화(蔡子華)의 5세손
조부 : 사헌부감찰 채담(蔡潭)
아버지 : 돈녕부첨정 채자연(蔡子涓)
외조부 : 류효용(柳孝庸)
어머니 : 문화 류씨(文化柳氏) 유효용(柳孝庸)의 딸
형님 채세호(蔡世豪)
형님 채세걸(蔡世傑)
임진당 채세영(任眞堂 蔡世英)
배위 문화 류씨(文化柳氏), 류응대(柳應臺)의 따님
후배위 전주 이씨(全州李氏), 이형순(李亨順)의 따님
장자 : 통선랑 채계흥(蔡繼興)
차자 : 승사랑 채윤흥(蔡胤興)
딸 : 통사랑 신효변(申孝邊)에게 출가
양주-명빈김씨,성종, 무산군 효정공 이종(茂山郡 孝貞公 李悰) (0) | 2016.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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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채세영 후손 (0) | 2016.11.16 |
이천-국립 이천호국원(國立 利川護國園), 이천 호국원 (0) | 2016.11.10 |
예산-장흥고직장 기헌 김봉종(岐軒 金奉宗), 사헌부감찰 김인상(金麟祥), 강릉김씨 (0) | 2016.11.09 |
예산-삽교석조보살 입상 (0) | 2016.1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