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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심건,심희수,일타홍,심창,심최량,심주관

청송심씨

by 碧巖 2016. 11. 18.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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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貞公 一松 沈喜壽 先生 墓 (1548 ~ 1622)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37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406-1



文貞公 一松 沈喜壽 父親  贈 領議政 沈鍵墓所

문정공 일송 심희수 부친  증 영의정 심건묘소




靑松沈公諱鍵 贈貞敬夫人慶州李氏 之墓

청송심공휘건 증정경부인경주이씨 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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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貞公 一松 沈喜壽墓所

문정공 일송 심희수묘소



文貞公 一松 沈喜壽 先生 (1548 ~ 1622)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37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406-1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백구(伯懼), 호는 일송(一松) 혹은 수뢰루인(水雷累人). 정자(正字) ()의 아들이며,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종제이고, 이연경(李延慶)의 외손자이다.

 

노수신(盧守愼)의 문인으로, 이황(李滉)이 죽자 성균관을 대표하여 장례에 참여하였고,

157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도승지·대사헌·형조판서·호조판서·예문관제학·예조판서·이조판서·대제학·좌찬성·우찬성·우의정·좌의정에 오르고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1613(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 부원군 김제남(金悌男)이 죽고,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옥사의 주모자로 몰아 해치려 하자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 등과 강력하게 그 부당성을 논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15년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있을 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허균(許筠)과 중국 야사(野史)에 나타난 종계문제(宗系問題)로 다투다가 궐외로 축출되고

이듬해 폐모론이 다시 일자 둔지산(屯之山)에 은거하여 주역을 읽고 시를 읊으며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1620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

저서로는 일송집이 있으며, 상주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 諡號는 문정(文貞).

 

묘는 원흥동 구석말 마을 청송심씨묘역에 정경부인 광주 오씨(貞敬夫人 光州 吳氏)의 묘와 쌍분으로 되어 있다.

묘소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혼유석 및 최근 새로 세운 장명등과 망주석, 문인석 각 1쌍이 있다.

봉분 앞에는 숙종 1(1675)에 세운 묘비가 있는데 앞면에

 의정부좌의정 일송선생지묘 정경부인 광주노씨 부좌

(議政府左議政 一松先生之墓 貞敬夫人 光州氏 祔左)’라 표기되어 있다.

 


              議政府左議政 一松先生沈公之墓  貞敬夫人光州盧氏祔左

              의정부좌의정 일송선생심공지묘  정경부인광주노씨부좌






一朶紅 錦山李氏之壇

일타홍 금산이씨지단

一朶紅일타홍

봉분의 좌측에는 단이 하나 만들어져 있는데

1983년 세워진 오석의 비 앞면에는

 一朶紅 錦山李氏之壇’‘일타홍 금산이씨지단이라 표기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유시가 새겨져 있다.

봉분의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 유적에는 심희수와 일타홍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한다.


 

조선 선조 때 충청도 금산(錦山)에서 태어난 일타홍이 어떤 연유였던지 한 떨기 꽃이라는 기명(妓名)으로

기적(妓籍)에 오르고, 10대 후반부터 한양으로 옮겨가 살게 되었다.

심희수는 영의정을 지낸 심연원(沈連源)의 동생 심봉원(沈逢源)의 손자로

누가 봐도 나무랄 데 없는 명문대가의 후손이었지만,

불행하게도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엄한 어른이 없이 자라서 벗들과 어울려 노는 방탕한 소년이 되었다.

15세 미소년이던 어느날 심희수는 벗들과 함께 권세 있는 재상 집안에 잔치가 열렸는데,

심희수는 그 집에서 음식과 술을 마구 먹고 마셔댔다. 사람들이 끌어내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때 그 잔치에 초청되어 춤을 추던 기생 일타홍이 그에게 가만히 다가와 설득한 후,

그와 함께 그의 어머니를 찾아가 소실로 받아 달라고 부탁했다.

심희수의 어머니는 집안이 가난하여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 타일렀지만,

일타홍은 심희수의 기상이 범상치 않으니 자기가 한번 그를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보겠다고 말했다.

허락을 받은 일타홍은 그날부터 기생을 그만두고 심희수의 서당 공부를 도왔다.

심희수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이모부인 노수신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에 정진하였다.

그리고 노수신 동생의 딸과 정식 결혼을 했다. 일타홍이 주선한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소실로 만족했다.

심희수가 결혼 후에도 정실보다 일타홍을 더 사랑하자,

일타홍은 남편에게 5일을 주기로 4일은 정실 집에서 자고 하루만 자기에게 오도록 규칙을 정했다. 

그러나 심희수는 번번이 이 규칙을 어겼다.

이에 일타홍은 공부에 방해가 될까 과거에 급제한 뒤에 나를 찾으시라는 편지를 써 놓고 집을 나오기도 하였다.

그 덕에 심희수는 열심히 공부하여 1570(선조 3) 22세에 진사시에, 이어 25세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심희수는 1589(선조 22) 정여립(鄭汝立) 옥사에

재판관 정철(鄭澈)이 무고한 사람들에게 혹독한 형벌을 내리자 언관으로서 강력히 항의하다 삼척 부사로 강등되었고,

다시 35세 땐 허균의 형 허봉을 두둔하다 금산군수로 좌천되기도 했다.

심희수가 이조낭관(郎官)으로 있을 때 일타홍이 자기 부모가 있는 금산으로 내려가자고 간청했다는 설도 있다.

금산에서 지내는 중 일타홍은 병을 얻어 앓다, 내아(內衙)에서 심희수의 손을 잡은 채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언은 인생의 생사 장단은 한 가지다. 군자에게 은혜와 사랑을 받아 한이 없다.

낭군의 옆에 뼈가 묻혀 지하에서 다시 모시는 게 소원이다였다.

심희수는 슬픔을 달래며 일타홍을 자신의 선산인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원흥리에 묻어 주었다.

그 후 심희수는 임진왜란 때 도승지로서 의주로 파천하는 선조를 호종(扈從)했고,

한양으로 돌아와 대제학에 올랐다가 이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그는 선조와 광해군 두 임금을 섬기며 곧은 충언을 올렸다. 그리고 1622(광해군 14)75세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일타홍은 나이는 어리지만 당대의 기생으로는 이미 전국적으로 이름이 나서

금산(錦山)에서 서울의 재상집 연회에까지 초대될 정도였다.

그녀는 미모로도 어우야담 등 여러 기록에 남아 있지만,

이미 시()와 가무로도 한 경지에 올라 있었나 보다. 그녀의 시 한 수를 보자.


長霖 (장림 : 장마) - 취연(翠蓮, 一朶紅)

十日長霖若未晴 십일장림약미청 열흘 긴 장마 개일 기색 없는데

鄕愁蠟蠟夢魂驚 향수납납몽혼경 고향 그리워 꿈결에 달려갔다 놀라 깨이네.

中山在眼如千里 중산재안여천리 옛 동네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길은 먼 천리

堞然危欄默數程 첩연위난묵수정 난간에 팔 괴고 가만히 고향 가는길 헤아려보네.


一朶紅 遺詩

靜靜新月最分明 정정신월최분명 맑고 고요한 초승달 또렷하기도 한데

一片金光萬古淸 일편금광만고청 한 줄기 달빛은 천년만년 푸르렀겠지.

無限世界今夜望 무한세계금야망 넓디넓은 세상에 오늘 밤 달을 보며

百年憂樂幾人情 백년우락기인정 백년의 즐거움과 슬픔 느끼는 이 몇이나 될까.

 

심희수는 일타홍의 시신은 손수 염하여 첩을 귀장하는 예는 없으나 다른 연고를 대어 말미를 얻고

고양의 선영 안에 장사 지냈다. (일설에는 군수직을 사직하고 장례를 치뤘다고 한다.)

 심희수가 일타홍의 시신을 상여수레(輀車)에 싣고 금강나루에 다다랐을 때 마침 봄비가 내렸다고 한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려 일타홍의 관을 덮은 붉은 명정이 젖는 모습을 보면서 심희수는 시 한 수를 읊는다.

 

一朶紅輓章詩일타홍만장시

一朶芙蓉載柳車 일타부용재유거 한 떨기 연꽃은 버들상여에 실려 있는데

香魂何處去躊躇 향혼하처거주저 향기로운 영혼은 어딜 가려 머뭇거리나.

錦江春雨丹旌濕 금강춘우단정습 비단강 봄비에 붉은 명정(銘旌) 젖어드니

應是佳人別淚餘 응시가인별루여 아마도 고운 우리 님 이별 눈물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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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貞公一松沈喜壽先生 子 溫陽郡守 沈昶墓所 문정공일송심희수선생 자 온양군수 심창묘소



曾承政院左承旨 行溫陽郡守沈公之墓  贈淑夫人豐山金氏祔左  贈淑夫人南陽洪氏祔右

증승정원좌승지 행온양군수심공지묘  증숙부인풍산김씨부좌  증숙부인남양홍씨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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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貞公 一松沈喜壽先生  玄孫 沈最良墓所 문정공 일송심희수선생  현손 심최량묘소


贈嘉善大夫吏曹參判  行通訓大夫司憲府執義知製敎沈公之墓  貞夫人安東權氏祔左

증가선대부이조참판  행통훈대부사헌부집의지제교심공지묘  정부인안동권씨부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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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貞公一松沈喜壽先生 5代孫 沈周觀 墓所 문정공일송심희수선생 5대손 심주관묘소

兵曹正郎沈公周觀  配淑人安東權氏 之墓

병조정랑심공주관  배숙인안동권씨 지묘



 

文貞公 一松 沈喜壽 가계도

 6代祖 沈溫심온 安孝公

 5代祖 沈澮심회 恭肅公

 4代祖 沈湲심원

曾祖父 沈順門심순문 증 영의정

  祖父  沈逢源심봉원 贈 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증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

     父 沈鍵 심건, 경주이씨

  ◆◆ 沈喜壽 文貞公 一松 심희수 문정공 일송 , 광주노씨

     弟 沈昌壽 贈 吏曹參判 심창수 증 이조참판

     子 沈昶 溫陽郡守 심창 온양군수, 풍산김씨, 남양홍씨

     孫 沈儒訓 獨醒齋 贈戶曹參判 심유훈 독성재 증 호조참판

     孫 沈儒行 심유행, 안동권씨

  曾孫 沈梓심재, 광주이씨

  玄孫 沈最良심최량, 안동권씨

5代孫 沈周觀심주관, 안동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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