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原崔氏史蹟址
수원최씨사적지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분천리 165-1
崔屢伯孝子碑閣
최루백효자비각
화성시 향토유적 제2호
효숙공 모헌 최루백(孝肅公 慕軒 崔婁伯, 1110년 ~ 1205년) 고려의 문신.
號는 모헌(慕軒), 諡號 孝肅公(효숙공)
본관은 수원(水原)
고려(高麗) 인종조때 조야에 퍼져있는 효행 사실을 조정에서 듣고 문과(文科)에 등용되어
1146년 여름에 우사간(右司諫)으로 옮겼다가 그해 12월에 좌사간(左司諫)으로 다시 전직되었다.
의종 원년 1147년(정묘년) 봄에 시어사로 전직되고 그해 겨울에는 예부원을 거쳐서
다음해 봄에 예부중랑(禮部中郞) 겸 청주부사(淸州府使)로 승차했다.
이렇게 여러번 관직을 옮기며 승진을 거듭하여 정의대부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
중서문하성(中徐門下省)기거인 국자감사업(國子監司業)에 이르게 되었다.
최루백의 성품은 인자하고 공손하며 정직하였다.
평장사(平章事) 최자영(崔滋瑛)과 함께 시국에 관한 정책에 득실을 협의하고
시류에 어긋나는 옳지않은 논리를 주장하는 자들을 배척할 것을 여러번 간하였으나,
의종이 듣지 않자 관직에서 물러나 향려에서 은둔하다가 1205년(을축년) 12월 1일 졸 하였다.
효자(孝子) 최루백(崔婁伯)
최루백은 고려시대 효자로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조선 세종 14년(1432) 왕의 명을 받아 충신. 효자. 열녀를 뽑아 그 덕행을 찬양하는
“삼강행실도” 란 책을 편찬. 발간할 때,
그의 행적이 수록되었다는 사실로서도 그의 효행에 대하여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본관은 수원으로 호장을 지낸 수원 최씨 시조 최상저(崔尙翥)의 아들이다.
그는 늦게서야 과거를 보아 문과에 급제하였고 고려 의종 때 기거사인(起居舍人)에 승진되었다.
그 후 정언(正言). 좌우사간(左右司諫). 예부랑중(禮部郞中)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동왕 7년(1153)에는 금나라에 들어가 용흥절(龍興節)을 축하하고 돌아왔다.
또 의종 9년(1155)에는 평장사 최자영. 지문하성사 양원중 등과 함께 국정에 관한 왕의 자문에 응하기도 했다. 의종 12년(1158)에는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서 생원시(生員試)를 맡아보기도 했으며
뒤에는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고, 사후에는 왕으로부터 효숙공(孝肅公)이란 칭호도 받았다.
그의 나이 겨우 15세 때의 일이다.
그의 아버지 최상저(崔尙翥)는 향리(鄕吏)의 호장(戶長)으로 틈 있을 때마다 사냥을 다녔다.
그는 본래 성품이 어질며 재주가 있어 누구보다도 활쏘기를 좋아했을 뿐 아니라
근처 산에 돌아 다니면서 활솜씨를 발휘하여 짐승을 자주 잡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일기도 화창하여 활을 쏘아 짐승을 노리기엔 아주 좋은 날씨였다.
최상저는 평시와 같이 활을 메고 산에 올라갔다.
마을어귀를 벋어나서 산으로 접어들어 이리저리 올라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이때 활을 쏠 준비도 안하고 태연하게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비호가티 날아들어 엄습을 해 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엉겹결에 몸을 피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으며 급기야는 호환(虎患)을 당하고 말았다.
이때 최루백은 집안에서 이러한 흉사(凶事)가 있었던 것도 알지 못한 채 글방에서 돌아와 보니
뜻밖에도 아버지가 호환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앞이 캄캄해 지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청천병력이었다.
그러나 최루백은 정신을 가다듬고서는 산에 가서 아버지를 해친 호랑이에게 원수를 갚겠노라 했다.
그의 어머니나 동네사람들은 도저히 안될 말이라고 말했으나 15세의 최루백은 말하기를
“아버지가 범에게 해를 당했는데 자식된 도리로 서 그 호랑이에게 어찌 원수를 갚지 않으리오 ”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최루백은 도끼를 들고 단신으로 호랑이의 간곳을 추적하여 산으로 올라갔다.
그는 이곳 저곳 정신없이 해매다가 호랑이를 발견했다.
그러나 호랑이는 이미 자기 아버지를 형체도 없이 다 먹고 배가 불러 누워있는 것이었다.
최루백은 기가 막혀 호랑이 앞에 다가서면서 꾸짖었다.
“하늘과 같이 받들고 있는 나의 아버지를 네가 무참하게 해쳤으니 나는 너를 마땅히 잡아 먹어야겠다.”
하고 호령을 하니 호랑이는 그 자리에서 이내 꼬리를 흔들고 사죄라도 하는 듯이 엎드리는 것이었다.
그 순간 최루백은 천붕지통(天崩之痛)의 분노가 하늘까지 치솟았다.
그래서 들고간 도끼를 높이 들어 호랑이의 머리를 힘껏 내려 찍으니, 호랑이는 단번에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그리고는 호랑이의 배를 갈라서 자기 아버지의 유골과 살을 꺼내어 정결한 그릇에 담고
홍법산 서쪽에 안장하여 드렸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 산소 옆에 처막을 짓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삼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초루백이 시묘살이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잠시 졸음이 와서 잠이 들었는데 그 아버지 혼령이 나타나더니 시를 읊어 말하기를
"가시덤풀 숲을 헤치고 효자의 여막에 이르니 정이 많아 느끼는 눈물이 다함이 없구나.
흙을 져서 날마다 무덤에 보태니 마음을 알 자는 밝은 달과 맑은 바람 뿐이다.
살아서 잘 봉양하고 죽어서 지키니 그 누가 효에 처음과 마침이 없다 하랴." 하였다.
高䴡孝子翰林院學士崔屢伯閭
고려효자한림원학사최루백려
최루백은 삼년 시묘살이에 거상을 마치고 항아리에 묻었던 호랑이 고기를 꺼내어 모두 먹어 버렸다고 한다.
후에 세종 14년(1432)에 세종대왕은 최루백의 효행을 기리는 글을 내렸으며,
또한 조선조 숙종 때는 선생의 효자비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효자비는 원래는 봉담읍 수기리 ‘효자문골’에 위치했었으나 현재는 분천리에 세워져 있다.
비석 앞면에는 “고려효자한림학사최루백여(高麗孝子翰林學士崔婁伯閭)”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탁행기부시이도(卓行記附二道)“라 하여 그 내용이 새겨져 있다.
바로 뒤편에는 "고려양광도수주부호장상저유허(高麗楊廣道水州府戶長尙翥遺虛)"로 된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그러나 너무나 유명했던 최루백과 그의 아버지의 묘소는 알길이 없다고 한다.
高麗楊廣道水州府戶長崔公尙翥遺虛
고려양광도수주부호장최공상저유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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