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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남명 문집목판, 산천재 남명매(山天齎 南冥梅)

구름에 달

by 碧巖 2017. 11. 1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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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재山天齎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남명로 310-8

 

산천재山天齎

남명 선생 611561(명종 16) 건립.

정면 3, 특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이곳에서 생애의 마지막을 보내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200년 이상 복구되지 못하다가 1817년 중건.

부속건물로 선생의 문집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판각이 있다.

또한 산천재 마루 위 정면과 좌우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산천재 남명매 山天齎 南冥梅

지리산 천왕봉 아래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있는 산천재의 뜰에는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선생이 61세이던 명종 16(1561)에 손수 심은 매화나무가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명종 16(1561) 건립.

순조 18(1818) 개축.. 규모는 앞면 2, 옆면 2칸이다.

 

남명 선생은 영남의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룰 만큼 호남 학파의 수장이다.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졸후,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에 이어 영의정에 추서되었다.

선생은 1501(연산7)에 경상도 삼가현에서 태어나 벼슬길에 나아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주하였다가

그 후 의령, 김해, 삼가 등지에서 거주하였다.

선생은 61세가 되던 해에 산청의 덕산으로 이주해 그곳에 서실을 짓고 산천재라 이름하여,

이 당호의 산천(山天)’ 이란 말은주역대축괘(大畜卦)

 강건하고 독실하게 수양해 안으로 덕을 쌓아 밖으로 빛을 드러내서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

말에서 뜻을 취한 것으로 강건한 기상과 독실한 자세로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깊숙이 묻혀 심성을 도야하고 올바른 수양을 하는 것이 학자의 길임을 천명한 것이다.

선생은 산천재를 짓고는 뜰에 매화를 손수 심고 해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이 매화나무에 애정을 쏟았다고 한다.

 

 

 

조식 남명문집 목판 (曺植 南冥文集 木板)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남명로 310-8

도지정문화재 164

조선시대 유학자인 남명 조식(曺植,15011572) 선생의 시문집을 널리 간행하기 위해 만든 책판이다.

 

조식은 평생 학문에 힘썼으나 과거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1567년 임금이 불러도 나아가지 않고,

다만 왕을 만나 난을 다스리는 방도와 학문을 마칠 것임을 밝히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일상생활에서도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의()가 아닌 것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같은 시대에 살았던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학풍을 만든 인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으로 참여하는 등 국가에 위기가 닥치면 몸소 앞장서서 싸움에 참여하였다.

그가 죽은 후 차례로 대사헌,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여러 서원에 그의 위패가 모셔졌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이것은 남명 조식 선생의 사상과 생애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이다.

전문설명

조선시대의 유학자 남명 조식(曺植)(15011572 자 건중, 호 남명)선생의 시문집이다.

이 문집은 선조 37(1604)에 남명선생의 제자인

정인홍(鄭仁弘)(15321623)에 의해 해인사에서 첫번째로 간행되었으나,

소실되어 광해군 14(1622)에 관찰사 유영순의 도움으로 중간되었다.

그 후 "산해 사오 연원록" "년보, 언행록"등이 별집으로 추각(追刻)되었으나

영조 40(1764)에 박영신이 별집의 내용을 다시 교정하고 보각(補刻)하였다.

여러번의 간행으로 생긴 오류를 고치고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더 붙여서 1894년에 새로이 편집 간행하였고,

곧이어 1897년에 선생의 연보를 깁고 더하여 "남명선생편년"을 간행하였다.

산천재내에 164매가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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