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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송응개宋應漑, 대사간大司諫

구름에 달

by 碧巖 2018. 3. 6.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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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응개 宋應漑

대전시 동구 주산동 산 25-6

1536(중종 31)1588(선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는 공부(公溥).

안동부사 송여해(宋汝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 한성부서윤 송세충(宋世忠)

아버지 우참찬 송기수(宋麒壽),  어머니 平康蔡氏 대사헌 채침(蔡忱)의 딸.



1565(명종 20) 홍문관의 정자(正字저작(著作)을 거쳐서

홍문관의 박사·부수찬(副修撰),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나

예조정랑으로 명종실록(明宗實錄)찬수에  참여하였다.

1570(선조 3)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1573년초 함경도에 재상어사(災傷御史)로 파견되었다.

이 때 덕원부사 안상(安瑺) 등이 무죄인데  파직시켰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잠시 파직당하고,

 6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서 시강관(侍講官), 홍문관의 부응교(副應敎부교리,

사간원의 사간·집의(執義), 홍문관응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579년 승지로서 소위 이수(李銖)의 옥사에서

이를 석방하라는 왕의 명령을 철회할 것을 청하다가 다시 파직당하였다.

1583년(선조16년) 대사간이 된 뒤, ·서 분당(分黨) 이후에는 동인의 중진으로서 활약하다가

헌납 유영경(柳永慶), 정언 정숙남(鄭淑男), 도승지 박근원(朴謹元),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허봉(許篈)과 함께

이이(李珥)를 탄핵하다가 장흥부사로 좌천되고, 다시 회령에 유배되었다.

강계·갑산에 귀양간 박근원·허봉과 아울러 세칭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하였다.

이 때 조헌(趙憲)을 비롯, 전라도·해주 등지의 유생들로부터 맹렬한 배척을 받았으나.

1585년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의 상소로 풀려났다.




            有明朝鮮通政大夫司諫院大司諫宋公諱應漑之墓

            유명조선통정대부사간원대사간송공휘응개지묘



                           有明朝鮮大司諫宋公墓碑文

                           유명조선대사간송공묘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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