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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익원공김사형, 낙포 김사형 묘, (翼元公 金士衡),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강리도

구름에 달

by 碧巖 2018. 5. 14.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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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원공 김사형(翼元公 洛圃 金士衡)

                           경기도지방문화재 제107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49

 

좌정승 익원공 김사형(翼元公  洛圃 金士衡)

1341(충혜왕 복위 2)1407(태종 7).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는 평보(平甫), 는 낙포(洛圃). 諡號는 익원(翼元)

고조부는 忠烈公 김방경(金方慶)

증조부는 文英公 김순(金恂)

할아버지는 貞簡公 김영후(金永煦)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 김천(金蕆)이며,

사위가 평산신씨 제정공 신효창이다.

음보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뒤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다.

뒤에 개성윤(開城尹)이 되어 보리공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뒤,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고,

1390(공양왕 2)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이 되고 이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승진하였다.

1390년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이 있은 뒤

이를 둘러싸고 찬성사(贊成事) 정몽주와 대결하고 서로 탄핵하였다.

삼사좌사(三司左使동판도평의사사(同判都評議司事)로 있다가 여러 장상들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문하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 겸 병조전서응양상장군

(門下侍郎贊成事兼判尙瑞司事兼兵曹典書鷹揚上將軍)에 올랐다.

 

 

같은 해 12월 문하우시중에 제수되고,

상락백(上洛伯)의 작위와 식읍 1,000호 및 식실봉(食實封) 300호를 받았다.

1396(태조 5)에 도통처치사(都統處置使)가 되어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그 뒤 좌정승을 지냈고 1398(태조 7) 1차 왕자의 난 때,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에 가 적장(嫡長)을 후사로 세울 것을 요청해

정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399(정종 1)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1401년 다시 좌정승에 복직되고 이듬해 영사평부사를 지낸 다음,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개국공신 중에서는 배극렴(裵克廉) 다음으로 지위가 높았던 고려의 원로 구신이며,

가문이 귀하고 높았으며 마음이 청고해 이성계가 아꼈다고 한다.

조준과 함께  8년간 재상의 지위에 있을때 말을 신중히 하고 스스로 삼가며

분수를 지켜 조준의 의견을 맞추고 적을 가지지 않았다 한다.. 

諡號는 날개, 으뜸의 익원(翼元)으로 신하중에 으뜸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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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을 뛰어넘은 행정의 달인 김사형(金士衡)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미래한국 편집위원---

조선초 정승을 열거할 때 조준(趙浚), 하륜(河崙)은 알아도 김사형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러나 태조 정권 내내 최고 실권자인 좌의정 혹은 좌정승이 조준이었다면

그와 보조를 맞춰 내내 우의정 혹은 우정승으로 있었던 인물이 김사형이다.

흔히 3정승이라고 하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인데

일반적으로 셋 중에서 가장 힘이 센 실력자는 영의정이 아니라 좌의정이다.

시대에 따라 혹은 임금에 따라 아주 드물게 영의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실권은 좌의정에게 있었던 것이 조선 시대 대부분의 시기이다.

따라서 그 시대의 정치를 살필 때 좌의정이 누구인지부터 살피는 것은 필수적이라 하겠다.

김사형(金士衡 1341~1407)은 고려 때의 명장군이자 충신으로

문무(文武)를 함께 갖췄던 재상 김방경(金方慶)의 현손으로 여말선초의 명문세가 출신이다.

 

 

<경세가들에 소홀한 역사학계>

김사형은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조준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다.

이 때 맺은 교분으로 그의 정치 노선은 단 한 번도 조준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조준을 따른것이 아니라 조준의 노선이 옳다는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

1407(태종7) 730일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실록은 그의 인품을 이렇게 평하고 있다.

깊고 침착하여 지혜가 있었고, 조용하고 중후하여 말이 적었으며,

속으로 남에게 숨기는 것이 없고, 밖으로 남에게 모나는 것이 없었다.

재산을 경영하지 않고 성색(聲色)을 좋아하지 않아서

처음 벼슬할 때부터 운명할 때까지 한 번도 탄핵을 당하지 않았으니

시작도 잘하고 마지막을 좋게 마친 것(善始令終)이 이와 비교할 만한 이가 드물다.”

 

 

 

그는 무엇보다 관리로서의 능력[吏才]이 출중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가들의 맹점은 이처럼 이재(吏才)가 뛰어났던 경세가들을 소홀히 한다.

그저 책이라도 남기면 그것을 갖고 일방적으로 높이는 경향을 보인다.

학재(學才)만 높이는 편향성 때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황희나 김사형처럼 행정실무 능력이 특출나

백성들에게 큰 혜택을 베푼 이들에 대한 평가에는 인색하다.

그들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서 하나 찾아보기 힘든 것이 그 반증이다.

정도전(鄭道傳)에 대한 우리 학계의 과도한 평가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도전의 경우 군신공치(君臣共治)를 내세웠다거나

재상 중심의 정치를 역설했다는 점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재상, 즉 정승에 오르지 못했다.

왜 태조는 정도전을 그렇게 아끼면서도 그를 정승의 반열에 올리지 않은 것일까?

 

물론 조선이 건국되고 정도전이 맡았던 직함을 보면 화려하다.

개국 1등 공신으로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동판도평의사사사,

판호조사(判戶曹事), 겸판상서사사(兼判尙瑞司事), 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

지경연예문춘추관사(知經筵藝文春秋館事), 겸의흥친군위절제사(兼義興親軍衛節制使)

요직을 겸임해 정권과 병권을 한 몸에 안았다. 그럼에도 정작 정승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다.

    

 

정도전은 왜 정승에 오르지 못했을까

사실 정도전은 누구보다 정승이 되고 싶었을 것이고 실제로 그 직전까지 이르렀었다.

태조 4(1395) 1220<태조실록>의 짧은 기사를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좌정승 조준, 우정승 김사형, 삼사판사 정도전에게 각각 칼 한 자루씩을 주었다.”

삼사판사, 훗날의 호조판서에 가까운 이 자리가 정도전이 가장 높이 올라간 관직이다.

그런데 왜? 일차적으로는 조준의 반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김사형이 우의정 자리를 누구보다 잘 맡아서 했기 때문이다.

좌의정도 우의정을 거쳐야 올라갈 수 있는데

업무 능력에서 정도전은 결국 김사형 이상의 신뢰도를 태조 이성계에게 심어주지 못했던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아들에게 권력을 빼앗긴 임금이라는 점에서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없지만

훗날 형 정종을 물러나게 하고 태종이 직접 왕위에 오르게 될 때 이성계는 체념한 듯 이렇게 말했다.

방원은 강명(剛明)하니 권세가 아래로 내려가지는 않을 것이다.”

즉 이성계도 정도전의 남용에 가까운 권력 행사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발언이다.

 

 

반면에 김사형은 무엇보다 업무 능력이 뛰어났고 자신의 한계를 넘지 않았다. 실록의 평가다.

젊어서 화요직(華要職)을 두루 거쳤으나 이르는 데마다 직책을 잘 수행하였다.

무진년(1392) 가을에 태상왕이 국사를 담당하여 서정(庶政)을 일신하고

대신을 나누어 보내 각 지방을 전제(專制)하게 하였을 때

김사형은 교주 강릉도 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가 되어 부내(部內)를 잘 다스렸다.

경오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서 대사헌(大司憲)을 겸하였고

조금 뒤에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승진하였다.

대헌(臺憲)에 있은 지 1년이 넘었는데 조정이 숙연(肅然)해졌다.”

 

 

좌의정 조준-우의정 김사형, 환상의 콤비

탁월한 실무능력과 분수를 아는 처신은 그를 우정승에 그치게 하지 않았다.

조준과 김사형의 관계를 실록은 이렇게 압축해서 정리하고 있다.

조준은 강직하고 과감하여 거리낌 없이 국정(國政)을 전단(專斷)하고,

김사형은 관대하고 간요한 것으로 이를 보충하여 앉아서 묘당(廟堂)을 진압했다.”

흔히 말하는 환상의 콤비였던 셈이다.

그래서 태종 초에는 드디어 좌정승에 오른다.

이미 왕권 중심의 정치를 구상하고 있던 태종으로서는

모든 것이 불안정할 때 김사형의 지혜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1년 반 만에 태종의 최측근인 하륜에게 좌정승 자리를 넘긴다.

 

 

그러나 개국 과정이나 1차 왕자의 난 때

적극적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은 김사형의 정치적 약점이 됐다.

태종10(1410) 712일 태조를 종묘에 모시면서 배향공신을 토의하는데

이 때 김사형은 배향공신에 오르지 못한다. 그 날의 장면으로 들어가보자.

김사형(金士衡)의 배향 여부에 대해 태종이 하륜에게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

임금이 신하에게 물으면 신하는 감히 바르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사형은 공이 없으니 배향함이 마땅치 않습니다.”

의정부에서도 아뢰었다.

김사형은 가문이 귀하고 현달하며

심지(心地)가 청고(淸高)하기 때문에 태조께서 중히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본래 개국(開國)의 모획(謀劃)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또 모든 처치(處置)를 한결같이 조준(趙浚)만 따르고

가타 부타 하는 일이 없었으니 배향할 수 없습니다.”

마침내 배향되지 않았다. 조준만 배향공신에 올랐다.

<출처: 미래한국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미래한국 편집위원>

 

1407년  태종은 날개중에 으뜸이라 하여 익원(翼元)이라 시호를 내렸으며,

익원(翼元)이라는 시호는 전무후무하게 낙포 김사형(洛圃 金士衡)에게만 내려진 시호이다.

 

上洛府院君翼元金公之墓 馬韓國大夫人竹山朴氏祔

상락부원군익원김공지묘 마한국대부인죽산박씨부

 

 

 

 

 

 

 

 

上洛府院君翼元金公之墓 馬韓國大夫人竹山朴氏祔

상락부원군익원김공지묘 마한국대부인죽산박씨부

 

 

 

 

김사형(金士衡) () 세계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포르투갈 탐험가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z, 1450~1500)

일행과  함께 아프리카 최남단 폭풍의 언덕에 도착한 때는 1488년이다.

폭풍속에 생사를 넘나드는 지루한 항해 끝에 살았다는 희망을 갖게된 이들은

이곳 폭풍의 언덕희망봉이라 명명하고 아프리카 대륙을 처음으로 지도에 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보다 86년이나 앞선 1402년 조선의 재상 김사형(金士衡, 1341~1407)선생에 의해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에 아프리카 대륙을 정확하게 기록해 놓았던 것이다.

그것도 비단위에 붓으로 그곳의 문명을 그릴 수 있었던 미스터리에 가까운 이 지도의 비밀은 무엇일까?

    

 

김사형, 중국의 지도를 수집하다

 

정승 김사형(金士衡)은 조선 왕조가 세워지고 7년이 되던 해인 1399(정종 1) 정월,

홍제원에서 임금의 전송을 받으며

()나라 건문황제(建文皇帝)의 등극을 축하하는 하등극사(賀登極使)가 되어 중국에 들어 가는데,

이 때에 조선 2대 왕인 정종(定宗)의 선위(禪位) 사실도 승인을 받는다.

외교사절에는 명() 태조가 사망함에 따라

정당문학 하륜(河崙, 1347~1416)을 진위사(進慰使),

판삼사사 운재 설장수(芸齋 偰長壽,1341~1399)를 진향사(進香使)로 삼아 함께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김사형은 이 사행길에서 함께한 판삼사사 설장수의 도움으로 두 종류의 중국 지도를 입수하게 되는데

하나는 원나라 때 강소성 소주 출신 이택민(李澤民)이 만든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이고,

또 한 본은 절강성 출신 승려 청준(淸濬)이 제작한혼일강리도(混日疆理圖)이다.

 

설장수는 위그루 출신으로

1358년에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아버지 설손(偰遜)을 따라 일가족 모두가 공민왕 때 고려에 망명했다.

이 설씨 집안은 문장과 언변이 뛰어 났으며 지도 수집에도 관심이 많았고

실제로 천문도(天文圖,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동생인 설경수(偰慶壽)가 서사(書寫)했으며,

숙부 설사(偰斯)도 상당한 지도(地圖) 수집가 였던 것이다.

운재 설장수(芸齋 偰長壽)4개 국어에 능통했는데

고려에서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는 설장수의 다국어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외교 관료로 발탁하여 중국과의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한다.

이후 조선이 개국할 때 김사형과 정치노선을 함께 하며

대명외교의 최전선에서 외교 갈등을 순조롭게 극복한 인물이다.

 

 

 

김사형의 프로젝트 셰계지도를 그리다.

 

김사형은 이러한 연유로 설씨 집안을 통해 입수한

두 본의 지도를 국내로 들여와서 우정승 이무(李茂, 1355~1409)에게 보여 준다.

1396년 김사형이 5도병마도통처치사가 되어 쓰시마[對馬島]와 이끼시마[壹岐島]를 정벌할 때,

5도 체찰사에 보임된 이무(李茂)와 함께 원정(遠征)했었고, 우정승으로 함께 국사를 돌보고 있었다.

 

의정부의 수반인 좌정승 김사형은 우정승 이무와 함께 지도 제작을 기획하였고

많은 연구와 검토를 하며 원나라에서 입수한 지도와

태조6(1400) 봄에 박돈지(朴敦之, 1342~1422)

사신으로 일본에 갔을 때 가져온 일본 지도를 기초로 해서,

팔도도(八道圖)를 그린 경험이 있는 검상(檢詳) 이회(李薈)에게 명하여

중국본 두 종류와 일본지도를 참고하게 하고

이슬람 계통의 지도 제작법까지 동원하여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이 제작 과정을 참찬 권근에게 기록하게 하였다.

 

의정부
議政府
좌정승(左政丞) 김사형(金士衡) 安東
우정승(右政丞) 이 무(李 茂) 丹陽
참 찬(參 贊) 권 근(權 近) 安東
검 상(檢 詳) 이 회(李 薈) 泰安

지도 제작에 참여 했던 인물.

 

 

 

당시 중국 지도에 우리나라와 일본을 상세하게 그리지 않았던 점을 보완하기 위해

이회가 그린 팔도도(八道圖)를 접목하게 하였으며,

서유럽과 아프리카 대륙 및 서남아시아의 모양을 상세하게 그리게 하였다.

그렇게 하여 한반도의 윤곽을

정확하고 세밀하게 묘사하였으며 산맥 표현방법도 독특하게 그렸다.

이렇게 그린 지도는 중국의 지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으며

세계의 주목을 받는 지도가 탄생 된 것이다.

이름하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이다.

 

 

 

 

 

 

 

 

 

 

 

 

 

 

朝鮮 開國功臣上洛府院君  大匡輔國崇祿大夫左政丞   諡翼元洛圃金先生事績碑

조선개국공신상락부원군  대광보국숭록대부좌정승   시익원낙포김선생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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