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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김윤조(金胤祖), 광산김씨 제주 입도조 김윤조, 김견노(金堅老) ,김치남(金致南), 김계충(金繼忠) , 영광부사 김수(金須) 장군,

구름에 달

by 碧巖 2018. 7. 10.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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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 제주도 입도시조 김윤조(金胤祖)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2724

제주도 지방문화재 제60-1

 

송당거사 김윤조는 벼슬이 예부의(禮部議),

문간공 송당거사 김광재(文簡公 松堂居士 金光載)의 차남이다.

김광재의 字는 자여(子輿), 號는 송당거사(松堂居士)이다.

김광재는 고려 공민왕 때 대제학을 지내면서 광산 김씨 가문을 빛낸 인물로서

배위는 안동김씨로 평장사 김승택의 따님이며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이 김흥조(興朝)이고  

차남이 바로 제주 입도조가 된 김윤조(胤朝)가 된다.

그러나 이색이 지은 목은문고(牧隱文庫)’의 묘지명에는 김윤조가 보이지 않으며,

이색에 의하면,

 “김흥조는 뜻이 크고 기개가 있고, 벼슬이 중현대부 군자감, 수원·해주 부사를 지냈다

문간공(文簡公) 김광재는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대제학은 고려후기에 처음 등장한 벼슬로 정2품직에 해당한다.

아버지는 고려의 명신 김태현(金台鉉)이고,

할아버지는 영광부사 김수(金須) 장군이다.

 

김광재의 둘째 아들 김윤조가 제주도에 낙향하게 된 구체적인 동기는 형 김흥조 때문이었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형 김흥조가

136810, 밀집부사 김정(金精), 조사공(趙思恭), 유사의(兪思義) 등과

신돈(辛旽)을 제거하려는 모의를 꾸몄으나

조사공(趙思恭)이 자신과 절친한 전임 홍주목사 정운에게 이를 고변하자,

정운은 제학(提學) 한천과 함께 시중에게 이 사실을 급히 보고했고,

시중의 보고로 이를 안 공민왕은 이들을 옥에 가둔 후 귀양을 보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신돈(辛旽)은 이들이 귀양 가는 데 몰래 부하를 보내 뒤쫓아가 피살했다.

형의 사건을 지켜본 동생 윤조는 충격을 받고 신돈으로부터 화()를 피하고자,

몰래 이름을 일()로 고쳐 호남으로 내려갔고

그 후 증조부가 순절한 탐라에 낙향하기로 결심하여

1368년 신돈 사건 직후 바다를 건너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에 정착했다고 한다.

만년에 김윤조는 한동리(漢東里)로 옮겨 살다가 졸하자

제자들이 김녕리 괴살메(묘산봉) 동남쪽 자락에 장지를 마련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김윤조의 아들 김견노(堅老)는 천호(千戶)를 지냈고,

손자 김치남(致南) 또한 무과에 급제하여 아버지와 같은 천호 벼슬로 생을 마쳤다.

김윤조의 증손인 김계충의 벼슬은 예조정랑 겸 충무위중부사직이었다.

이후 김진용, 김명현 같은 당대의 명현이 배출되면서 광산 김씨 가문은 세세연연 번창했다.

김수 장군 신도비와  김윤조 묘역

 

 

 

贈金紫光祿大夫門下侍中 參知政事集賢殿太學士判禮部事 行監察御使靈光副使 光山金公須將軍神道碑銘

증금자광록대부문하시중 참지정사집현전태학사판예부사 행감찰어사영광부사 광산김공수장군신도비명

 

 

 

 

 

 

 

 

 

 

 

 

제주에 뿌리 내린 김윤조(金胤祖)가문

아들 김견(堅老), 손자 김치남(致南)이 천호(千戶)를 지냈고

증손으로 문과에 오른 김계충(金繼忠)의 벼슬이 예조정랑(禮曺正郞)에 오르고

충무위중부사직을 겸하면서  비로소 번성(繁盛)의 계기를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여말(麗末)에 신돈(辛旽)의 화를 피해

제주도(濟州道)에 입도은거(入島隱居)하여 자손이 세거(世居)하게 되었다.

명문의 후손으로 장래가 촉망되던 김윤조(金胤祖)가 뜻 밖에 몰아닥친 정변(政變)으로

개경(開城)을 떠나 망망대해를 건너 제주도에 들어온 것은 고려 공민왕 17(1368) 가을경이다.

 

김윤조(金胤祖)는 시조 김흥광(金興光)으로 부터 17세로 고려 후기인으로

김광재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로 평장사 김승택의 따님이다.

형 김흥조( 金興祖)는 일찍 군기감을 거쳐 해주의 수령을 지내고

공민왕 8년 홍건적이 침입시 남행하는 왕을 호종한 공으로 호종공신 2등에 책봉된 인물이다.

김흥조가 김청(金精), 상서 조사공(趙思恭), 유사의(兪思義), 김제현(金齋顔) 등과 더불어

신돈(辛旽)을 주멸하기로 하고 그 준비를 서두르다 발각되어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다가 장류되는 도중 살해당한 것은 1368년 봄이었다.

이에 김윤조는 신돈의 화를 피하여 개경을 떠나 1368년 가을 제주도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는 장차 밀어닥칠 멸문지화를 면하기 위해 추적의 손이 미치지 않는 절해고도로 망명하였던 것이다.

이보다 먼저 1270년 삼별초의 입도를 막기 위해 제주에 들어왔다가 전사한

김수(金須) 장군은 김윤조의 증조부이며,

애월읍 고성리 산124번지 산간지역인 산세미오름에 김수묘로 추정되는 석곽방묘가 있다.

김윤조는 제주도에 들어와서는 김녕리에 터전을 잡고 훈학에 힘쓰는 한편 예의와 효도를 숭상하여 그 덕이 높았다.

김윤조는 만년에 거처를 한동리 쪽으로 옮겨

조(趙)씨와 같이 지금의 한동리 위쪽 속칭 감남굴을 개촌하여 살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따르는 제자들이 안장했다고 한다.

괴살메 남쪽에 있는 김윤조의 묘는 고려 양식인 석곽방묘(石槨方墓)이다.

高麗禮部議郞 光山金公胤祖之墓 配 墓祔 子千戶堅老及配祔

고려예부의랑 광산김공윤조지묘 배 묘부 자천호견로급배부

 

 

 

 

 

 

 

 

 

 

高麗禮部議郞 光山金公胤祖之墓   配 墓祔   子千戶堅老及配祔

고려예부의랑 광산김공윤조지묘   배 묘부   자천호견로급배부

 

 

 

 

 

 

 

 

高麗禮部議郞 金胤祖之墓 配墓祔 子千戶堅老及配墓祔

고려예부의랑 김윤조지묘 배묘부 자천호견로급배묘부

 

 

 

 

 

 

 

 

 

 

 

 

 

 

 

 

 

 

贈金紫光祿大夫門下侍中 行監察御使 光山金公諱須事蹟碑

증금자광록대부문하시중 행감찰어사 광산김공휘수사적비

 

 

 

 

 

 

 

 

 

 

贈金紫光祿大夫門下侍中 行監察御使 光山金公須之壇 配沃溝郡大夫人高氏

증금자광록대부문하시중 행감찰어사 광산김공수지단 배옥구군대부인고씨

김수처 고씨 묘지명(金須妻 高氏 墓誌銘)

고씨(高氏) 부인(1226~1327)은 고영중(高塋中 : 1133~1208)의 손녀이며,

김수(金須 : ?~1270)의 처이다.

옥구군대부인(沃溝郡大夫人)으로 추봉되었다.

광산(光山) 김수에게 출가하였기 때문에 위의 족보에 실려 있다.

묘지명의 내용은 고씨 부인의 가계와 생애에 대한 기술로 채워져 있다.

부인은 김수에게 출가하여,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장남 김태일(金台一)은 일찍 사망하였고, 차남이 바로 김태현(金台鉉)이다.

 

고려 광산김씨의 묘지명으로 이제현이 찬한 묘지명이 남아있다.

고씨 부인의 묘지명, 부인의 아들 김태현과 그 처인 왕씨 부인 및

김태현의 아들 김광재(金光載)의 묘지명이 남아 있으며,

따라서 이들 묘지명은 고려시대 광산 김씨의 가계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고씨 부인의 할아버지인 고영중의 묘지명도 남아 있어 참고가 된다.

 

옥구군대부인 고씨(沃溝郡大夫人 高氏) 묘지명 및 서문

이제현 찬

대부인은 성이 고씨(高氏)인데,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이들은 모두 탄식하였다.

사람이 되어 마음에 간절히 바라는 것으로 수()만한 것이 없을 터이나,

하늘이 사람에게 베풀어주면서도 심히 아끼는 것으로 또한 수()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대부인은 나이가 백하고도 두 살이었으나 눈도 밝고 귀도 밝았으며 건강하고 편안하게 임종을 맞았으니,

홍범(洪範)의 오복(五福) 중에서 세 가지나 갖추어서 그것을 누렸다고 할 수 있지 아니 하겠는가.

그 집안을 보면 조청대부 예빈경으로 은퇴한 고정(高)의 따님이고,

조산대부 동궁시강학사 예빈경 지제고 고영중(高瑩中)의 손녀이며,

문림랑 감찰어사 고세재(高世材)의 증손이며,

태중대부 우간의대부 국자감대사성 한림시강학사 지제고

(太中大夫 右諫議大夫 國子監大司成 翰林侍講學士 知制誥) 고조통(高趙通)의 외손이다.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집현전태학사 판예부사 김수(金須)의 처이고,

지금 벽상삼한 삼중태광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판전리사사

       (壁上三韓 三重太匡 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上護軍 判典理司事)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김태현(金台鉉)의 어머니이다. 

 

부모의 집에 있을 때에는 엄숙하고 공경하며

곧고 베풀기를 잘하여 말을 가리거나 게으른 얼굴빛을 보이지 않았다.

시집을 가서 시부모를 섬기게 되니 또한 그러하여 규문(閨門)에 있을 때와 같이 화목하였다.

참정 부군(叅政 府君)이 일찍이 왕명을 받들고 서해도 금미장(西海道 今彌莊)을 감독하였는데,

장인(莊人)이 부군에게 잘 보이려고 숯 몇 수레를 가져왔다.

대부인은 남편은 의로운 것이 아니면 일찍이 털끝만큼도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일이 없는데,

하물며 감독하는 임무를 띠고 와서 그러하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잘못된 일일 것입니다.”라고 말하고는 문을 닫고 받지 않았다.

밤이 되자 장인이 그것을 두고 갔는데,

당시의 권신 김인준(金仁俊)의 자제가 사사로운 감정을 품고

부군을 중상하고자 하여 드디어 인준에게 참소하여 가서 엿보게 하였다.

숯이 밖에 쌓여 있고 거두어가지 않으니, 감시하는 자가 이에 감동하여 묻지 않았다.

경오년(원종 11, 1270)의 난리<三別抄의 난>

부군이 영광군수(靈光郡守)로서 군사를 이끌고 탐부라(耽浮羅 : 耽羅)를 지키러 갔다.

겨울이 되자 (부인이) 옷을 보내려고 하였는데,

동료가 백금(白金)을 보내어 그 비용에 보태고자 억지로 두세 번 권하였으나,

대부인은 또한 끝내 받지 않으니 안팎으로 어질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부군이 힘써 싸우다 죽으니 60년을 홀로 살았는데,

친척에게 화목하고 복첩(僕妾)에게 인자한 것이 마치 부군이 살아있을 때와 같이 하였다.

당시 두 아들이 모두 어렸으나 잘 가르치고 길러 어른이 되게 하였으니,

맏아들 김태일(金台一)은 관직이 신호위녹사참군(神虎衛錄事叅軍)이었으나 먼저 죽었고,

다음은 중찬공 김태현(中贊公 金台鉉)이다.

 

, 대부인은 명문의 딸로 절조 있는 지어미와 자애로운 어머니가 되니,

그 지아비가 청렴하고 절의를 지킨 대장부가 되게 하고,

그 아들은 유학에 통달한 명재상이 되게 하였다.

사람들이 가히 볼 수 있는 그 덕의 아름다움이 이와 같으니,

볼 수 없는 것은 진실로 이보다 더하였을 것이다.

러므로 하늘이 베풀어주면서 아끼지 않았고,

사람의 마음이 간절히 바라는 바를 누린 것은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멸망한 금[亡金] 정대(正大) 3년 병술년(고종 13, 1226) 221일에 태어났으며,

(皇元) 태정(泰定) 4년 정묘년(충숙왕 14, 1327) 7월 초하루 정유일에 돌아가셨다.

1012일 무신에 송림현 입암산(松林縣 笠巖山) 서쪽 산기슭에 장례지냈다.

 

()하여 이른다.

쌍명재(雙明齋)의 아름다운 모임을 세상에서는 신선이라고 부르니

조부와 외조부[高趙]의 큰 뜻과 지어미의 덕이 고루 어지네.

옥처럼 고운 나무는 가지를 뻗고 물이 단 샘은 물줄기가 나뉘는데

오직 대부인이 경사스러움을 내외에 모았네.

집에 있을 때에는 효성이 지극하고 얼굴에는 즐거움이 가득 찼고,

지극히 공경하고 지극히 삼가하며 시부모를 받들었네.

지조는 얼음과 같이 차고, 향기는 난초와 같이 꽃다웁고

재물은 구차히 구하려 하지 않았으니, 그득한 아름다움은 드날리네.

장렬하게 부군은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였으니

의가 두텁고 절개가 곧으니 붕성(崩城)의 죽음도 범상한 것이 아니었네.

외롭고 의지할 데 없는 아들을 어루만지고 가르치니

세 임금의 재상이 되어 조상을 빛내도다.

하늘이 상서로움을 내려 102세로 장수하니

훌륭한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해마다 곡식을 보내주도다.

우리 대부인을 누가 더불어 짝할 것인가.

()을 새겨 무덤에 넣으니 천추에 빛나리로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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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 제주 입도조 예부의랑 김윤조(金胤祖) 가계//

증조부 영광부사 김수(金須),  배위 고씨부인

백조부 신호위 록사참군 김태일(金台一) 早卒

   조부 대제학 문정공 쾌헌 김태현(文正公 快軒 金台鉉,1261~1330), 광산김씨 문정공파 파조

   부친 대제학 문간공 송당거사 김광재(文簡公 松堂居士 金光載,1294~1363)

   모친 안동김씨, 평장사 양간공 김승택(良簡公 金承澤)의 따님.

   백부 총부의랑 김광식(金光軾)

   중부 화평군 문민공 둔헌 김광철(化平君 文敏公 鈍軒 金光轍,1285~1349)

   숙부 가안부녹사 김광로(金光輅)

                형님 군기감 김흥조(金興朝, ?~1368)

                예부의랑 김윤조(金胤祖) 

              자 도염령동정(都染令同正) 김일(金逸)

                             손자 천호 김견노(金堅老

                                  증손자 천호 김치남(金致南)

                                        현손 예조정랑 충무위중부사직 김계충(金繼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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