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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아성부원군 충장공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종남수옹終南睡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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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碧巖 2018. 7. 20.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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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성부원군 충장공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산7-1, 재실 방산리211-1

충청남도 기념물 제184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벽암 두릉연가 

1539(중종 34)1609(광해군 1). 조선 중기의 문신.                          벽암두릉연가

본관은 한산(韓山). 는 여수(汝受), 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

이장윤(李長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치(李穉)이다.

아버지는 내자시정(內資寺正) 이지번(李之蕃)이며, 어머니는 남수(南脩)의 따님이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인 이지함(李之菡)에게 학문을 배웠다.

1558(명종 13)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이듬 해 홍문관정자가 되어 명종의 명을 받아 경복궁대액(景福宮大額)을 썼다.

이어 부수찬이 되고 1564년 병조좌랑·수찬, 이듬 해 정언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다.

 

1567(선조 즉위년) 원접사종사관(遠接使從事官)으로 명나라 조사(詔使)를 맞이한 뒤

이조정랑·의정부사인·사헌부집의·상의원정(尙衣院正부교리를 역임하고, 직제학이 되어 지제교를 겸하였다.

이어 교리·응교를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를 마친 뒤,

1570년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1577년 이조·예조·형조·공조의 참의를 차례로 지내고 대사성·도승지가 되었다.

 

아계선생사당

 

1578년 대사간이 되어 서인 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윤현(尹晛) 등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다음 해 대사헌을 거쳐서  1580년 병조참판에 이어 형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이듬 해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오르고, 다시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면서

제학·대제학·판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를 겸하였다.

1588년 우의정에 올랐고, 이 무렵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라지자 북인의 영수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1589년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며,

종계변무(宗系辨誣: 명나라 태조실록대명회전에 이성계의 가계가

고려의 권신 이임인(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시정하도록 요청한 일)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1590년 정철(鄭澈)이 건저(建儲: 세자 책봉) 문제를 일으키자 아들 이경전(李慶全)을 시켜

김공량(金公諒: 仁嬪의 오빠)에게 정철이 인빈과 신성군(信誠君)을 해치려 한다는 말을 전해 물의를 빚었으며,

아들로 하여금 정철을 탄핵시켜 강계로 유배시켰다.

한편 이와 관련해 호조판서 윤두수, 우찬성 윤근수와 백유성(白惟成유공진(柳拱辰이춘영(李春英황혁(黃赫)

서인의 영수급을 파직 또는 귀양보내고 동인의 집권을 확고히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해 개성에 이르렀으나,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침입하도록 했다는 양사(兩司: 사간원·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백의(白衣)로 평양에 이르렀으나, 다시 탄핵을 받아 평해(平海)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가

1595년 영돈녕부사로 복직되어 대제학을 겸하였다.

북인이 다시 분당 때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홍여순(洪汝諄) 등과 대북파가 되어 영수로서

1599년 재차 영의정에 오르고

1600년 다시 파직되었다가 1

601년 부원군(府院君)으로 환배(還拜: 복직되어 제수됨)되었으며, 선조가 죽자 원상(院相)으로 국정을 맡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신동으로 불렸으며, 특히 문장에 능해 선조조 문장팔가(文章八家)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한다.

서화에도 능하여 대자(大字)와 산수묵도(山水墨圖)에 뛰어났으며,

용인의 조광조묘비(趙光祖墓碑)와 안강의 이언적묘비(李彦迪墓碑)를 썼다.

이이(李珥정철과 친구였으나 당파가 생긴 뒤로는 멀어졌다. 저서로 아계집이 있다. 諡號는 문충(文忠)이다.

 

1591년 정철의 처벌을 놓고 동인이 내부의 여론이 나뉘었을 때는 정철을 사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으며,

남인과 북인으로 갈릴 때에는 북인의 지도자가 되었다.

1590년과 1591, 1592, 1599년과 1602년 세 번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했다.

화가 이산보의 사촌 형이며,

토정비결의 저자인 문신 겸 역술인 이지함은 그의 숙부이기도 했다.

토정 이지함과, 남명 조식의 문인이다.

 

아계선생재실

 

망암

 

 

 

 

 

輸忠翼謀光國椎忠奮義協慕平難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수충익모광국추충분의협모평난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겸영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世子師鵝城府院君 贈諡 李公之墓 貞敬夫人陽州趙氏合葬干左

세자사아성부원군 증시 이공지묘 정경부인양주조씨합장간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