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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허균-허난설헌기념공원, 許筠-許蘭雪軒記念公園 ,난설헌 허초희,교산허균

구름에 달

by 碧巖 2018. 8. 17.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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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筠-許蘭雪軒記念公園

허균-허난설헌기념공원

강원도 강릉시 난설헌로193번길 1-29[초당동 477]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59호. 허균,허난설헌 초당동 고택

교산허균 蛟山許筠

1569(선조 2)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본관은 양천(陽川). 는 단보(端甫), 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

아버지는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학자·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 허엽(許曄).

어머니는 강릉 김씨(江陵金氏) 예조판서 김광철(金光轍)의 딸.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허성(許筬)이 이복형이다.

문장으로 이름 높았던 허봉(許篈)과 허난설헌(許蘭雪軒)과 형제이다.

허균은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9세 때에 시를 짓고,

1580(선조 13) 12세 때에 아버지를 잃고 더욱 문학 공부에 전념했다.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배웠다.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하나인 이달(李達)에게 배웠으며,

이달은 둘째 형의 친구로서 당시 원주의 손곡리(蓀谷里)에 살고 있었다. 그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주었다.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허균은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을 지어 그를 기렸다.

허균은 26세 때인 1594(선조 27)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지냈다.

1597(선조 30)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을 했다.

1598년 황해도도사(都事)로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했다는 탄핵을 받고 부임한지 6달 만에 파직되었다.

 

그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형조정랑을 거쳐 1602(선조 35)사예(司藝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했다. 이 해에 원나라 접사 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604(선조 37)수안군수(遂安郡守)로 부임했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허균은 1606년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됐다.

 

그러나 세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했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뒤에 공주목사로 기용되어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냈다.

또다시 파직 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다.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허균은 1609(광해군 1)에 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에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을 하고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됐다.

1610(광해군 2)에 전시(殿試)의 시험을 주관하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됐다. 그 뒤에 몇 년간은 태인(泰仁)에 은거했다.

 

허균은 1613(광해군 5)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출신의 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해 대북(大北)에 참여했다.

1614년에 천추사(千秋使)가 돼 중국에 다녀왔다.

 

그 이듬해에는 동지 겸 진주부사(冬至 兼 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고

귀국할 때에 태평광기(太平廣記)를 비롯해 많은 책을 가지고 왔다.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허균은 1617(광해군 9)좌참찬이 됐으며

폐모론을 주장하다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과 사이가 벌어져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됐다.

그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아버지를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리니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했다.

 

1618(광해군 10)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다.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 났다.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草堂 許曄 초당 허엽---高城 海山亭 고성의 해산정에서


岳麓 許筬 악록 허성---夜登南樓 밤에 남루에 올라


荷谷 許崶 하곡허봉---灤河난하에서




蘭雪軒 許楚姬허초희---竹枝詞. 죽지사. 3


蛟山 許筠 교산 허균 ---湖亭 경포호정자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 1589319)

1563년 강릉에서  아버지 동지중추부사 허엽(許曄), 어머니 강릉 김씨(江陵金氏) 김광철(金光轍)의 딸.

본관은 양천(陽川)으로 본명은 초희(楚姬)이고 는 경번(景樊)이며 는 난설헌이다.

허성은 이복 오빠였고, 이복 언니 2명과, 친오빠 허봉(許篈)이 있었다.

또한 홍길동전의 저자 교산 허균(許筠)은 그의 친 남동생이었다.

후일 동생인 허균이 명나라에 난설헌의 시고를 편찬할 때 기록되어 이름과 자가 전하는 여성으로,

당시 여성 중 이름과 자가 전하는 몇 안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본명은 초희이고, 다른 이름은 허옥혜(許玉惠)였다.

난설헌은 그의 호인데 여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조선시대의 관례에 따라

그는 허난설헌, 허난설재, 난설헌 허씨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버지 허엽이 첫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에게서 허성(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

강릉김씨 김광철(金光轍)의 딸을 재취로 삼아

처가가 있던 강원도 강릉에서 허봉, 초희, 허균 3남매를 두었다.

그밖에 선조 때의 유명한 의관인 어의 허준이 그의 먼 친족으로 11촌 아저씨뻘이었다

157715세 무렵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성립(金誠立)과 혼인하였는데,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못한 상태에서

1589년 향년 27세로 마치었다. 

그 뒤 남편 김성립은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며, 9품 홍문관 저작을 지내다가

1592년 남편 김성립이 임진왜란 때 전사하고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되면서

추증 예에 따라 증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받았다.

1563년 명종 18년 강릉 초당 생가에서 당대의 석학인 초당 허엽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1570년 선조 3, 8세 때 '광한전백옥루 상량문'을 지었다.

1577년 선조 10, 15세 때 안동김씨 김성립에게 출가 하다.

1580년 선조 13, 18세 때 아버지 허엽이 상주에서 객사하다.

1582년 선조 15, 20세 때 전 해 1579년 딸을 잃고나서 또한 아들 희윤을 잃는다.

1583년 선조 16, 21세 때 둘째 오빠 허봉이 10만양병설을 주장한 이이를 탄핵했다가 귀양을 가다.

1588년 선조 21, 26세 때 둘째 오빠 허봉이 금강산에서 객사한다.

1589년 선조 22,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광주 초월면 지월리 경수산에 묻히게 된다.

1589년 선조 22, 남편 김성립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남양 홍씨와 재혼한다.

1590년 선조 23, 동생 허균이 친정에 남은 난설헌의 시를 모아난설헌집초고를 만들고 류성룡 서문을 받다.

1592년 선조 25, 남편 김성립이 임진왜란에 참가하여 전사한다.

1598년 선조 31, 허균이 정유재란 때 원정나온 명나라 오명제에게 난설헌의 시 200여편을 전해주어

                          이 시가 명나라에서 편찬한 조선시선, 열조시선등에 실렸다 .

1606년 선조 39, 허균이 명나라 사신 주지번, 양유년 등에게 난설헌의 시를 전해주어

                          《난설헌집이 명나라에서 간행되었다.

1607년 선조 40, 4월 허균이 난설헌집을 목판본으로 출판하다.

1711년 일본에서 분다이야 지로베이에 의해 난설헌집간행되다.

 

현재 허난설헌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안동김씨 묘역에 있다.

198657일 경기도 기념물 제 90호로 지정되었다.


허균-허난설헌기념공원

조선 시대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지은 허균(許筠)[1569~1618]

최고의 여류 문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 남매를 기념하기 위한 문학 공원으로,

허난설헌 생가 터[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59],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전통차 체험장, 녹지 공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983년 전국 시비 건립 동호회가

허균 3남매가 태어난 강릉시 사천면 판교리 교산(蛟山) 마을의 애일당(愛日堂) 터에 교산 시비를 세운 것을 시초로

1991년 강릉시 여성 단체 협의회가 난설헌 시비를 세우고,

1994년 강릉 예총에서 난설헌 시비 옆에 교산 문학비를 세우는 등

허씨 가족 5문장가의 시비를 세워 허균·허난설헌을 기리는 시금석을 다진 후

강릉시가 2001년 강원의 얼 선양 사업을 통해 본격적인 허균·허난설헌 선양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2001년 허씨 가족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가옥을 매입하여 허난설헌 생가 터를 복원하였고

2001년부터 2006년까지 5년에 걸쳐 기념관 건립과 각종 자료와 유물을 수집하여

200721일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을 개관하며 생가 터와 기념관을 갖춘 기념공원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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