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 류인석
강원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 541
의열문
의열사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1842.1.27.~1915.1.29) 십삼도의군도총재
한말의 위정척사론자이며 의병장으로 본관은 고흥(高興), 字는 여성(汝聖), 號는 의암(毅菴)이다.
헌종 8년(1842)에 춘천시 남면 가정리에서 태어났으며,
생부는 유중곤(柳重坤)이나 14세 때 족숙인 유중선(柳重善)에게 입양되었다.
이때부터 비교적 건실한 양가(養家)의 문벌을 배경으로 성장하였으며,
할아버지 유영오(柳榮五)의 인도로 위정척사사상의 원류인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1792년~1868년)의 문하에서 주로
중암 김평묵(重菴 金平默 1819(순조 19)∼1891(고종 28))과
문간공 성재 유중교(文簡公 省齋 柳重敎 1832(순조 32)∼1893(고종 30)로부터
춘추대의정신(春秋大義精神)에 입각한 존화양이사상(尊華攘夷思想)을 터득하였다.
의암 유인석 선생은 한말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정통도맥(正統道脈)을 계승한
대유학자(大儒學者)인 동시에 현실적인 위정척사론자(衛正斥邪論者)로,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운동을 시작하여 중부지역에서 크게 활약하였고,
1908년 해외로 망명한 이후에도 항일투쟁을 계속하여
십삼도의군도총재(十三道義軍都總裁)로 추대되는 등 한말의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毅菴 柳麟錫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후 전국에서 개국반대운동이 전개되었을 때,
홍재구(洪在龜) 등 강원도·경기도 유생 46명과 함께
척양소(斥洋疏)를 올려 개국이 부당함을 상소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한편 1891, 1893년에 김평묵과 유중교가 죽자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정통도맥(正統道脈)을 이어받았다.
1894년 갑오개혁이 실시된 이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유생들의 무장봉기가 삼남 일대에 일어났다.
1895년말
경기도 지평의 괴은 이춘영(槐隱 李春永)· 하사 안승우(下沙 安承禹)가 강원도 원주로부터 활동을 시작하자,
경암 서상렬(敬庵 徐相烈)·입암 주용규(立菴 朱庸奎)·모양 신지수(慕陽 申芝秀) 등
유중교 문하 유생들이 많이 호응했다.
원주로부터 충주를 거쳐 제천으로 진출한 이들 의병부대는 내부적 단결을 굳건히 하고,
또 광범한 지역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유생으로서 전국적으로 이름이 높은 의암 유인석을 총대장으로 추대했다.
그는 처음에는 어머니의 상중(喪中)이며 마음을 잡을수 없는 부해지행(浮海之行)상태라 하여 거절하였으나,
결국 여러 유생들의 중의(衆議)를 받아들여 의병항쟁에 참여했다.
그는 전국 사림(士林)에게 격문을 띄워 개화에 반대하는 척왜양(斥倭洋)의 대의를 호소했으며,
한편 평민 출신 의병장 김백선(金伯善)이
400명의 산포수(山砲手)를 거느리고 참가하여 전투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의 의병부대는
제천·충주 등 충북 일대를 석권하면서 관찰사 김규식(金奎植)을 비롯하여 인근 친일군수를 처단하고,
조령(鳥嶺) 밑에 있던 일본군 주둔소를 공격했으며,
중앙에 납입할 조세를 군수(軍需)로 압수하는 등 이 일대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이후 충주 일대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할 때, 선봉장 김백선(金伯善)[1873~1896]이 충주성을 점령하는 등
전과를 올렸으나 며칠간의 전투에서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김백선은 지원군을 요청했는데도 하사 안승우(下沙 安承禹)가
지원군을 보내주지 않아 일본군에게 패퇴한 것을 분하게 여겨 칼을 뽑아 대들었는데,
의암은 평민이 양반에 대해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김백선을 군률에 따라 처형했다.
이 사건은 그의 강직한 성품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김백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의병 대중의 사기가 떨어졌으며,
이듬해 5월 장기렴(張基濂)이 거느린 정부군에 의해 패배하게 된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화승총(火繩銃)으로 무장한 의병으로서는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나 관군에 대항하기 어려웠기에
제천에서의 패배 후 단양으로 일시 퇴거했다가 다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평안도로 북상하였고,
청나라의 원조를 받기 위해 다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이동한 뒤 랴오둥[遼東] 지방으로 옮겼다.
그러나 선발대로 보낸 조암 이범직(釣菴 李範稷)이 중국 관헌에게 무기를 빼앗기고 부하 20명과 함께 피살되자,
자신을 따르던 219명의 의병을 해산시켜 귀향하게 한 후 퉁화 현[通化縣]에 정착하여 재기의 기회를 엿보았다.
1898년(광무 2) 고종의 소환으로 일시 귀국했다가,
이듬해 다시 랴오둥으로 들어가 1900년 다시 귀국할 때까지 랴오둥에서 강학(講學)과 저술에 전념했다.
귀국 후 황해도 평산과 평안도 태천·개천·용천 등지에서 문인들을 가르쳤다.
1904년 8월 〈칠실분담 漆室憤談〉을 저술한 뒤
배성일전(背城一戰)을 내세워 깊고 넓은 타국으로 떠나 거국수의(去國守義)함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진회(一進會)에 대항하여
충청도·황해도·평안도 등지를 돌아다니며 향약을 조직하고 그 시행을 권장하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 유림들에게 의병의 궐기는 못할지라도 의토(義討)·언토(言討)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1907년 한일신협약이 강제 체결되고 군대 해산이 이루어지자
전국민의 조직적인 성토대회로 적을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국내의 의병운동은 외국으로부터 원조가 없는 한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국외인 노령에 항구적인 항쟁의 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곳에서 이범윤(李範允)·이남기(李南基)·이상설(李相卨) 등의 추대를 받아, 13도의군도총재가 되었으며,
이때 13도 대소동포(大小同胞)에게 통고하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국민의 단결과 결사 보국을 역설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전국에 있는 지사(志士)들에게 간도로 나와 함께 수절(守節)하자고 호소하였으며
1915년 관뎬 현[寬甸縣] 방취구(芳翠溝)에서 일생을 마쳤다.
의암은 척사론을 기본으로 하여 서양사상에 철저히 반대하면서
유교적인 이념으로써 통치되는 독립된 나라를 구상했으며,
국제질서도 중국 중심으로 다시 개편할 것을 주장했다(→ 위정척사론).
특히 서양사상의 주체가 되는 평등 자유론, 공화제 또는 입헌군주제의 민주주의 체제,
그 첨병으로서의 기독교·신학문이 구래 유교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사농공상병의 오민으로 체계화된 귀천존비의 사회질서가 있어야 된다고 하면서,
향약을 실시함으로써 농민반란을 방지하고 제국주의 침략에 무력으로 항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독립운동방략은 의병전쟁의 지도이념으로 기능했고 비록 유교사회를 재건한다는 복고적인 것이었으나,
그의 영향하에 있었던 제자들이 비타협적 민족주의로 이어져 독립운동전선을 향해 나아가는 기틀을 마련했다.
有 朝鮮毅菴柳先生之墓 配孺人驪興閔氏祔左 配孺人慶州鄭氏祔左
유 조선의암류선생지묘 배유인여흥민씨부좌 배유인경주정씨부좌
白凡金九先生親筆告由文碑
백범김구선생친필고유문비
백범김구고유문
1946년 8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선생이
류인석 묘역에 올린 제문을 돌에 새겨 기념하고자
1998년 12월 22일 강원도애국선열추모사업회가 건립하였다.
∎백범 김구선생 친필 고유문(1946년) – 춘천 의암 기념관
대한민국 28年(1946년) 8月 17日, 김구는 삼가 류인석(柳麟錫)선생 영령께 고하나이다.
유학(儒學)이 쇄퇴한지 오래라, 공부하는 이들이 자구(字句)에 얶매어 실제 활용을 생각하지 아니하여,
성(性)을 높이고 심(心)을 낮추어 정작 힘쓸 자리는 버리고 유유하게 고담준론(高談峻論)만 일삼아
마침내 혼자만 깨달아 아무런 결실이 없어 황당함에 이르매, 모든 일이 이에서 무너졌나이다.
근래에 이르러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선생이 나시어
비로소 본심이 천리라는 즉 심즉리(心卽理)로서 제자들을 가르쳐,
분위기가 일변하여 절의(節義) 당당한 이들을 배출하니 선생이 곧 그 한분이시라.
선생이 가장 나중이시니만큼 선배들보다 더 심한 어려움과 위기를 당하셨지만,
왜적과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는 일념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굳으시매,
몸은 험한 형편에 처하되 그 뜻은 해와 별같이 비치어 지금까지 후배들로 하여금 우러러 바라보게 하셨나이다.
이같이 하오심이 무엇이리까. 오직 내 마음을 저버리지 못하심으로 아나이다.
그런즉 선생 일생의 그 절의는 실로 배운 바를 몸으로 증명하시고 남음이 있을 줄 아나이다.
누구나 왜적을 원수로 보지 않으리오만,
눈앞의 생계가 구차하여 이를 보지 못하고 마침내 더러운 곳으로 떨어짐을 깨닫지 못하는 자가 시중에 가득하거늘,
선생 홀로 본심으로 살고 본심으로 죽으리라 하시매 본심의 밝음이 온갖 삿된 것을 물리쳐 없애신지라,
이루신바 이렇듯 우뚝하셨나이다. 외적을 복수해야할 원수로 아심이 선생의 마음이시고,
생사를 초개처럼 아심이 선생의 마음이려니, 멀리 다른 나라에서 바람서리 맞으면서 혼자 다니실 때
그 누가 보는 것도 아니었지만 조금이라도 놓지 아니하심이 선생의 마음이시라,
이 마음을 저버리지 못하여 저 고생을 달게 여기심이 아니옵니까.
중화와 오랑케를 구분하는 화이(華夷)의 논(論)과,
명나라를 섬기는 존명(尊明)의 설(設)에 이르러는 민족의식이 분별되기 이전이라 수 백년간 내려온 전통도 있으려니와
왜적을 물리치기 급하던 때라 논리를 화이에서 끌어왔으니,
그 문자는 비록 옛것을 이었으나 왜적을 치고 국가에 충성하려는 마음이 맺은 것이니
우리는 선생의 본 마음을 깊이 헤쳐 겉 포장을 넘어 그 내포한 민족적 충성을 따라 배우고자 하나이다.
김구는 후조 고능선(後凋 高能善) 선생의 제자로
일찍부터 선생을 흠모하여 일평생 모든 일에 항상 붙들고 나아가는 정신이 있었으니,
그것은 곧 어릴 적부터 뇌리에 박힌“후손이 반드시 복수한다”는 구세필보(九世必報)의 대의(大義)라.
이제 백발로 고국에 돌아와 선생의 묘소를 찿으니 감회 어찌 새롭지 않으오리까.
한줄기 향으로 무한한 심사를 삼가 아뢰니 영령은 앞길을 가르쳐 주소서.
《도진순 譯, 『백범어록』 , 돌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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