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통제사타루비金永綬 統制使墮淚碑]
타루(墮淚)란 ‘눈물을 흘린다.’는 뜻으로 이 타루비 하나만 보더라도
당시 김영수 통제사공에 대한 백성들의 애틋한 마음을 짐작해 볼 수 있겠다.
타루비 음기(陰記)에는 崇禎紀元後 三 丙午(1786)七月 日 返櫬 旦營 士民 泣 竪碑,
五戊子 八月 日 族孫 基明改刻, 監董 前僉使 具行準, 民所任 姜基昊이라 쓰여 있어
(1786년 정조10년 7월에 세운 비석이 낡고 마모되어) 1888년 고종 25년 족손 김기명이 다시 글자를 새겼다 한다.
김기명[金基明, 헌종 12년(1846)~1910],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덕경(德卿), 호는 우춘(又春), 김용원(金龍源)으로 개명(改名)하였다. 군사공 칠양(七陽)의 16대손으로, 증조는 통정현감 영철(永喆), 조부는 호조참판 낙회(樂澮), 항일운동가 공주영장 태희(泰熙)의 아들로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고종 17년(1880) 무과 증광시 병과 10위로 급제한 후 사천현감 및 진주진관병마절제도위를 역임하던 중 1910년에 한일합방이 되었다. 공은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흘간 통곡하였고 열흘이 지나도록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리고 “깊은 골짜기에서 태어나 충(忠)을 본받지 않아 부끄러우니 선영에 들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
嘉善大夫行統制中軍金公永求 事蹟不忘碑
가선대부행통제중군김공영구 사적불망비
가선대부행통제중군김공영구 사적불망비
김영구[金永求, 순조13년(1813)~고종16년(1879)]
자는 치복(致福), 본관은 안동(安東), 요동벌에서 전사한 충무공 김응해(金應海)의 9대손으로
5대조는 통제사 김흡(金潝), 고조는 통제사 김성우(金聖遇),
증조는 길주목사 김로직(金魯直), 조부는 북병사 김수기(金守基),
아버지는 초산부사 김선명(金善命), 어머니는 오경수(吳慶秀)의 따님 정부인 해주오씨,
초배는 병사 이근식(李近植)의 따님 정부인 전의이씨,
계배는 이동식(李東植)의 따님 정부인 전의이씨이다. 관직은 북병사에 이르렀다.
[운주당(運籌堂)]
141대 김영수(金永綬) 통제사는
1786년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재임 중 통영 임소 즉,
통제영 세병관 옆 운주당(運籌堂)에서 순직하였다고 한다.
身居將梱功無補 몸이 장수 직책에 있으면서 나라에 도움을 중 티끌
신거장곤공무보
於涓埃口誦敎書 만한 도움도 없고, 입으로만 글을 외워 가르쳤네
어연애구송교서
面有慚悴於軍旅 얼굴엔 군대생활에 대하여 부끄러움이 많은데
면유참췌어군여
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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