嘉善大夫奎章閣副提學 安先生神道碑
가선대부규장각부제학 안선생신도비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산 13
기정 안종수( 起亭 安宗洙, 1849~1896.2.9.)
字 敬專경전 號 起亭기정
配位 貞夫人 平山申氏 父 신범명(申範明)의 女
1849(헌종 15)∼1896.2.9(고종 33). 조선 말기의 관리·농학자.
1881년 2월 일본시찰단인 신사유람단의 수원으로 임명되어 조사(朝士) 조병직(趙秉稷)을 수행하였다.
유람단이 귀국하면서 각 분야의 상세한 문견사건(聞見事件),
즉 보고서를 제출하여 개화정책에 도움을 주었는데,
안종수는 일본의 농학자 쓰다[津田仙]와 접촉하며농서를 구입해와서
서양의 근대농법을 처음 우리나라에 소개한 『농정신편(農政新編)』을 편찬
1885년 광인사(廣印社)에서 간행하였다.
이 책이 간행되자 조선정부는 앞장서서 이 책을 널리 유포되도록 배려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농업개량에 참고하도록 여러 차례 지시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적인 의병이 일어날 때
호남에서도 의병대장 기우만(奇宇萬)의 지휘 아래 나주의병의 조직되어
나주부관찰사는 도피하였으나
나주부 참서관(參書官) 안종수安淙洙는 거의를 저지시키고자 시도하였으나
2월 9일 나주의 아전과 군교들에게 피살된 바 있다.
을미의병은 민비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호남지역에서 을미의병은 타 지역에 비해 다소 늦게 일어났다.
동학농민전쟁의 후유증이 예상보다 컸기 때문이다.
김홍집 친일 내각의 제1차 개혁 때 210개의 법이 만들어졌을 정도였다.
조선에서는 개혁을 위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일본의 강압에 이루어진 가운데 지방제도 개혁 또한 8도에서 13도로 세분화되었으며,
나주는 전주와 남원과 함께 전라도의 관찰부로 지정되었다.
나주부의 초대 관찰사로 한기동이 임명되었고, 곧이어 채규상으로 교체되었다가
1896년 1월 다시 조한근으로 바뀌었으나 한 달이 못 되어 물러나고 말았다.
1895년 5월 29일부터 1896년 8월 3일까지 5명의 관찰사가 임명되었는데,
그 중 초대 관찰사 한기동은 두 번이나 임명되었지만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부임하지 않았다.
이처럼 관찰사의 평균 재임기간이 2-3개월 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관찰사에 의한 개화정책의 시행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학계는 보고있다.
나주부의 빈번한 관찰사 교체가 이어지자
나주부의 실권은 부관찰사에 해당하는 참서관 안종수(1849-1896)에게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안종수는 1895년 6월 20일자에 나주부 참서관으로 발령된 인물로
이듬해 1월에는 나주재판소 검사를 겸임하였다.
보수 성향이 강한 유생들이 개화파에 대한 증오가 들끓고 있는 상황에서
개화파 안종수가 나주부에서 강력한 개화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농정신편農政新編』 참서관 안종수가 집필한 최신농서로
전체 4권중 3권에 차의 재배와 가공법이 기술되 있는데 중국식과 일본식 농업기술이다.
1883년에 농상사에서는 차를 권장하게 되면서 작설차의 재배를 위한 조사를 하고
1885년에 청국의 구강도에서
차나무 모종 6,000주를 가져와 심었으므로 기술서가 필요할 것으로 추정된다.
농정신편의 저자이자 개화파 관료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가 지은 농정신편은 개항기에 근대적 농학 지식을 담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농서이다.
안종수는 호가 기정(起亭)으로
1881년 진사(進士)였던 그가
신사유람단의 일원인 조병직의 수행원으로 발탁되어 일본으로 건너가데 되는 행운을 잡는다.
짧은 일본 체류기간 동안 그는 틈틈이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농학자였던 쓰다(津田仙)를 만나
네덜란드의 농학자 호이브렌크(Hooibrenk. D)의 재배법에 대해 배웠다.
쓰다의 저술인 『농업삼사』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귀국할 때
여러가지 새로운 농업관계 서적을 많이 수집하여 돌아왔다.
이후 그는 각국의 근대 농업에 대하여 5개월 동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농서인 『농정신편』의 원고를 완성하였다.
안종수가 이 책의 원고를 탈고한 때는 아마도 1881년 12월이었지만,
이 원고가 광인사에서 책으로 간행된 때는 1885년(고종 22)이었다.
이 책이 간행되자 조선정부는 앞장서서 이 책을 널리 유포되도록 배려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농업개량에 참고하도록 여러 차례 지시하였다.
귀국한 뒤 안종수는 ‘통리교섭통상아문’의 주사로 근무하다
1884년의 12월에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에 참여하였다.
조국의 근대화를 앞당길 절호의 기호로 믿었던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뒤,
안종수는 개화당으로 몰려 충남 서산군 해미 부근의 섬인 마도로 유배되었다.
그후 그는 1894년의 갑오개혁 때에 개화파의 일원으로 석방되어 여러 지역을 돌면서 지방관을 역임하다
1895년 6월 나주부 참서관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2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조선말기에 개화를 위하여 일본에 파견된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중 하급관리인 안종수는
당시 국가적 산업이 바로 농업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새 농서 편찬은 곧 농업의 부흥을 통한 부국강병, 즉 농학적 측면의 애국 개화운동 이었다.
이러한 안종수의 극적인 일생은 우리 개화운동의 운명과 더불어 더욱 비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가 남긴 『농정신편』만은 농학 및 경제 문헌으로서 우리 역사에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廣州安氏洪州派宗家墓域
광주안씨홍주파종가묘역
조부 통덕랑 안태원(安泰遠)
부친 선공감조관 안석우(安錫瑀)
규장각부제학 안종수(安宗洙)
자 변호사 안병태(安秉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