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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연복사탑중창비演福寺塔重刱碑, 연복사탑중창지기, 서울시유형문화재 제348호

구름에 달

by 碧巖 2018. 12. 30.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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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복사 탑 중창비

 

演福寺 塔 重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348

서울 용산구 한강로 340-1010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에는 1,000여칸 규모의 대형 사찰인 연복사(演福寺)가 있었다.

연복사(演福寺)에는 3개의 연못과 9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연복사(演福寺) 남쪽에는 풍수설에 따라 5층의 목탑을 세웠는데

유호인의 <명산답사기>

'우뚝 선 5층 누각이 성중을 압도하고 있는 창문과 기왓장에 저녁놀이 비친다'고 표현돼 있다.

 

이성계(李成桂)에 의해 다시 세워졌던 연복사(演福寺) 탑은 1563년에 소실됐지만

연복사 탑 중창비(演福寺塔重刱碑)는 조선 후기까지도 원형대로 남아 있었다.

연복사 탑 중창비(演福寺 塔 重刱碑, 演福寺 塔 重刱碑)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공덕으로 재건된 연복사(演福寺)오층불탑의 건립내력을 담은 비석이다.

비록 비신 부분은 망실되었으나 귀부와 이수 부분만은 온전하게 옛 절터에 남겨졌는데,

일제강점기인 1910년 서울 용산의 철도구락부(鐵道俱樂部) 구역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연복사 탑 중창비(演福寺塔重刱碑)가 용산 일대로 이전된 경위에 대하여는

경의선 철로가 지나는 구역과 맞물려 있고 개성역(開城驛)과도 상당히 인접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

연복사 탑 중창비(演福寺塔重刱碑) 또한 경의철도(京義鐵道)의 부설관련으로 이전됐을 가능성이 있다 한다.

연복사 탑 중창비(演福寺塔重刱碑)는 현재 비신은 없어졌으나

비문은 권근(權近)이 짓고 글씨는 성석린(成石璘)이 필체를 새긴 조선 초기의 귀중한 문화재이다.

이 석비는 삼국 통일기에 중국 당()대의 석비 양식을 들여와 통일신라시대에 전형을 이룬 후

고려시대까지 계승된 한국 전통 석비양식이 고려의 멸망과 함께 멈추고 조선의 건국과 함께 새로이 수용되는

중국 명()대의 석비 조형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 귀부의 표현 자체가 매우 상징적이고

이수 부분도 중국 전통을 따라 반원형의 비신 상부에 오각형의 제액을 내고

그 주위를 여러 마리의 용이 휘감는 형상을 하고 있다

 

 

 

 

 

 

 

 

 

 

 

 

 

 

 

                                            演福寺塔重剏止記 연복사탑중창지기

 

 

 

 

 

 

 

 

 

 

 

 

 

 

開城 演福寺塔重剏碑文

개성 연복사탑중창비문

演福寺塔重剏之記題額)

(螭首高四尺幅四尺一寸題額縱二尺二寸橫一尺三寸字徑三寸篆書

佛氏之道以慈善喜捨爲德以報應不差爲驗其言極濶大譯傳中國覃及四海緜歷千禩愈久而愈熾上自王

公大臣下逮夫婦之愚希冀福利靡不崇信寺院塔廟之設巍嶪相望彌天之下吾東方自新羅氏之季奉事尤

謹城中僧廬多於民屋其殿宇之宏壯峻特者至于今尙存一時崇奉之至可想見矣高麗王氏統合之初率用

無替以資密佑廼於中外多置寺社所謂裨補是己演福實據城中闤闠之側本號唐寺方言唐與大相似亦謂

大寺爲屋最鉅至千餘楹內鑿三池九井其南又起五層之塔以應風水其說備載舊籍玆不贅陳王氏享國五

百年屢更喪亂寺之興廢殆非一次此塔之壤不知的在何時至恭愍王欲營之而未就有狂僧長遠心者夤緣

權貴擾民伐材卒亦罔成恭讓君賴將相之力復祖宗之緖卽位以來事佛益力爰命僧天珪等募工興役辛未

二月始事掘舊址塡木石以固厥基迄今乃竪縱橫六楹克壯且廣累至五層覆以扁石將訖厥功憲臣有言而

中輟惟我 主上殿下以神武之資獲天人之應奄膺大寶誕主民社至仁好生大德育物群賢勵翼治道熙隆

百弊皆革萬化俱新凡可以裕國惠民之政靡所不擧以佛之道慈悲愛物可利邦國崇揚之法因守不廢其所

以創始而樹鴻規貽謀而垂後裕者可謂宏且備矣於是董工益勤功乃吿成實申壬冬十有二月也癸酉之香

塗塈丹臒翬飛雲表鳥翔天際金碧炫燿輝暎半空上安佛舍利中庋大藏下置毗盧肖像所以資福邦家永利

萬世也夏四月設文殊會以落厥成 上命臣近記其始末臣近聞浮屠之說樹塔所以表德隨其層數多寡報

以明德之高下也五層以上是佛塔也其言功德報應之說極爲宏博故自阿育王而後歷代尊信締構之無己

也然梁達摩答武帝造寺造塔之問以爲片無功德盖爲武帝不修心而費財力發也今則財不出編戶力不煩

農民其爲功德豈易量哉功德旣勝報應益彰天人交慶幽明共賴推利澤於無窮緜景祚於罔極與國咸休萬

世彌固信可期也臣近拜子稽首而獻詞曰

浮屠之說興西域流傳四海因華譯其言報應甚宏博上下靡不勤祈福塔廟之設何巍嶪彌天之下遍六合新

羅奉事最誠篤王氏遵守更無斁演福寺在闤闠側中有三池九井鑒其南有塔五層閣不知何代乃頹壓累世

重營竟不克運祚將衰焉可得惟我 聖君有大德天與人歸膺曆服萬化俱新百弊革亦資佛敎利邦國五層

復建畢工役經構不擾農民力崢嶸突兀配松嶽輝暎雲霞燿丹碧上安佛骨厥靈赫中庋大藤具萬軸下置毗

盧備嚴飾功德最盛甚饒益 聖君萬年奉宗祐景祚綿延千世億普令群生霑利澤命臣作詞刻諸石臣詞蕪

茁不可讀但願此塔無顚覆與國鞏固垂罔極

 

연복사탑 중창기

 

부처의 도()는 자비(慈悲)와 희사(喜捨, 기쁘게 베풂)를 덕으로 생각하고,

인과응보가 틀리지 않는 것을 증험으로 삼는다.

부처의 말은 지극히 넓어 크게 번역되어 중국에 전해지고 사해에 미쳐 천년을 이어 와 오래될수록 더욱 성하였다.

위로는 왕공 대신(王公大臣)으로부터

아래로는 어리석은 남녀에 이르기까지 복과 이익을 희구하여 숭상하여 믿지 않는 이가 없다.

사원과 탑과 묘당의 시설이 우뚝우뚝 높이 솟아 서로 바라보며 천하에 가득 찼다.

우리 동방은 신라 말부터 부처를 받들어 섬김이 더욱 공손하여 성중의 절이 민가보다 더 많을 정도였고,

그 법당 건물의 웅장하고 우뚝한 것은 지금까지 아직 남아 있을 정도이니,

그 당시의 존숭함이 지극하였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고려는 왕씨(王氏)가 나라를 통합하던 초기부터 신라를 그대로 따라 고치지 아니하여,

은밀한 도움이 되도록 하여 서울과 지방에 절을 많이 설치하였으니,

이른바 비보사찰(裨補寺刹, 국토의 형세에 따라 절을 세워 모자람을 보충하는 절)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연복사(演福寺, 고려시대에 개경에 있던 큰 절)는 실로 도성 안의 시가(市街)의 곁에 자리잡고 있는데

본래의 이름은 당사(唐寺)이다.

방언에 당()과 대()는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당사는 또한 대사(大寺)라고도 부른다.

집이 가장 커서 천여 칸이 넘는다.

안에 3개의 연못과 아홉 개의 우물을 팠으며 그 남쪽에 또 5층의 탑을 세워서 풍수설에 맞추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옛 서적에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덧붙이지 않는다.

왕씨가 나라를 향유한 5백년 동안에 여러 번 전란과 변고를 겪어서 이 절이 흥하고 폐함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이 탑이 파괴된 것이 정확하게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이르러 조성하려 하였으나 성취하지 못하였으며,

뒤에 미친 중 장원심(長遠心, 조선 태종 때 활동한 천민 출신 승려로서 거짓 미치광이가 되어 굶는 사람에게는

밥을 빌어다 먹이고 옷을 벗어 주며, 병든 자는 힘을 다해 고쳐주고, 도로와 다리를 고치는 등

봉사 활동을 열심히 하여 아이들도 다 그 이름을 알았다고 함. 태종실록에는 長願心으로 나옴)이라는 자가 있어

권력 있는 자와 귀한 사람들에게 연줄을 대어 백성을 번거롭게 하여 재목까지 베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공양왕(恭讓王)이 장수와 재상의 힘을 입어 조종(祖宗)의 왕업을 회복하고 즉위한 뒤부터

부처 섬기기를 더욱 힘쓰더니 이에 승려 천규(天珪)등에게 명하여 공인과 장인을 모집하여 공사를 시작하였다. 신미년(공양왕 3, 1391) 2월에 일을 시작하였으니

옛터를 파헤치고 나무와 돌을 메워서 그 기초부터 견고하게 하였다.

지금에 이르러 가로 세로 여섯 칸을 세우니 크고도 넓었다. 층수는 5층에 이르고 평평한 돌로 지붕을 덮었다.

장차 준공하려 하는데 헌신(憲臣)의 간언이 있어서 중지하였다.

그 때 우리 주상 전하(조선의 태조 이성계를 가리킴)께서는

모든 조정의 관원을 통솔하는 지위에 계시면서 공사의 준공을 청하였다.

오래지 않아 공양왕이 임금의 도()를 실추하고

스스로 왕위를 물려주니 대명(大命, 천명)이 전하에게 모이었다. 이하는 글이 없어졌다.

삼가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신무(神武)한 자질로써 하늘과 인심의 호응을 얻고,

문득 왕위에 올라 크게 인민과 사직을 주재하여 지극한 어진 마음으로 살리기를 좋아하고,

큰 덕으로 만물을 육성하며 여러 어진 이들이 힘써 보필하니 다스리는 도는 밝고 높아 온갖 폐단은 모두 고쳐지고

온갖 교화는 모두 새로워지니,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에게 은혜를 줄 수 있는 정사는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부처의 도가 자비롭게 만물을 사랑하는 것이므로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숭상하는 법을 그냥 지키고 폐지하지 않았으니,

창업의 벽두에 훌륭한 법을 세우고, 자손을 위한 계책을 남겨 후손에게 전한 것이 크고도 갖추어졌다 할 만하다.

이에 공사를 더욱 부지런하게 독려하여 드디어 공사의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실로 임신년(조선 태조 원년, 1392) 12월이었다.

계유년(태조 2, 1393) 봄에 단청을 장식하니 집의 아름답고 훌륭함이 구름 밖에 날아가는 것 같고,

새가 하늘에 비상하는 것 같아 황금빛과 푸른 색채가 눈부시게 빛나서 반공(半空)에 번쩍였다.

위에는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고 중간에는 대장경을 모셨으며 아래에는 비로자나(毘盧遮那)의 초상을 안치하니,

국가를 복되게 하는데 이바지하고 길이 만세에 이롭게 하려고 한 것이다.

4월 문수회(文殊會)를 열고 낙성식을 올려, 임금이 신()권근(權近)에게 명하여 그 시말을 적으라고 하셨다.

신이 요사이 삼가 부처의 말을 들으니,

탑을 세우는 것은 공덕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 층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공덕의 높고 낮은 것을 밝히는 것으로서, 5층 이상은 불탑인데 그 공덕(功德)과 보응(報應)의 설()은 지극히 크고 넓기 때문에

아육왕(阿育王, 인도의 고대 왕. 불교를 보호한 대표적인 국왕으로 꼽힘) 이후로

역대의 임금들이 높이 존숭하여 탑을 끊임없이 세웠다고 하였다.

러나 양나라 때에 달마

(達摩, 중국 선종의 시조. 양나라에서 수도하다 소림사로 옮겨 9년 동안 면벽 수도하여 선종을 엶)

무제(武帝, 중국 남조 양나라의 왕. 불교를 좋아하여 사원 건립과 불사 등을 크게 장려함)의 절을 짓고

탑을 짓는 일을 물은 것에 대한 대답에는 한 조각의 공덕도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무제가 마음은 닦지 않고 재력(財力)만 소비하였기 때문에 한 말이다.

지금 연복사의 탑 건립에 재물이 민가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인력은 농민을 번거롭게 한 것이 아니니 그것이 공덕됨을 어찌 쉽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공덕이 이미 뛰어나니 응보는 자연히 드러날 것이다.

천명과 인심이 번갈아 경축하여 죽어서나 살아서 함께 힘입고,

복리와 은택을 영원 무궁하게 미루어 주고 큰 행복을 끝이 없도록 이어서,

나라와 더불어 아름답고 만세에 이르도록 더욱 견고할 것을 진실로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 권근(權近)은 공수배를 올리고 가사(歌詞)를 바침니다.

 

불교의 가르침이 서역에서 일어나

사해에 전해져 중국말로 옮겨졌네.

그 말하는 인과응보가 몹시 크고 넓어

위아래 모두 부지런히 복을 빌지 않는 이 없네.

탑과 절을 세움이 어찌 그리 높고 큰가

하늘 아래 가득 차고 사방에 두루 했네.

신라의 받들어 섬김 가장 정성스럽더니

왕씨 고려도 그대로 지켜 다시 고치지 않았네.

연복사는 성안에 마을 곁에 있는데

안에는 연못이 셋 우물이 아홉이라네.

남쪽에 5층 누각 탑이 있더니

언제 무너졌는지 알 수가 없네.

여러 대에 중창하려다 끝내 이루지 못하니

하늘의 운과 복이 쇠해짐을 어찌하리.

우리 성스러운 임금 큰 덕이 있어

천명과 인심이 돌아가 임금 자리를 받았네.

모든 교화 새롭게 하고 온갖 폐단을 고쳐

불교에 이바지하고 나라를 이롭게 하시네.

5층탑을 다시 세워 공사를 마치니

농민의 힘을 번거롭게 하지는 않았네.

높다랗고 우뚝함은 송악과 짝하는데

구름과 놀이 비추고 단청이 눈부시네.

위에는 사리를 봉안하여 영험이 빛나고

중간에는 대장경 만 축을 갖추었으며

아래에는 비로자나를 안치하여 장엄해

공덕이 가장 크니 복록이 많으리.

성군께서 만년토록 종묘사직을 받들어

천세 억세를 면면히 이어 가서

널리 뭇 중생들 복과 은택에 젖게 하리.

신에게 명하시어 사를 지어 돌에 새기라시는데

신은 사가 거칠고 서툴러 읽을 수가 없구나!

다만 원컨대 이 탑이 스러지지 않아

나라와 더불어 튼튼하게 끝없이 이어가소서!

 

 

 

벽암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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