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창위 양효공 안맹담(延昌尉 良孝公 安孟聃), 정의공주(貞懿公主)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0호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3-1
양효공 신도비는 세조 12년(1466) 7월에 세운 것으로
화강석 귀부(龜趺) 위에 이수(賂首)가 새겨진 대리석 비신(碑身)이 세워져 있다.
이수는 한가운데에 여의주를 놓고 쌍룡(雙龍)을 틀어 조각하였으며 귀부 또한 조각이 정교하다.
비문은 당시 정난공신 하동부원군 정인지(鄭麟趾)가 찬하였고
두전(頭篆)과 글씨는 안맹담의 넷째 아들인 안빈세(安貧世)가 썼다.
연창위 양효공 안맹담
延昌尉 良孝公 安孟聃
본관은 죽산(竹山). 字는 덕수(德壽).
증조부 안극인(安克仁)고려공신으로 중대광우문관대제학(重大匡右文館大提學)역임, 봉 죽성군, 시 문정공(文貞公) .
안극인의 딸은 공민왕의 비인 정비(定妃).
조부 안숙로(安淑老) 조선왕조 평양부윤(平壤府尹), 안숙로의 딸은 우왕의 비 현비(賢妃)로 책봉.
아버지 안망지(安望之) 함흥부윤(咸興府尹)역임,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 허지신(虛之信)의 딸과 혼인하여 안맹담(安孟聃)을 낳았다.
배위는 세종 둘째딸 정의공주(貞懿公主)로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안맹담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명문가 출신으로, 1428년(세종 10) 정의공주와 혼인,
부마가 되어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지고 숭정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이 때 할아버지 안숙로와 아버지 안망지는
각각 정헌대부 이조판서, 숭정대부 의정부 찬성에 추증되었으며,
할머니 황씨(黃氏)와 어머니 허씨 또한 각각 정부인과 장신택주(莊信宅主)에 봉해졌다.
세종은 안맹담과 정의공주의 집에 수차례 이어(移御)하였을 정도로 이들 부부를 아꼈다.
1432년(세종 14)에는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졌고,
1442년(세종 24)에 숭록대부, 1444년(세종 26)에 관제 개편으로 광덕대부(光德大夫)가 되고,
1450년(문종 즉위) 종실과의 구별로 각 부마를 위(尉)라 개칭하기로 하였으므로 이후 연창위(延昌尉)라 불리었다.
1453년(단종 11) 성록대부(成祿大夫), 1457년(세조 3) 수록대부(綏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워 좌익 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신도비문의 기록에 의하면 1457년 8월에 공신녹권(功臣錄券)을 하사받았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아버지 안망지는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 허씨에게도 정경대부인의 봉호가 더해졌다.
평소 초서에 능하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였으며, 음률(音律)에도 통달하여 풍류에 밝았던 것으로 보이며,
남에게 약방을 지어줄 정도로 약물(藥物)에도 해박하였으며, 불교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1462년(세조 8) 48세의 나이로 졸하여, 이듬해 2월 25일 양주 도봉산 해촌동(海村洞) 묘원에 묻혔다.
안맹담의 묘갈에는 ‘수록대부연창위 시양효공안맹담지묘(綏祿大夫延昌尉諡良孝公安孟聃之墓)’,
정의공주의 묘갈은 전면에 ‘정의공주지묘(貞懿公主之墓)’,
후면에 ‘성화 13년 2월 11일 졸 3월 초5일 장(成化十三年二月十一日卒三月初五日葬)’이라 되어 있다.
綏祿大夫延昌尉 諡良孝公安孟聃之墓
수록대부연창위 시양효공안맹담지묘
貞懿公主之墓
정의공주지묘
정의공주貞懿公主
조선의 제4대 왕 세종의 둘째 딸로,
어머니는 소현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이다.
조선의 제5대 왕 문종의 누이동생이자 제7대 왕 세조의 누나가 된다.
1428년(세종 10) 정의공주(貞懿公主)에 봉해지고,
고려 말 조선 초 명문 함흥부윤을 역임한 안망지(安望之)의 아들 안맹담(安孟聃)과 혼인하여
안맹담은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졌으며, 4남 2녀를 두었다.
세종은 정의 공주와 안맹담의 집에 수차례 이어(移御)하였을 정도로 이들 부부를 아꼈는데,
여기에는 정의공주의 뛰어난 재주가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동생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계유정난으로 죽음을 당한 것에 반해
정의공주의 남편 안맹담은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워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녹훈된 바 있다.
1462년(세조 8) 안맹담이 세상을 떠난 후 명복을 빌기 위해
1469년(예종 1) 정의공주는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보물 966호]을 간행하였다.
안맹담 또한 불교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1477년 졸하여 남편 안맹담 옆에 자리잡았다.
연창위 안맹담 정의공주 후경
증조부 죽성군 문정공 안극인(文貞公 安克仁),--안극인의 딸은 공민왕의 비인 정비(定妃)
할아버지 평양부윤 안숙로(安淑老)---------- 안숙로의 딸은 우왕의 비 현비(賢妃)
아버지 함흥부윤 증 의정부 우의정 안망지(安望之)
어머니 증 정경대부인 하양허씨, 봉상시주부 허지신(虛之信)의 따님
연창위 양효공 안맹담(延昌尉 良孝公 安孟聃)
정의공주貞懿公主-세종의 둘째 딸
장남 상호군 안여달(安如獺)
손자 안원경(安元卿)
차남 안온천(安溫泉)
손자 통례원찬의 안방언(安邦彦)
삼남 돈녕부도정 수원부사 전은 안상계(田隱 安桑鷄)
손자 안방열(安邦烈)
증손자 종사랑 안백균(安伯均)
손자 사헌부감찰 안방형(安邦炯)
증손자 종친부전첨 안종전(安從㙉)
사남 안빈세(安貧世)
손자 안처성(安處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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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목사 안종해 淸州牧使 安宗海 (연창위 양효공 11대손)
청주목사 수와 안종해(睡窩 安宗海)
1681(숙종 7)∼1754(영조 30).
본관은 죽산(竹山). 字는 조경(朝卿). 號 수와(睡窩)
증조부는 예조참판 안진(安縝)이고,
조부는 세자익위사부솔(世子翊衛司副率) 안상억(安相億)이며,
아버지는 좌승지에 증직된 안윤적(安允廸)이다.
1715년(숙종 41)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726년(영조 2) 천거로 광릉참봉에 보임된 뒤, 여러 직을 거쳐 공산현감으로 나갔다.
이 때에 흉년과 질병으로 굶주린 백성과 여러 가지 질병과 기아로 죽은 자가 속출하자,
구휼·안집(安集)에 진력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그 뒤 공조좌랑에 이어 1734년 옥천군수로 재직시에
청렴하지 못하다는 혐의를 받고 삭직되었다가 바로 사도시첨정( 등을 지냈다.
면천군수로 복임하여 고을에 행패를 부린 토호의 작태를 근절시켰으며,
1741년 승진하여 청주목사로 나아갔으나 헌납(獻納) 권현(權賢)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어사 윤득재(尹得載)가 면천을 지나다가 토호의 말을 듣고 안종해를 투옥시켜,
용전역(龍田驛)에 유배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通訓大夫淸州牧使竹山安公宗海之墓 淑人坡平尹氏祔
통훈대부청주목사죽산안공종해지묘 숙인파평윤씨부
//죽산안씨 청주목사 수와 안종해(睡窩 安宗海) 가계//
11대조 연창위 안맹담 延昌尉 安孟聃
10대조 돈녕부도정 수원부사 전은 안상계(田隱 安桑鷄)
9대조 봉렬대부 사헌부감찰 안방형(安邦炯)
8대조 수군절도사 안종탄(安從坥)
7대조 사직 안언추(安彥錘)
5대조 첨지중추부사 안경렴(安景濂)
5대조 군수 증 이조판서 안대남(安大枏)
고조부 증 좌찬성 안정섭(安廷燮)
증조부 예조참판 안진(安縝)
조부 증좌승지 안상억(安相億)
부친 증좌승지 안윤적(安允迪)
청주목사 수와 안종해( 睡窩 安宗海)
장남 안식(安栻)
차남 대사간 병조참의 안표(安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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