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서악동 귀부(慶州 西岳洞 龜趺)
보물 제70호
경북 경주시 서악동 1006-1
경주 서악동 귀부(慶州 西岳洞 龜趺)
《삼국사기》의 기록이나 서악서원의 영귀루 북쪽 받침에서 찾아낸 비석 조각에 새겨진 글로 미루어,
문무왕의 친동생인 김인문(629∼694) 공적비의 받침돌인 것으로 짐작하고 있으며,
서악동 귀부는 김인문이 사망했을 당시인 통일신라시대 7세기 후반에 비석과 함께 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김인문金仁問 묘 경상북도 기념물 제32호
김인문金仁問
629(진평왕 51)∼694(효소왕 3)
字는 인수(仁壽).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며, 문무왕의 친동생이다.
660년 나당연합군을 조직해 당군 부사령관인 신구도부대총관으로
사령관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백제 정벌에 나섰다.
기벌포에서 백제군을 격파했고, 7월에는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65년 당나라에 가서 우요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이 되었고, 668년 대당총관이 되어 북진을 시작했다.
674년 당 고종은 대당항쟁을 하던 문무왕의 관직을 박탈하고
김인문을 계림주 대도독 개부의동삼사(鷄林州大都督開府儀同三司)에 임명하여
신라왕에 봉하고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대총관(鷄林道大摠官)으로 삼아 신라로 쳐들어왔으나,
문무왕이 형식상 사죄사(謝罪使)를 보내어 사태를 수습했다.
그후계속 당나라 수도에 머물렀고 679년 진군대장군 행우무위위대장군(鎭軍大將軍行右武威衛大將軍),
690년(신문왕 10)에 다시 보국대장군 상주국 임해군 개국공 좌우림군장군
(輔國大將軍上柱國 臨海君 開國公 左羽林軍將軍)이 되었다.
694년(효소왕 3) 4월에 당나라 수도에서 졸하여, 신라에 안치되었다가,
효소왕으로부터 태대각간(太大角干)에 추증되고, 이듬해 경주서원(西原)에 장사지냈다.
김양묘와 김인문 묘
김양 金陽 (808~857)
경상북도 기념물 제33호
태종 무열왕의 9세손으로
1061년(문종 15)에 태자좌우서자(太子左右庶子)가 되었다가 곧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승진하였다.
1067년 병부상서로 있을 때
흥왕사(興王寺)가 12년 동안의 역사 끝에 완공되어 왕이 낙성재(落成齋)를 베풀고자 하였는데,
각 지방의 승려들이 수없이 몰려들었으므로
김양은 왕명을 받들어 우가승록(右街僧錄) 도원(道元) 등과 함께 계행(戒行)이 있는 자 1천명만을 참석하게 하고,
이들을 그 절에 상주시켰다.
그 뒤 1072년에 공부상서(工部尙書)가 되었고, 1075년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제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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