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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태종무열왕릉-사적 제20호, 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국보 제25호

구름에 달

by 碧巖 2019. 1. 27.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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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 太宗武烈王

경북 경주시 서악동 842

사적 제20





경주 태종무열왕릉비(慶州 太宗武烈王陵碑)

국보 제25

 

귀부(龜趺) 길이 약 3.33미터, 2.54미터, 이수(螭首)높이 약 1.1미터이다.

비신(碑身)은 없고 귀부와 이수만이 있는데, 귀부는 장방형의 기석(基石) 위에 얹혀 있다.

이수에 여섯 마리의 용()이 서로 능을 향해 구부리고 있으며

이수 중앙에는 김인문(金仁問)의 글씨로 전하는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이

전서(篆書)로 양각되어 있다.




태종무열왕 太宗武烈王

603(진평왕 25)661(문무왕 1). 신라 제29대왕.

김춘추(春秋).

진지왕의 손자로 이찬(伊飡) 김용춘(龍春 또는 龍樹)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으로 진평왕의 딸이며,

비는 문명부인(文明夫人)으로, 각찬(角飡) 김서현(金舒玄)의 딸, 즉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동생 문희(文姬)이다.

진덕여왕을 섬겨서 관등이 이찬에 이르렀으며,

진덕여왕이 졸 하였을때 여러 신하들이 왕위계승자로서 상대등 알천(閼川)을 천거하였다.

그러나 알천이 자신의 늙음과 덕행의 부족함을 들어 사양하며 그 대신 김춘추를 천거하였다.

이에 김춘추가 추대를 받아 즉위하여 신라 중대왕실(中代王室)의 첫 왕이 되니 당시 나이가 52세였다.

김춘추(金春秋, 604~661)는 왕이었지만

왕호인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라 불리지 않고 일반 사람의 이름인 김춘추라 불린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두 가지다. 김춘추는 왕손이었지만 왕자가 아니면서 왕위에 올랐다.

또 성골만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제도를 뛰어넘어 진골로서 왕위에 오른 최초의 신라 왕이었다.

김춘추의 할아버지는 진지왕이다.

진지왕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정치를 그르쳤다는 죄목으로 쫓겨난 뒤 곧바로 죽었다.

그 뒤를 이은 진평왕은 그의 외할아버지이자 큰아버지가 된다.

김춘추는 이처럼 왕손의 혈통을 받았지만 할아버지의 잘못으로 인하여 그저 귀족의 대우를 받는 처지였다.

그러나 김춘추는 용모가 뛰어나고 행동거지가 신중했으며, 왕족의 풍채까지 갖췄다.

그는 성장하면서 왕실과 귀족 사회에서 두루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큰 뜻을 품고 왕위를 넘보는 한편 삼국통일을 이룩할 야망도 키워 나갔다.

진골의 신분으로 이런 당찬 꿈을 키우게 된 데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김춘추는 진덕여왕이 죽은 뒤에 화백회의에서 섭정으로 추대되었다.

무열왕은 즉위하던 해에  아버지 용춘을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어머니 천명부인을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추증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개정하는 등의 율령정치(律令政治)를 강화하였다.

655(태종무열왕 2)에 원자(元子)인 법민(法敏)을 태자에 책봉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다.

한편, 아들 문왕(文王)을 이찬으로, 노차(老且 또는 老旦)를 해찬(海飡)으로, 인태(仁泰)를 각찬(角飡)으로,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각각 이찬으로 관등을 올려줌으로써 자기의 권력기반을 강화시켰다.

 

656년에는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김인문(金仁問)을 군주(軍主),

658년에는 당나라에서 귀국한 문왕을 집사부 중시(中侍)에 임명하여 직계 친족에 의한 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659년에는 백제가 자주 신라의 변경지방을 침범하므로 당나라의 군사를 청해

660년부터 본격적인 백제정벌을 추진하였다.

3월에 소정방을 비롯한 수륙(水陸) 13만명이 백제를 공격하여,

5월에 왕은 태자 법민과 유신·진주(眞珠천존(天存) 등과 더불어

친히 정병(精兵) 5만명을 이끌고 당군의 백제공격을 응원하였다.

7월에는 김유신이 황산벌黃山之原전투에서 계백(階伯)이 이끄는 5,000명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당군과 연합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켰으며, 이어서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했던

의자왕과 왕자 부여 융(扶餘隆)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이는 신라의 숙원이던 백제를 병합함으로써 반도통일(半島統一)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사비성 함락 후,

9월에 당나라는 유인원(劉仁願)1만명과 김인태(金仁泰)7,000명의 군대로 하여금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10월에 태종무열왕은 친히

백제지역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이례성(尒禮城 : 지금의 충청남도 論山) 20여 성의 항복을 받았다.

재위한지 8년 만에 졸하니 59세였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며, 묘호(廟號)는 태종(太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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