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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오산 만회정(鰲山 晩悔亭), 만회당 박취문(晩悔堂 朴就文), 반오헌 박계숙(伴鰲軒 朴繼叔,달성인 서장성(徐章聲)

구름에 달

by 碧巖 2019. 2. 8.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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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오산 만회정(鰲山 晩悔亭)

울산광역시 중구 태화동 664번지, 636번지

 

 

울산 태화강변에 있는 만회정’(晩悔亭)만회당(晩悔堂) 박취문(1617~1690)선생이

1600년대 말 건립한 것으로 학성지등에 전해지고 있으며 조선 말기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울산시는 지난2011년 태화강대공원의 내오산에  팔각지붕의 만회정 건립을 완료했다.

 

만회정 현판은 박계숙(朴繼叔박취문(朴就文) 부자가 작성한

부북일기(赴北日記·울산시 유형문화재 제14) 에서 집자(集子)하여 만들었다.

만회정은 박취문 선생(1617~1690)이 낙향 후 1600년대 말에 내오산에 건립한 정자로,

1800년대까지 이어지다 조선말기에 소실된 것으로 전해진다.

 

울산 최초 읍지인 학성지(鶴城誌, 1749)

 "내오산은 태화진의 서쪽 수리(數里)쯤에 있다. 작은 언덕이 강에 닿아 있고 경치가 그윽하며 묘하다.

만회정이 있는데 부사 박취문(朴就文)이 지은 것이다.

정자의 앞에는 가늘고 긴 대숲이 몇 무()가 있고

아래에는 낚시터가 있으며 관어대(觀魚臺)라는 3글자를 새겨 놓았다"고 만회정의 조성 연혁을 전한다.

 

 

박계숙朴繼叔(1569(선조 2) 1646(인조 24))

만회당 박취문(晩悔堂 朴就文)의 아버지로

비윤丕胤, 반오헌(伴鰲軒),   임란창의의사

선조 27년 임진왜란중 26세에 무과 급제

선전관 훈련원 부정(宣傳官 訓練院 副正)의 관직을 거쳐 자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박취문朴就文(1617(광해군 9) 1690(숙종 16))

는 여장汝章, 는 만회당晩悔堂

인조 22년  28세에 무과급제, 그 해 겨울 신출한 자격으로 군역에 부방하였다.

그후 선전관을 거쳐 경상좌도 병영과 수영의 우후虞侯, 훈련원 부정을 지냈으며,

지방관으로 안동, 갑산, 김해, 부령 등지의 수령도 역임하였다.

본인의 만회실기晩悔實記와  

아버지인 반오헌 박계숙의 부방일기(赴防日記)와 본인의 부방일기를 모아서

부북일기(赴北日記)를 남겨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였다.

 

 

조선시대 선조~인조대에 무과에 급제한 울산 출신 박취문(朴就文) 부자가 남긴 부북일기(赴北日記)’에 따르면

관어정은 만회당晩悔堂 박취문朴就文의 개인정자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관어정은 達城人 서장성(徐章聲)의 소유로 바뀌었으며, 서장성은 관어정 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관어정 아래 바위에 새겨진 서장성의 시 한수로 보다 명확하게 전해지고 있다.

 

生長末亭 老終鰲山  태어난 곳은 말정이요, 늙어 (생을) 마감하는 곳은 오산이라

淸江十里  綠竹千年  맑은 강(태화강)은 십리에 이르고, 초록 대나무는 천년을 살겠지

佳城一竗 精舍數間  집 둘레는 한 이랑, 집은 두서너 칸

歲月雖遠 口碑尙傳  세월이 비록 흘러도 입으로 남긴 비()는 전해지겠지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서장성의 집은 불어난 태화강에 휩쓸려 사라지게 됐으며,

그 후손들이 집이 있던 자리에 묘소를 썼다.

그리고 오산은 현재까지 서장성의 후손인 달성 서씨 문중 소유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으며,

특이한 점은 묘자리가 오산 전체 지형으로 볼 때 자라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으로

자라 머리 부분은 비석을 세우지 않는다는 전설에 따라 이곳에는 묘만 전할 뿐 비석이 없다고 한다.

 

 

 

태화강 십리대밭

 

 

 

에코폴리스 울산 선언

흔히 십리대숲이라 불리는 이곳의 정확한 명칭은 오산(鰲山)대밭이라고 알려져 있다.

오산이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 자라 모양을 띤 이곳의 지형은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에 속한다.

그리고 오산대밭처럼 큰 규모의 것은 전국에서도 유례없는 것으로 꼽히고 있다.

울산향교 서진욱 전교장에 따르면

일제시대 때 홍수가 나서 태화강이 범람했고, 그 일대 전답이 모두 백사장으로 변해 묵전이 되고 말았다.

이 때 북정동에서 살던 오까다 죠베에라는 일본인이 묵전에 눈독을 들여 모래밭에 책상과 의자를 차려 놓고

버려진 땅을 헐값에 사 들이기 시작했고, 그 땅을 대나무밭으로 만들었더니 그 둘레가 약 4km에 이르렀다.

그리고 당시 신정동에 사는 이모 씨도 강변 하천부지를 점용해 대를 심었고,

그 주위의 경작자들도 다투어 강의 좌우로 대나무를 심으니

지금처럼 10리나 되는 죽림이 형성돼 오산대밭, 현재의 십리대밭이 되었다고 한다.

 

 

 

 

 

생부 무안현감 박홍권(朴弘權)

양부 기장현감 박홍춘(朴弘春)

        반오헌 박기숙(伴鰲軒 朴繼叔) 자헌대부지중추부사

                자 만회당 박취문(晩悔堂 朴就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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