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황남동 효자 손시양 정려비
慶州 皇南洞 孝子 孫時揚 旌閭碑
보물 제68호
경상북도 경주시 포석로 1068번길 12 (황남동 240-3)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비문이다.
1182년(고려 명종12년)에
고려시대 사람인 손시양(孫時揚)의 효행을 표창하는 정문(旌門)을 설치하게 된 내력을 적고 있다.
손시양은 부모가 돌아가신 뒤 각각 3년간 묘소 옆에 여묘(廬墓)을 지어놓고 곁을 지켰다 한다.
당시 동경유수(東京留守) 채정(蔡靖)이 왕에게 그의 효행을 글로 적어 올려대로
비문은 채정(蔡靖)이 지었으며 마을에 정문을 세우게 되었으며,
비 앞면에 글자 크기가 30cm나 되는 해서로 '孝子里'(효자리)라는 글자가 깊게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글자지름 4.5cm로 5행 130자의 해서체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는 비몸만 있을 뿐 아래의 받침돌과 위의 머릿돌은 없다.
이 정려비는 고려시대에 건립된 일반적인 비의 형식과 달리 사각기둥 모양으로,
고려시대에 불교와 관련되지 않은 비문으로서 희귀한 자료이다.
길가에 서있던 것을 1977년 받침을 설치하고 보호각을 건립하여 보존하고 있다.
손시양孫時揚
생졸년 미상. 고려 중기의 효자.
고려 시대에 과거의 예비시험을 거쳐 본 시험에 나아간 거자(擧子)이다.
아버지가 죽자 무덤 앞에 초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얼마 뒤에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 때와 마찬가지로 무덤 앞에 초막을 짓고 3년을 있었다.
이러한 효행을 동경유수(東京留守) 채정이 국가에 보고하니 1182년(명종 12) 정려비를 세우고 상을 주었다.
정려비는 보물 제68호로 지정되어, 현재 경주 황남동에 있다.
『금석총람(金石總攬)』에는 신라의 효자라고 되어 있다.
비 뒷면 글자 전문은 마모가 심해서 잘 알아볼 수는 없지만,
5행 130자로 손시양의 효행 내용과 비를 세운 경위를 기록하였다.
里中有擧子孫其姓時揚其名▨▨▨▨▨其父允伯端坐而終葬于州
南冷泉寺之北山廬于墓隱守之三年服▨而去及
其母死歸葬金山中谷守墳又如是以▨人之事親之道▨州▨具是狀以聞其
留主留守以聞上上嘉其孝行旌表閭使▨▨▨▨爲▨▨
時大定二十二年壬寅十二月 日 東京留守蔡靖誌
마을에 한 거자(擧子: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유생)가 있으니,
손(孫)이 성이고 시양(時揚)이 이름이다.
▨▨▨▨▨이고, 그의 아버지 윤백(允伯)이 단정히 앉아서 임종하니,
주(州)의 남쪽 냉천사(冷泉寺)의 북산(北山)에 묻었다.
묘에 오두막을 짓고 묘를 지키기를 3년을 (마치고서야) 그만두었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자 금산(金山)의 중곡(中谷)에 묻었는데, 묘를 지키기를 또 이전과 같이하였다.
이로써 사람이 부모를 섬기는 도리(事親之道)를 다하였다고 하여
주(州)에서 이러한 상황을 갖추어 유수(留守)에게 아뢰니, 유수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임금께서 그 효행을 가상히 여기시어 그 문려(門閭)에 정표(旌表)를 하시었다.
(결락) 때는 대정(大定) 22년 임인년(壬寅年) 12월 일이다. 동경유수(東京留守) 채정(蔡靖)이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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