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사동종上院寺銅鍾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상원사길 292 (연수리 220-5)
상원사上院寺
양평 상원사 석조물 일괄 - 양평군 향토유적 제37호
상원사(上院寺)는 양평군에 위치한 전통사찰 제49호이다.
고려시대 창건 했을 것으로 추정하며, 일명 상원암이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에 속하여 있으며
1330년대에 보우가 이 절에 머물며 수행했고,
1398년(태조 7)에 조안화상(祖眼和商)이 중창(重創) 하였으며, 무학대사가 왕사를 그만둔 뒤 잠시 머물렀다.
1458년 해인사의 대장경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의기록을 보면
1462년(세조8년)에는 세조(世祖)가 이곳에 직접 들러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어명을 내려 크게 중수하여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원찰(願刹)이 되었다.
최항이 그때의 모습을 기록한 《관음현상기》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1907년 (순종 원년) 왜병이
이 지역에 집결해 있던 의병을 소탕하기 위해 불을 질러 법당만 남겨놓고 모두 타 버렸는데
1918년 주지 최화송(崔華松) 화상과 화주 차상원이 큰방을 복원하였다. 이어
1934년 주지 최경언(崔璟彦)이 중수하였으나
1950년 6·25전쟁 때 용문산 전투를 겪으면서 모두 불타버렸다.
1969년 주지(住持) 덕송(德松)이 초막(草幕) 삼 칸을 짓고 복원에 착수했으며
1970년 주지 경한니(鏡漢尼)가 취임하여 요사(療舍)와
1972년 삼성각(三聖閣)을
1975년 대웅전(大雄殿)을
1977년 용화전(龍華殿)과 청학당을 차례로 복원하였다.
霽月堂 제월당
양평 상원사 동종上院寺 銅鍾
원래 양평 상원사터에 있다가 동본원사로 옮겨진 범종으로서
1929년 경성방송국이 기획한 타종행사의 일환으로 정초를 알리는 제야의 종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이 제야의 종소리를 중계한 첫 번째 사례였다.
1929년 1월 1일에는, 남산 기슭 KBS-TV 옛 자리에 있던 일본 절 본원사에서 범종을 빌려와 제야의 종을 쳤다.
해마다 연말이면 제야의 종을 울리고 방송으로 중계하는 관행은 이렇게 시작 되었다.
이곳 일본 절 본원사는 동본원사 경성별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곳의 범종은 원래 경기도 양평의 상원사에서 옮겨졌다가,
가짜 종이라 하여 국보지정 해제 된 내력이 있으며, 조계사 대웅전 내에 보존 되어 있다가
2010년 1월에야 양평 상원사로103년만에 환원되었다.
양평 용문산 상원사 범종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보물로 지정되어 제야의 종으로 쓰였으며.
상원사 동종은 해방 이후 국보 제367호로 명명됐다.
그러나 1962년 일제강점기에 지정된 문화재들을
다시 검토해서 국보와 보물 등으로 분류하고 재지정할 때 문제가 생겼다.
12월12일 열린 문교부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위원회에서 불교미술 전문가인 황수영 위원(동국대 교수)이
“이 상원사 동종은 진품이 아니라 일제가 만든 위작이며,
진품은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빼돌렸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때 고고미술사학자인 김원룡 위원이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황수영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이 상원사 동종은 졸지에 ‘가짜’로 전락하고 국보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1900년대초 상원사가 항일의병의 근거지가 되면서 다시 소용돌이에 빠졌다.
일제가 고종을 강제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한
1907년 의병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을때
권득수·조인환 의병장이 이끄는 양평 의병은 용문산 일대를 근거지로 삼고 항일투쟁을 벌였다.
일제는 의병의 근거지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용문산 일대의 사찰들을 무차별 불태웠다.
이때 상원사 동종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1906년 일본 교토(京都)에 근거지를 둔 정토종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寺·히가시혼간지) 경성별원이
서울 남산 아래(엣 TV방송국 자리)에 들어선다.
동본원사는 사찰에 동종을 걸려고 수소문하다가 양평 상원사 동종 이야기를 구입한다.
1931년 10월 25일 동본원사가 발행한 ‘남산 본원사 소사’라는 소책자를 보면 구입경위가 나온다.
“1907년 7월(혹은 4월) 경기 용문산 상원사 소장의 범종을 구입했다.
… 양평 일대의 폭도(의병)가 일어나 상원사의 가람도 폐허가 됐다.
이 와중에 본원사는 거금 800원을 주고 종을 구입했다.”
이 소책자는 “운반 도중 동대문 밖에서 일어난 폭도(한일병합 시대의 의병)의 방해를 받아서
3차례 시도 끝에 겨우 헌병의 도움으로 수로를 이용해서 용산을 거쳐 본원사에 도착했다”고 덧붙였다.
책자에 등장하는 권말의 연표를 보면
“1908년 4월23일 상원사서 구입한 동종이 도착했고 25일 공양회를 열었다”고 명시했다.
上院寺重創功德主 鏡漢尼丘尼功績碑
상원사중창공덕주 경한니구니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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