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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효정공 이정간(孝靖公 李貞幹), 충효재 경양사(忠孝齋 驚陽祠)

구름에 달

by 碧巖 2019. 4. 14.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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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정공 이정간(孝靖公 李貞幹)

 충효재 인경문(忠孝齋 仁敬門)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오창양지길 22-10   

 

전의인 효정공 이정간(孝靖公 李貞幹)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고부(固夫), 시호는 효정(孝靖).

아버지는 원종공신 이구직(李丘直)이고,

어머니는 정대부인(貞大夫人) 낙안김씨(樂安金氏)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김인관(金仁琯)의 딸이다.

부인은 정경부인 남평문씨(南平文氏)로 순평군(順平君) 문달한(文達漢)의 딸이다.

자녀는 5남  3녀로

우통례(右通禮) 이사흠(李士欽)

전성부원군(全城府院君) 이사관(李士寬)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이사신(李士信)

철원도호부사(鐵原都護府使) 이사민(李士敏)

지영암군사(知靈岩郡事) 이사혜(李士蕙)와   세 딸을 두었다.

 

이정간(李貞幹)[1360~1439]은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아버지의 음덕으로 벼슬에 올라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1405(태종 5) 강화부사가 되었다.

강화부사를 역임하는 동안 목장에 호랑이가 뛰어들었는데,

아무런 피해 없이 호랑이를 포획하여 비단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사헌부의 요직과 내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강원도관찰사에 이르러 102세의 노모(老母)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향리에 은거하였다.

자신도 80세의 고령이면서도 어머니를 즐겁게 하기 위해

색동옷을 입고 병아리를 희롱하는 등 출천지효(出天之孝)로 이름을 날렸다.

어머니 낙안김씨를 위하여

1429(세종 11) 경수연(慶壽宴)1432(세종 14) 영친연(榮親宴)을 베풀었는데,

이때 손님들의  축시

1509(중종 4) 후손 이계복(李繼福)경수시집(慶壽詩集)으로 간행하였다.

1682(숙종 8) 후손 이만봉(李萬封)이 행록(行錄) 등을 보충하여 재간행하였으며,

1918년 후손 이근용(李根容)무오속고(戊午續稿)를 보충하여 다시 펴냈다.

 

이 책에는 세종의 어필, 교서와 이에 대한 그의 사전(謝箋),

경수시집29, 영연시집(榮宴詩集)20, 초간(初刊)과 재간(再刊)의 발문,

그의 행록, 아버지 이구직의 묘갈문(墓碣文), 모친 김씨의 묘표(墓表),

그의 신도비문(神道碑文),아들 이사관 등 후손이 남긴 시집 관동제영(關東題詠)16,

1918년 당시 후손들의 추모시 무오속고114, 삼간(三刊) 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忠孝齋 重建記念碑

                              충효재 중건기념비

 

묘소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경기도 장단도호부(長湍都護府) 임강현(臨江縣) 남촌(南村) 우근동(于勤洞)에 있었다.

그의 신도비문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도비도 같은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읍 양지리에 위치한 송천서원(松泉書院)에서 배향하고 있으며,

경양사(陽祠)에서 신위를 모시고 있다. 경양사에는 이정간 유허비도 세워져 있다.

 

세종이 이정간의 효행을 칭찬하며 안석(案席)과 궤장(几杖), 어필을 하사함과 함께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임명하며 성대한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

이때 세종의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 世守仁敬)’이라는 어필은 대대로 전의이씨의 가훈으로 전승되었다.

세종은 교지를 내려 그를 칭찬하였고,

당시 우의정이던 맹사성(孟思誠)은 시를 지어 효성을 칭송하였다.

 

 

 

 

 

驚陽祠 廟庭碑

경양사 묘정비

 

충효재 경양사(忠孝齋 驚陽祠)

 

 

 

 

흡유당(恰愉堂)

<효정공 이정간 가계도>

아버지  원종공신 호조전서 이구직(李丘直)

어머니  정대부인 낙안김씨(樂安金氏), 판전교시사 김인관(金仁琯)의 따님.

        중추원사 효정공 이정간 (孝靖公 李貞幹)

        배위 정경 부인 남평문씨(南平文氏),  순평군(順平君) 문달한(文達漢)의 따님 

                 장남 증 좌통례 이사흠(李士欽)            

                 배위 순흥안씨, 공조전서(工曹典書) 안경검(安景儉)의 따님

                               손자 증 참의 이순백(李淳伯

                             손자 사직 이순중(李淳仲

                             손자 훈도사부 이순숙(李淳淑

                   손녀  최진(崔津)노정지(盧定之)윤소(尹韶)   

                 차남 증 영의정 전성부원군 행 한성부윤 이사관(李士寬) 

                 배위 청주한씨, 문간공(文簡公) 한상경(韓尙敬)의 따님

                             손자 증 참의 이인장(李仁長)

                             손자  현감 이의장(李義長) 무과 

                손자 병조참의 전성군 이예장(全城君 李禮長) 무과 

                             손자 주서 이지장(李智長) 문과 

                             손자 예조참판 이함장(李諴長) 문과 중시(重試

                             손자 관찰사 이효장(李孝長) 문과 중시(重試)

                             손자 동지중추부사 전성군 양간공 이서장(全城君 襄簡公 李恕長) 문과

                             손녀 첨지중추부사 송의(宋衣),  현감 김승중(金承重

                삼남 첨지중추원사 이사신(李士信)   

               배위 파평윤씨, 인수부윤(仁壽府尹) 윤보로(尹普老)의 따님

                             손자 직장 이승존(李承尊) 

                             손녀 참판 유말손(柳末孫),  생원(生員) 윤심(尹深)

                사남 부사 이사민(李士敏)  

                배위 이천서씨, 공도공(恭度公) 증 우의정 서선(徐選)의 따님

                                손자 이병덕(李秉德),  이병균(李秉均),  이병정(李秉正),

                             손녀 김효우(金孝友), 김익규(金益規),  봉교 안신손(安信孫), 사직 박원공(朴元恭).

               오남 영암군수 이사혜(李士惠) 무과(武科

               배위 숙부인 안동김씨, 절도사 김제(金淛)의 따님,  안렴사공 김사렴의 손녀

                             손자 정평부사 이효석(李孝碩), 이우석(李友碩), 이인석(李仁碩), 이의석(李義碩)

                   손녀 김후(金珝)

 

 

 

 

이정간[李貞幹]의 비명(碑銘) -이서장(李恕長)

공의 휘()는 정간(貞幹)이요, ()는 고부(固夫)이니, 전의(全義) 사람이다.

근본은 고려(高麗) 태사(太師)를 지낸 이도(李棹)에게서 나왔으며, 아버지 이구직(李丘直)은 또한 당세(當世)

거인(鉅人) 장덕(長德)이었는데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벼슬이 호조 전서(戶曹典書)에 이르렀다.

()는 정대부인(貞大夫人) 낙안김씨(樂安金氏)이니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김인관(金仁琯)이 아버지이다.

 

공은 원()나라 지정(至正) 15년 을미년(乙未年, 1355년 공민왕 4)에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특이한 성질이 있어 혼정(昏定)과 신성(晨省)을 배우지 않고서도 다 잘 알아 일찍이 하늘이 내린

효성(孝誠)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전서공(典書公)이 세상을 떠나자 조상(吊喪)하러 온 사람들이

그 얼굴빛과 말소리와 슬퍼하는 정경을 보고 모두 이씨(李氏) 집안에는 그럴만한 사람이 대대로 있다고 하였다.

 

차차 자라남에 따라 행실 하나하나를 조심성 있게 갈고 닦아 무릇 백성을 다스리는 일과

가정을 꾸려나가는 일들이 한결같이 인의(仁義)에 그 바탕을 두었다.

가정이 화목하여 조금도 도리에 어긋나는 소리를 들어볼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일찍이 세상을 떠난 것을 항상 슬퍼하여 돌아간 분을 섬기기를 살아 계신 어버이 받들듯이 하였으며,

초상(初喪) 때나 제사(祭祀) 때에는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따랐고

고려조(高麗朝)에서 불교(佛敎)를 숭상하던 영향을 깨끗이 씻어 버렸다.

 

힘이 남아돌면 글공부에 힘을 기울여 문필(文筆)이 전아(典雅)하고 넉넉하면서도 민첩하여

능란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구차스럽게 과거(科擧)보기 위한 공부는 힘쓰지 않았다.

오직 대부인(大夫人)이 즐기는 음식 등을 몸소 받들되 남을 시키는 일이 없었으며,

어머니의 기색을 보아 환한 얼굴로 대하여 그 뜻에 따라 어머니의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온갖 정성을

기울이면서도 항상 자기의 효성이 부족하여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두려워하였다.

 

조정에서 그 행실을 높이여서 여러 번 벼슬자리로 불렀으나 취임하기를 즐기지 아니하다가

만년에 가서야 비로소 벼슬길에 올라 관찰사(觀察使)가 되었지만 그러나 이것도 어버이를 위하여 자기 뜻을

굽힌 것이므로 일찍 벼슬을 버리고 서원(西原, 청주(淸州))에 있는 송천별서(松泉別墅)로 물러 나와서 살았다.

 

어버이를 곁에서 모시고 즐겁고 유쾌하도록 함에 힘을 다하였으니 색동옷을 입고 새 새끼를 어르는 등으로

어머니를 기쁘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중국의 옛 효자 노래자(老萊子)의 모습을 공에게서 다시 볼 수 있다 하고

칭찬하였다 한다. 세종 대왕(世宗大王)이 그 효성(孝誠)이 순수하고 돈독하다는 소문을 듣고

특별히 기리는 교서(敎書)를 내리고 그 벼슬을 몇 등급을 뛰어 승급시켜서

상경(上卿, 재상(宰相))의 위치까지 끌어올리고 이어서 궤장(几杖)과 주악(酒樂)을 내려 주는 등 은총을 베풀었다.

여기에 또 선덕(宣德) 갑인년(甲寅年, 1434년 세종 16) 42일에는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김씨(金氏)에게

특별히 작위(爵位)를 높여 정대부인(貞大夫人)으로 봉하였으니

때의 어머니의 나이 12살이고 공의 나이 또한 80여 세였다.

그리하여 당시의 현사(賢士)와 대부(大夫)들이 그 영광을 기리지 않는 사람이 없어 다투어

()와 노래를 지어 이 영광을 읊었다.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조선조(朝鮮朝) 건국 1백여 년 이래로

세상에서 소위 명문 거족(名門鉅族)이라 불리는 문중(門中)에서 우리 선조(先祖)의 모자(母子)

당시 요순(堯舜)같이 어진 임금인 세종(世宗)으로부터 받은 은총만큼 큰 영광을 얻은 집안이 다시 있었던가?

! 참 거룩한 일이로다.

 

공은 이미 다른 사람으로서는 겸하지 못할 것을 겸하고 또 다른 사람으로서는 얻지 못할 포서(褒書)를 얻었으니

이것은 유독 자손만대를 위한 영광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풍속과 교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인데

하물며 공의 모자(母子)의 그 성스러운 마음가짐으로 반드시 덕()을 쌓고

()을 받을 만한 바탕을 닦은 일이 한두 가지로 헤아릴 수가 없다.

중에서도 세상 사람들이 칭송하는 두드러진 것만을 몇 가지 적어 본다면,

그 어머니는 평생동안 일월(日月)이 비치는 곳에서 소변(小便)을 본 일이 없었고,

그 아들은 모리꾼에게 쫓기는 새끼 밴 노루를 구하여 주었고,

다래끼 속에서 입을 벌름거리는 물고기를 풀어놓고 하였다.

! 거룩한지고. 어머니는 하늘을 공경하는 마음이 있고, 아들에게는 미물(微物)을 구제하는 어진 마음이 있었다.

어진 사람은 반드시 오래 산다고 하더니 이 어머니와 이 아들에게서 그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겠다.

이상 말한 것이 그 덕행(德行)의 대략이다.

 

배위(配位)는 정경 부인(貞敬夫人) 문씨(文氏)이니 순평군(順平君) 문달한(文達漢)의 딸이다.

이 어른도 역시 맑은 덕과 어진 행실이 갖추어져 있어서 시어머니 섬기기를 친정 어머니 받들 듯하였다.

53녀를 두어 맏아들은 이사흠(李士欽)이니 좌통례(左通禮)로 추증되었으며

전서(典書) 벼슬을 지낸 안경검(安景儉)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다음은 이사관(李士寬)이니 영의정(領議政) 전성 부원군(全城府院君)으로 추증되었고

행한성 부윤(行漢城府尹)을 지냈으며 문간공(文簡公) 한상경(韓尙敬)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다음은 이사신(李士信)이니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지냈으며

부윤(府尹) 윤보로(尹普老)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다음은 이사민(李士敏)이니 부사(府使)를 지냈고 판윤(判尹) 서선(徐選)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다음은 이사혜(李士惠)이니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지냈고

절도사(節度使) 김제(金淛)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맏딸은 판서(判書) 허성(許誠)에게, 다음 딸은 김계성(金季誠)에게,

다음 딸은 부사(府使) 허비(許扉)에게 각각 시집갔다.

 

통례 이사흠의 아들로서 이순백(李淳伯)은 참의(參議)로 추증되었고, 이순중(李淳仲)은 사직(司直)이며,

이순숙(李淳淑)은 훈사(訓師)를 지냈고, 딸은 최진(崔津)노정지(盧定之)윤소(尹韶)에게 각각 시집갔다.

부윤 이사관의 아들로서 이인장(李仁長)은 참의(參議)로 추증되었고,

다음은 이의장(李義長)이니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다음은 이예장(李禮長)이니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지냈으며 군()으로 추봉(追封)되었고,

다음은 이지장(李智長)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注書)를 지냈으며,

다음은 이함장(李諴長)이니 문과에 급제하고 또 중시(重試)에도 급제하여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냈고,

다음은 이효장(李孝長)이니 문과와 중시에 급제하여 관찰사(觀察使)를 지냈으며,

다음은 이서장(李恕長)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좌윤(左尹)을 지냈으며 군()으로 봉작되었다.

딸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송의(宋衣)에게 시집갔고, 다음 딸은 현감 김승중(金承重)에게 시집갔다.

첨지중추원사 이사신은 외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은 이승존(李承尊)이며 직장(直長)이고,

맏딸은 참판(參判) 유말손(柳末孫)에게 시집갔으며, 다음 딸은 생원(生員) 윤심(尹深)에게 시집갔다.

부사 이사민의 아들로 맏아들은 이병덕(李秉德)이고, 다음은 이병균(李秉均)과 이병정(李秉正)이며,

딸은 김효우(金孝友)김익규(金益規) 및 봉교(奉敎) 안신손(安信孫)과 사직(司直) 박원공(朴元恭)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군수 이사혜의 아들은 이효석(李孝碩)이우석(李友碩)이인석(李仁碩)

이의석(李義碩)이고, 딸은 김후(金珝)에게 출가하였다.

이상이 모두 공의 아들 혹은 손자들에 대한 간단한 기록이다.

 

선덕(宣德) 9년 갑인년(甲寅年, 1434년 세종 16) 겨울에 공이 졸()하였는데 시호(諡號)는 효정(孝靖)이고,

()는 장단(長湍) 임강현(臨江縣) 호늑리(號勒里)의 신좌(申坐) 언덕에 있으며,

정경 부인(貞敬夫人) 문씨(文氏)가 부장(祔葬)되었다.

! 태사(太師) 이후에 자손이 번성하여 동국(東國)의 대가(大家)가 되어 현재까지 6백여 년이나 지났지만

명신(名臣)과 이름 높은 재상(宰相)이 서로 이어졌는데

모두 충효(忠孝)와 덕업(德業)과 문장(文章)과 절행(節行)이 있어 대대로 사서(史書)에 끊어지지 않았다.

우리 종족(宗族)을 세상에서 이른바 첫째니 둘째니 하고 손꼽는 까닭은 지금 조정에서 이름을 드날리는

선비들의 십중 팔구가 효정공(孝靖公)의 친손(親孫)이 아니면 외손(外孫)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모두 선조(先祖)가 덕을 쌓고 어진 행실이 거듭되어 이루어진 경사(慶事)로서 끊임없이

앞으로도 이어져 나갈 것이다. 선대(先代)의 공덕(功德)은 그 유래가 있음을 징험하였고,

후손(後孫)의 아름다운 행실은 전해진 바가 있음을 징험하겠으니,

비록 이것으로써 돌에 새긴다 할지라도 또한 다음 세대의 확실한 징표(徵表)가 되기에 충분하며

자손들에게 무궁토록 본보기가 될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혁혁(赫赫)할손 태사(太師)시여.

대대로 알려진 자손, ()과 경()이며, 문학(文學)과 훈공(勳功)이 있네.

하늘이 내신 효행 우리 선조(先祖) 특출하니 증자(曾子) 같은 봉양(奉養)이요,

노래자(老萊子) 같은 어리광이네. 어머니는 하늘 공경 아들은 생명 아껴,

이 어머니 이 아들은 옛날의 삼달(三達, ()()()

또는 지()()())일세. 덕행(德行)이 왕()에게 알려져 효자로다 기리시고

직질(職秩)과 봉()함을 더하고, 음악과 궤장(几杖) 내리셨네.

만세토록 전해지는 영광 온 나라가 효자라고 일컫네.

높은 포창(褒彰) 뛰어난 행적 길이 풍교(風敎)에 보탬이 되도다.

성조(聖朝)에서 얻은 명예, 요순(堯舜)같은 임금일세.

다시없는 은총(恩寵)이니 천()에 하나 있을 건가?

()과 인()을 거듭 쌓아 후손들의 은혜되니,

효자 가문(家門) 창대하여 세상에서 성대한 집안이라 칭송하니,

오늘날에 겨룰 상대 없고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고,

여경(餘慶)이란 옛 말이 참으로 나를 속이지 않는구려.

저기 장단(長湍) 땅을 우러러 보니 영백(英魄)이 잠드신 곳일세.

봉분(封墳)은 있고 비()가 없어 지극한 덕() 묻힐세라.

여러 후손 뜻을 모아 무궁토록 새겨서 보이니,

선조의 행적 알려거든 이 비석을 참고하기 바란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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