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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낙강정洛江亭, 경북 지방문화재 제587호, 마애권예 磨厓 權輗

구름에 달

by 碧巖 2019. 4. 23.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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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강정洛江亭

경북 지방문화재 제587

경상북도 안동시 남후면 단호리 72

    

 

낙강정(洛江亭)은 낙동강변 나지막한 구릉에 위치한 건물로

마애 권예() 선생의 정자로서 방3칸과 누마루를 설치하고

주변에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러서 운치를 내었다.

안동권씨인 권예는

1516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519己卯士禍때 조광조 일파의 탄압을 반대하는데 앞장섰던 인물로 전해진다.

 

원래는 예천에 있었던 정자를 이곳으로 이건하였다고 하며

당시의 이건기와 상량문이 있으나 자세한 연호를 기록하지 않아 확실한 연대를 알 수는 없다.

마애선생문집등의 문헌기록이 남아있고 낙강정(洛江亭), 판서연(判書淵) 등의 현판이 현존하고 있어

당호가 확실하여 역사적, 고건축적으로 가치가 있다.

 

 

 

 

 

 

 

 

 

 

 

 

吏曹判書 磨崖權先生 洛江亭紀蹟碑

이조판서  마애권선생  낙강정기적비

 

 

마애권예 磨厓 權輗    1495(연산군1)1549(명종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신(景信), 호는 마애(磨厓).

권거약(權居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권자겸(權自謙),

아버지는 권철경(權哲經), 어머니는 황윤경(黃允卿)의 따님이다.

권예는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으며,

1516(중종11) 22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같은 해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에 임명되었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예문관대교로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일파의 탄압을 반대하는데 앞장섰다.

1522년 홍문관부수찬을 역임하고,

1526년 사헌부지평에 기용되어 적극적으로 간쟁활동에 나섰다.

이어 홍문관교리, 사간원사간, 홍문관직제학 등 삼사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529년 강원도어사로 민정을 순찰하고 탐관으로 지목되고 있던 평해군수 최수진(崔秀珍)을 파직시켰다.

 

 

이후 내직으로 옮겨 승정원동부승지를 거치고, 이듬해에는 대사간으로서 당상관에 올랐다.

이때 홍문관의 운영이 대신들에 의하여 좌우됨을 보고

홍문관은 공론의 발원지임을 들어 그 직무의 공정성을 강조하였다.

한편 김안로(金安老)와 손을 잡고 복성군 옥사(福城君 獄死)를 일으켜

소요공 화천군 심정(逍遙公 花川君 沈貞)

문장공 돈재 성세창(文莊公 遯齋 成世昌) 등을 탄핵하여 파직시키고 사사에 이르게 하였다

 

이후 홍문관부제학, 대사헌 등 언관을 역임하였고

공조참판·호조참판·병조참판을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내직으로 옮겨 형조판서·대사헌·이조판서·우참찬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537년 김안로가 사사되고 그 일파가 축출되면서

심언경(沈彦慶)과 어촌 심언광(漁村 沈彦光)형제들과 아울러 파직되었을 때인

1538년 44세에 모친상을 당한 후, 고향에서 10여 년 동안 은거하다 세상을 떠났다.

권예는 성품이 강경해 나서기를 좋아했고, 자질이 총민했으며

요직을 역임하고 권력을 장악한 바 있어도 근검해 가산은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문집으로 마애실기(磨厓實記)가 전한다.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계평리 청성산 불당곡에 신도비와 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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