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太王陵碑, 호태왕비好太王碑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太王陵碑, 호태왕비好太王碑'
414년 고구려 제19대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아들 장수왕이 세운 비석이다.
사면에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높이 6.39m, 너비 1.35~2m에 달하는 한국 최대의 비석이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 : 지금의 지안 현 퉁거우)의 동쪽인
국강상(國岡上)에 있는 광개토왕릉 동쪽편에 세워졌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비가 있는 곳의 현재 지명은 압록강 북안(北岸)인
중국 지린 성[吉林省] 지안 현[輯安縣] 퉁거우 진[通溝鎭] 타이왕 향[太王鄕] 타이왕춘[太王村]이다.
주변에는 대형고분과 성터를 비롯한 많은 고구려 유적이 산재해 있다.
현재 비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을 광개토왕의 능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부근에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문자는 비의 4면에 모두 새겨져 총 44행 1,755자로,
이중 마멸되어 전혀 판독할 수 없는 것이 약 140여 자에 이른다.
비는 발견된 이후부터 주목을 받아,
지안현의 지사 유천성(劉天成) 등의 모금으로 비바람의 침식을 막기 위해 1928년에 2층으로 된 비각을 설치했다.
이 비각은 1976년에 낡아서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철거되고,
1982년에는 중국 당국에 의해 대형 비각이 세워져 지금에 이른다.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내용은 크게,
① 서언(序言)격으로 고구려의 건국 내력을
②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③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특히, 한·일 고대 사학계의 최대 쟁점이 되어 온 구절은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以爲臣)"로서, 여기에서 문맥과 전혀 관계없이 왜(倭)가 나온다.
광개토대왕릉비 원문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 □命駕,] 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 浮龜. 應聲卽爲]連 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 , [履]]龍頁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紹承基業. [遝]至十七世孫國 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二九登祚, 號爲永樂大王. 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 掃除□□,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有九, 寔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以示後世焉. 其詞曰.]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人], 躬率往討. 過富山[負]山, 至鹽水上, 破其三部洛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城, 力城, 北豊,
五備□, 遊觀土境, 田獵而還.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古利城, □]利城, 雜珍城, 奧利城, 勾牟城, 古[模]耶羅城, [頁]□□□□城,
□而耶羅[城 ], [ ]城, 於[利]城, □□城, 豆奴城, 沸□□]利城, 彌鄒城, 也利城, 太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灰]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城, 林城,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穰]城, [曾]□[城], □□盧城, 仇天城, □□□□, □其國城.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歸穴]□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 永爲奴客. 太王恩赦□]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新[羅]城□城, 倭[寇大]潰.城□]#□□盡□□□安羅人戍兵[新]□□□□[其]□□□□□□□言]□□□□□□□□□□□□□□□□□□□□□□□□□□辭□□□□□□□□□□□□□潰]□□□□安羅人戍兵. 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 □[國 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勾]□□□□朝貢.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石城□連船□□□, [王躬]率□□, [從]平穰]□□□鋒相遇. 王幢要截 刺, 倭寇潰敗. 斬煞無數.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師]□□合戰, 斬煞蕩盡.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 婁城, □[住]城, □城, □□□□□]□城.卄年庚戌,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國駭□□□□□□□]□□王恩普覆. 於是旋還. 又其慕化隨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社婁鴨盧, 肅斯舍[鴨盧], □□□]鴨盧. 凡所攻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
守墓人烟戶. 賣句余民國烟二看烟三, 東海賈國烟三看烟五, 敦城]民四家盡爲看烟, 于城一家爲看烟, 碑利城二家爲國烟, 平穰城民國烟一看烟十, 連二家爲看烟, 俳婁]人國烟一看烟 三, 梁谷二家爲看烟, 梁城二家爲看烟, 安夫連卄二家爲看烟, [改]谷三家爲看烟, 新城三]家爲看烟, 南蘇城一家爲國烟. 新來韓穢, 沙水城國烟一看烟一, 牟婁城二家爲看烟, 豆比鴨岑韓五家爲]看烟, 勾牟客頭二家爲看烟, 求底韓一家爲看烟, 舍城韓穢國烟三看烟卄一, 古[模]耶羅城一家爲看烟,] [炅]古城國烟一看烟三, 客賢韓一家爲看烟, 阿旦城, 雜珍城合十家爲看烟, 巴奴城韓九家爲看烟, 臼模盧]城四家爲看烟, 各模盧城二家爲看烟, 牟水城三家爲看烟, 幹 利城國烟一看烟三, 彌[鄒*]城國烟一看烟,]# 七 也利城三家爲看烟, 豆奴城國烟一看烟二, 奧利城國烟一看烟八, 須鄒城國烟二看烟五, 百]殘南居韓國烟一看烟五, 太山韓城六家爲看烟, 農賣城國烟一看烟七, 閏奴城國烟二看烟卄二, 古牟婁]城國烟二看烟八, 城國烟一看烟八, 味城六家爲看烟, 就咨城五家爲看烟, 穰城卄四家爲看烟, 散那]城一家爲國烟, 那旦城一家爲看烟, 勾牟城一家爲看烟,
於利城八家爲看烟, 比利城三家爲看烟, 細城三]家爲看烟.國 上廣開土境好太王, 存時敎言, 祖王先王, 但敎取遠近舊民, 守墓掃, 吾慮舊民轉當羸劣.] 若吾萬年之後, 安守墓者, 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 令備 掃. 言敎如此, 是以如敎令, 取韓穢二百卄家. 慮]其不知法則, 復取舊民一百十家. 合新舊守墓戶, 國烟 看烟三百, 都合三百 家.自上祖先王以來, 墓上]不安石碑, 致使守墓人烟戶差錯. 唯國 上廣開土境好太王, 盡爲祖先王, 墓上立碑, 銘其烟戶, 不令差錯.] 又制, 守墓人, 自今以後, 不得更相轉賣, 雖有富足之者, 亦不得擅買, 其有違令, 賣者刑之, 買人制令守墓之.
광개토대왕릉비 해석문
예전에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울 때 북부여(北夫餘)에서 나왔는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이었다.
알을 깨뜨리고 세상에 나왔는데, 아들을 낳자 성스러운 덕(德)이 있었다.
□□□□□ 거가(車駕)를 타고 순행(巡幸)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길이 부여(夫餘)의 엄리 대수(奄利大水)를 경유하게 되었다.
왕이 나루에 임하여 말하기를,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어머니가 하백(河伯)의 딸인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을 뜨게 하라.”고 하니,
그 소리에 응하여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이가 물에 떴다.
그런 뒤에 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의 홀본(忽本) [바로 졸본(卒本)이다.]
서쪽 성산(城山) 위에다 도읍(都邑)을 세웠다.
세상의 지위를 싫어하시니, 이로 인하여 <하늘에서>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왕이 홀본(忽本)의 동강(東罡) [강(罡)은 지경(疆)과 같다.]에서 황룡(黃龍)에게 업혀서 하늘로 올라갔는데,
세자(世子) 유류왕(儒留王) [바로 유리왕(類利王)이다.]에게 고명(顧命)하여 도(道)로써 나라를 일으키게 하였다.
대주류왕(大朱留王) [바로 유류왕(儒留王)이다.]이 기업(基業)을 이어 받았고,
□(내려와서) 17세 손(孫)에 이르러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 (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바로 존호(尊號)이다.]
18세[二九]에 즉위하여 영락 태왕 (永樂太王)이라 일컬었다.
은혜는 하늘에 □(미치고) 위무(威武)는 사해(四海)에 떨쳐서 미치었다.
□(나쁜무리들) 을 쓸어 없애어 거의 그 왕업(王業)을 평안하게 하니,
나라가 부강(富强)하고 백성들이 번성하고 오곡(五穀)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돌보지 아니하시어, 39세에 안가(晏駕)하여 나라를 버리시었다.
갑인년(甲寅年)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을 옮겨 모시고
이에 비명(碑銘)을 세워서 공적(功績)을 기록하여 후세(後世)에 보인다. 그 사(詞)는 이러하다.
영락(永樂) 5년 을미년(乙未年)에 왕이 비려(碑麗)가 □□하지 않으므로,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파부산(巴富山)·부산(負山)을 토벌하고 염수(鹽水) 위에 이르러,
그 언덕의 부락 6,7백 군데를 깨뜨리고, 소·말과 뭇 양(羊)을 얻은 것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어가(御駕)를 돌이켰는데, 인하여 가평도(������平道) 동래□성(東來□城)·역성(力城)·
북풍오비도(北豊五備道)를 지나서 토경(土境)을 유관(遊觀)하고 사냥을 하면서 돌아왔다.
백잔(百殘) [잔(殘)은 음(音)이 제(濟)이니 곧 백제(百濟)이다.]과
신라(新羅)는 예전의 속국(屬國)백성으로서 옛적부터 조공(朝貢)을 바쳐왔다.
왜(倭)가 신묘년(辛卯年)에 왔으므로 □□ 쳐부수었다.
백잔(百殘)이 □□신라(新羅)를 쳐부수어 신민(臣民)으로 삼았으므로,
6년 병신(丙申)에 왕이 몸소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임잔(任殘) [임(任)은 바로 임나(任那)이고, 잔(殘)은 백제(百濟)이다.]을 쳤는데,
나라의 군사가 □□ 먼저 일팔성(壹八城)·구모로성(臼模盧城)·인모로성(□模盧城)·간궁리[성](幹弓利□)·
□□성(□□城)·각미성(閣彌城)·모로성(牟盧城)·미사성(彌沙城)·□사조성(□舍蔦城)·아단성(阿旦城)·
고리성(古利城)·□리성(□利城)·잡미성(雜彌城)·오리성(奧利城)·구모성(勾牟城)·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
혈□□□□성(頁□□□□城)·이야라[성](而耶羅[城])·탁성(琢城)·□□성(□□城)·□□□두쌍성(□□□豆雙城)·
비□□성(沸□□城)·미추성(彌鄒城)·야리성(也利城)·대산한성(大山韓城)·소가성(掃加城)·돈발성(敦拔城)·
□□□[성](□□□[城])·누매성(婁賣城)·산[나]성(散[那]城)·나루성(那婁城)·세성(細城)·모루성(牟婁城)·
우루성(亏婁城)·소회성(蘇灰城)·연루성(燕婁城)·석지리성(析支利城)·암문□성(巖門□城)·임성(林城)·
□□□□(□□□□)·□□□리성(□□□利城)·취추성(就鄒城)·□발성(□拔城)·고모루성(古牟婁城)·윤노성(閏奴城)·
관노성(貫奴城)·삼양성(三穰城)·□□[성](□□[城])·□□라성(□□羅城)·구천성(仇天城)·□□□□(□□□□)·
□기국성(□其國城)을 쳐서 빼앗으니, 적(賊)들이 의(義)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감히 나와서 싸웠다.
왕께서 혁노(赫怒)하여 아리수(阿利水)를 건너서 자객(刺客)을 보내어 성(城)을 핍박하고
□□편국성(□□便國城)을 가로질러 □□하니, 백잔(百殘)의 임금이 곤핍(困逼)하여
남녀 생구(生口) 1천 인과 세포(細布) 1천 필(匹)을 내어서 바치고,
왕에게 귀순(歸順)하여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부터 이후로는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습니다.”고 하였다.
태왕(太王)이 그들의 앞서 어리석었던 허물을 은혜롭게 용서하고,
뒤에 귀순(歸順)하여 온 정성을 녹훈(錄勳)하였다. 이리하여 58 성(城)과 촌락(村落) 7백 개를 □(얻고) 하고,
백잔(百殘)의 왕제(王弟)와 대신(大臣) 10인을 데리고 군사를 돌이켜 환도(還都)하였다.
8년 무술(戊戌)에 하교(下敎)하여 편사(偏師)를 보내어 식신(息愼)의 토곡(土谷)을 살피게 하고,
인하여 곧 막□라성(莫□羅城)·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3백여인을 초략(抄略)하여 사로잡으니,
이로부터 이후로 와서 조공(朝貢)하고 □섬겼다.
9년 기해(己亥)에 백잔(百殘)이 맹세를 어기고 왜(倭)와 화친(和親)하여 내통하였는데,
왕이 순행(巡行)하여 평양(平壤)으로 내려가니, 신라(新羅)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그 국경(國境)에 가득하여 성지(城池)를 파괴하고 노객(奴客)을 그 백성으로 삼으니,
왕에게 와서 명(命)을 청합니다.” 하므로,
태왕(太王)은 은혜를 베풀어 그 충성(忠誠)을 칭찬하고 □(다시) 사신을 보내니,
<사신이> 돌아와서 □□(청을 허락하였다.) 라고 고(告)하였다.
10년 경자(庚子)에 하교(下敎)하여 기병(騎兵)과 보병(步兵) 5만 명을 보내어 가서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南居城)을 거쳐서 신라성(新羅城)에 들어가니, 왜(倭)가 그 가운데 가득하였다.
관병(官兵)이 바야흐로 이르자, 왜적(倭賊)이 물러갔다.
□□□□□□ □□(왜가 다시) 와서 배반하므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에 이르러 잇달아 성(城)을 함락하니, 성(城)들이 곧 항복 귀순(歸順)하였다.
안라(安羅) 사람 수병(戍兵)이 신라성(新羅城)·□성(□城)을 함락하니,
왜(倭)가 가득하여 왜(倭)가 무너뜨린 성(城)이 여섯이었다.
□□□□□□□□□□□□□□□□□ 아홉이 다 신(臣)으로 □오고, 안라(安羅)사람 수병(戍兵)이 가득하여
□□□□ 그 □□□□□□□□□□□□□□□□□□□□□□□□□□□□□□□□□ 사양하고
□□□□□□□□□□□□□ 무너뜨리고 □ 이로써 안라(安羅)사람 수병(戍兵)을 □□(쳐부수다) 하였다.
옛날 신라(新羅)의 매금(寐錦)이 몸소 내조(來朝)한 적이 없는데,
□□□□□□ 개토경 호태왕(開土境好太王)이 □□ 하니,
□□(신라) 매금(寐錦)이 □□ 복구(僕勾)로서 □□□□ 조공(朝貢)하였다.
14년 갑진(甲辰)에 왜(倭)가 불궤(不軌)하여 대방(帶方)의 경계에 침입하니,
□□□□□석성(石城)에 □배를 연결하여 □□□□□거느리고 □□□평양(平壤)에 □□□예봉(銳鋒)이 서로 마주쳤다.
왕의 당(幢)이 들이쳐서 탕소(盪巢)하니, 왜구(倭寇)가 무너져 패(敗)하였는데,
목베고 죽인 적이 헤아릴 수가 없었다. 17년 정미(丁未)에 하교(下敎)하여 보병(步兵)·기병(騎兵) 5만 명을 보내어
□□□□□□□□□ 거느리고 □□ 합전(合戰)하여 목베고 죽여서 다 쓸어 없애니,
노획한 투구와 갑옷이 1만여 벌이요, 군사 물자(物資)와 기계(機械)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돌아오다가 사구성(沙溝城)·누성(婁城)·□□성(□□城)·□□□(□□□)·[나]□성([那]□城)을 쳐부수었다.
20년 경술(庚戌)에 동부여(東夫餘)는 옛날에 추모왕(鄒牟王)의 속국(屬國) 백성이였는데, 그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朝貢)하지 않았으므로 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
군사가 여성(餘城)에 이르니 여성(餘城)의 온 나라가 놀라서 □□□□□□□□□ 왕의 은혜가 널리 퍼지었다. 이리하여 군사를 돌이켰는데, 또 그 덕화(德化)를 사모(思慕)하여 관군(官軍)을 따라 온 자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비사마압로(卑斯麻鴨盧)·타사루압로(椯社婁鴨盧)·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압로](□□□[鴨盧])였다. 무릇 공격하여 깨뜨린 성이 64곳이요, 촌락(村落)이 1천 4백 군데였다.
능묘(陵墓)를 지키는 연호(烟戶)는 매구여(賣勾余) 백성으로 국연(國烟)이 2가(家), 간연(看烟)이 3가(家)이고,
[국연(國烟)과 간연(看烟)은 바로 능묘(陵墓)를 수호(守護)하는 관역(官役)이었다.]
동해고(東海賈)는 국연이 3가, 간연이 5가이고, 돈성(敦城)의 백성은 4가(家)가 모두 간연이 되고,
우성(于城)은 1가(家)가 간연이 되며, 비리성(碑利城)은 2가(家)가 국연이 되고,
평양성(平壤城) 백성은 국연이 1가, 간연이 10가이고, 자련(訾連)은 2가(家)가 간연이 되고,
주루인(住婁人)은 국연이 1가, 간연이 43가이고, 양곡(梁谷)은 2가(家)가 간연이 되고,
양성(梁城)은 2가(家)가 간연이 되고, 안부련(安夫連)은 22가(家)가 간연이 되고,
개곡(改谷)은 3가(家)가 간연이 되고, 신성(新城)은 3가(家)가 간연이 되고,
남소성(南蘇城)은 1가(家)가 국연이 되었다.
새로 들어온 한(韓)·예(穢)로서 [(韓)은 삼한(三韓)을 가리키고, 예(穢)는 바로 예맥(穢貊)이다.]
사수성(沙水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1가이고, 모루성(牟婁城) 2가(家)가 간연이 되고,
두비압잠(豆比鴨岑)의 한(韓)은 5가(家)가 간연이 되고, 구모객두(句牟客頭)는 2가(家)가 간연이 되고,
구저(求底)의 한(韓)은 1가(家)가 간연이 되고, 함조성(含蔦城)의 한·예(韓穢)는 국연이 3가, 간연이 21가이고,
고□야라성(古□耶羅城)은 1가(家)가 간연이 되고, □고성(□古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3가이고,
객현(客賢)의 한(韓)은 1가(家)가 간연이 되고, 아단성(阿旦城)·잡진성(雜珍城)은 도합 10가(家)가 간연이 되고,
파노성(巴奴城)의 한(韓)은 9가(家)가 간연이 되고, 구모로성(臼模盧城)은 4가(家)가 간연이 되고,
인모로성(□模盧城)은 2가(家)가 간연이 되고, 모수성(牟水城)은 3가(家)가 간연이 되고,
간궁리성(幹弓利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3가이고, 미[추]성(彌[鄒]城)은 국연이 7가,
간연이 □□, 칠야리성(七也利城)은 3가(家)가 간연이 되고,
두노성(豆奴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2이고, 오리성(奧利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8가이고,
수추성(須鄒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5가이고, 백잔(百殘)의 남쪽에 사는 한(韓)은 국연이 1가, 간연이 5가이고,
대산한성(大山韓城)은 6가(家)가 간연이 되고, 농매성(農賣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1가이고,
윤노성(閏奴城)은 국연이 2가, 간연(看烟)이 22가이고, 고모루성(古牟婁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8가이고,
탁성(琢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이고, 미성(味城)은 6가(家)가 간연이 되고,
취자성(就咨城)은 5가(家)가 간연이 되고, 삼양성(三穰城) 24가(家)가 간연이 되고,
산나성(散那城)은 1가(家)가 국연이 되고, 나단성(那旦城)은 1가(家)가 간연이 되고,
구모성(句牟城)은 1가(家)가 간연이 되고, 어리성(於利城)은 8가(家)가 간연이 되고,
비리성(比利城)은 3가(家)가 간연이 되고, 세성(細城)은 3가(家)가 간연이 된다.
국강상 광개토경평안호태왕 (國罡上 廣開土 境平安好太王)이 생존했을 때에 하교(下敎)하여 말씀하기를,
“조왕(祖王)·선왕(先王)께서는 ‘다만 원근(遠近)의 옛 백성들만을 취(取)하여 능묘(陵墓)를 지키고
쇄소(灑掃)하라.’고 말씀하셨으나, 나는 이들 옛 백성들이 점차 쇠약해질까 염려된다.
만약 내가 죽은 뒤에는 능묘를 편안히 지킬 자들은 다만 내가 몸소 돌아다니면서 정복해 온
한(韓)·예(穢)를 취하여 쇄소(灑掃)하는 데에 갖추게 하라.“고 하였다.
말씀하신 하교(下敎)가 이와 같았으므로 하교(下敎)하신 명령과 같이 한(韓)·예(穢) 2백 20가(家)를 취(取)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예법(禮法)을 알지 못할까 염려하여 다시 옛 백성 1백 10가(家)를 취하니
신구(新舊)의 능묘(陵墓)를 지키는 호(戶)를 합하면 국연(國烟)이 30가(家),
간연(看烟)이 3백 가(家) 도합 3백 30가(家)이다.
위로 조왕(祖王)·선왕(先王) 이래로부터 능묘 위에 비석(碑石)을 세우지 아니하여서,
능묘를 지키는 사람의 연호(烟戶)가 잘못되는 수가 있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 광개토 경평안호태왕 (國罡上 廣開土 境平安好太王)께서 조왕(祖王)·선왕(先王)을 위하여
능묘 위에 비명(碑銘)을 세우고, 그 연호(烟戶)가 잘못되지 않게 하고,
또 능묘를 지키는 사람을 정하여 이제부터 이후로는 다시 서로 전매(專賣)하지 못하게 하며,
아무리 부유한 자가 있을지라도 마음대로 사지 못한다.
법령을 어기고 파는 자가 있으면 파는 자는 처형하고, 사는 자는 제령(制令)하여 능묘를 지키게 한다.
호고정
중국-만포진다리 (0) | 2019.08.13 |
---|---|
중국-광개토대왕릉廣開土大王陵陵, 호태왕릉好太王陵, 태왕릉太王陵,, 영락대왕永樂大王 (0) | 2019.08.10 |
중국-장수왕릉(長壽王陵), 장군총(將軍塚) , 장수정(長壽亭), 1호 동반무덤 (0) | 2019.08.08 |
백두산-미인송美人松 (0) | 2019.08.06 |
백두산-장백폭포(長白瀑布, 长白瀑布), 비룡 폭포(飛龍瀑布, 飞龙瀑布) (0) | 2019.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