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국내성高句麗國內城 성벽城壁, 통구성通溝城
고구려 국내성 高句麗 國內城 성벽城壁 400년간 고구려의 궁성
일명 통구성通溝城이라고 하며,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都城)으로 400여년간 고구려의 궁성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성벽의 석축터만 있다.
한때 국내성이 지금의 어느 곳에 해당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중국의 길림성(吉林省) 집안현(輯安縣)에 있는 통구성(通溝城)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이 성은 압록강 우안(右岸) 통구 분지의 서쪽 끝에 있는데,
몇 차례에 걸친 조사 결과를 종합해 보면, 원형이 많이 손상되었으나
내·외벽을 잘 다듬은 네모뿔의 돌로 쌓은 석축성(石築城)으로 평면은 사각형이고, 방향은 115도이다.
동쪽 성벽의 길이는 554.7m, 남쪽 성벽의 길이는 751.5m,
서쪽 성벽의 길이는 715.2m이며, 둘레는 2,686m에 달한다.
국내성 안에서 몇몇 고구려 유적이 발견되었다.
지금의 시정부 부근에서 궁궐 유적지의 배초석(건물 기단)이 출토되었으며,
천연 인쇄 공장 부근에서는 기와, 막새기와, 금칠한 구리불상과 토기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또한 우정국과 목욕탕 일대에서는 초석들과 태세(太歲) 4년 명 막새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고구려 미천왕(美川王) 27년(326)의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 성문 안에서는 철기를 제조하던 작업장이 발견되었고
성 동북쪽에서도 또한 몇 곳의 건축 유지가 발굴되었다.
성내에서는 기와편들과 쇠솥, 칼, 활촉, 가위, 망치, 모루 등의 철제 기물, 돌도끼, 토기 등이 발굴되었으며,
배초석과 건축유지가 토기, 막새기와 등과 함께
백옥귀걸이, 금칠한 활촉, 금칠 기물 뚜껑, 금칠 걸개 등과 대량의 기와 조각과 몇 점의 기초돌들이 발굴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고구려가 최초의 수도인 졸본(卒本)에서 이곳으로 천도한 것은 서기 3년(유리왕 22)이라고 한다.
그런데 국내성과 환도성을 같은 것으로 보는 학자들 중에는 이것을 부인하고,
209년(산상왕 13)에 환도성으로 천도했다는『삼국사기』의 기사를 토대로 209년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이 곳에서의 정도(定都) 기간에 대해서도『삼국사기』자체가 두 가지 설을 전하고 있다.
하나는 서기 3년 국내성 천도부터 427년(장수왕 15) 평양천도(平壤遷都) 때까지라고 보는 견해이다.
다른 하나는 209년 환도성 천도부터 427년 평양천도 때까지로 보는 견해이다.
특히 후자의 설은 고구려가 환도성 천도 이후 평양천도 때까지 세 번이나 수도를 옮겼다고 한다.
이렇듯 이견이 분분하지만 서기 3년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한 뒤
비록 전란 등으로 일시적으로 왕이 다른 곳으로 이거(移居)한 적은 있었지만,
427년 평양천도 때까지 약 400년 동안 고구려의 도성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국내성은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뒤에도
평양·한성(漢城: 지금의 황해도 載寧 혹은 북한산 일대)과 더불어 고구려 삼경(三京)의 하나였으며,
645년(보장왕 4) 당나라 군대에게 포위당한 요동성(遼東城)을 구원하는 데
신성(新城)과 이곳의 군사 4만 명이 동원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여전히 고구려의 정치·군사적 중심지의 하나였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 최고 귀족의 분묘로 여겨지는 벽화고분이
평양과 이 일대에 집중 분포되어 있는 점도 국내성의 비중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666년(보장왕 25) 집권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은 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아들들 사이에 불화가 생겨 큰아들 연남생(淵男生)이 국내성을 근거로
동생인 연남건(淵男建), 연남산(淵男産)과 대항하다가
큰아들 연남생(淵男生)이 당나라에 투항해 버림으로써 이곳은 고구려의 영역에서 떨어져 나가고 말았으니,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아들 연남생(淵男生)의 잘못된 판단으로 영토가 줄어지게 된 것이리...
국내성 주변에는「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를 비롯하여
태왕릉(太王陵)·장군총(將軍塚)등 고구려의 유적·유물들이 산재해 있어 고구려시대 국내성의 영화를 말해 준다.
국내성 배수로 유적지 國內城 排水路 遺蹟地
배수로의 현재 길이는 16.25m이고, 너비는 0.8m이며, 높이는 0.95m이다.
배수로는 다듬어진 거대한 석돌을 2층 계단식으로 쌓아 놓았고
배수로의 바닥을 평평한 돌판으로 깔아놓았으며 입구의 윗 부분에는 8개의 거대한 돌이 덮개로 놓여있다.
배수로는 성벽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관통하고 있으며 국내성의 중요한 배수시설이다.
淸波亭청파정
국내성 성벽 강가의 정자로 서문 쪽의 성을 서성(西城: Xi Cheng)이라 부른다.
서성(西城) 밖 도로 옆의 최근에 지은 청파정(淸波亭)이라는 2층 누각을 볼 수 있다.
청나라 시대 양식을 따라 추녀가 치켜 올라간 중국식 정자이다.
☞ 고구려의 역대 왕들과 주요 치적
1 | 동명성왕(東明聖王, 추모왕(皺牟王)) 생몰 : BC 58~BC 19 재위 : BC 37~BC 19 |
고구려의 시조(재위 BC 37∼BC 19). 이름 주몽(朱蒙)·추모(鄒牟)·상해(象解)·도모(都慕).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도 한다.어려서 이미 활을 잘 쏘는 등 영특하고 총명하자 금와왕의 장자 대소(帶素) 등 일곱 왕자 및 여러 신하들이 시기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유화부인의 뜻을 따라 화를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로 남하, BC 37년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 칭하고, 성(姓)을 고(高)라 하였다. BC 36년 비류국(沸流國) 송양왕(松讓王)의 항복을 받았고, BC 34년에는 성곽과 궁실을 건립하였으며, BC 33년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하고, BC 28년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켰다. |
2 | 유리(명)왕(瑠璃(明)王) 생몰 : ?~AD 18 재위 : BC 19 ~ AD 18 |
고구려 제2대 왕(재위 BC 19∼AD 18). 휘(諱) 유리(類利)·유류(儒留)·주류(朱留).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고도 한다. 동명왕의 맏아들. 어머니 예씨(禮氏). 비(妃)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 BC 19년(동명왕 19) 부여로부터 아버지 동명왕을 찾아 고구려에 입국, 태자로 책립되고 동명왕에 이어 즉위하였다. BC 17년 계비인 치희(雉姬)를 그리는 《황조가(黃鳥歌)》를 지었으며, BC 9년 선비(鮮卑)를 공략하여 항복받았다. 3년 도읍을 홀본(忽本)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13년 부여(扶餘)가 침공해 오자 이를 격퇴하였다. 14년 군사 2만으로 양맥(梁貊:小水貊)을 쳤으며, 한나라 고구려현(高句麗縣:玄郡의 屬縣)을 빼앗았다. 두곡동원(豆谷東原)에 묻혔다. |
3 | 대무신왕(大武神王) 생몰 : AD 4 ~ AD 44 재위 : AD 18 ~ AD 44 |
고구려 제3대왕(재위 18∼44). 휘(諱)는 무휼(無恤). 유리왕(琉璃王)의 셋째 아들. 어머니는 송양(松讓)의 딸. 14년(유리왕 33) 태자(太子)로 책봉되어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아보다가 유리왕이 죽은 뒤 즉위하였다. 22년(대무신왕 5) 동부여를 공격하여 대소왕(帶素王)을 죽이고, 고구려에 병합(倂合)하였다. 또 26년(대무신왕 9) 개마국(蓋馬國)을 쳐서 이를 병합하여 국토를 살수(薩水) 이북까지 확대하였다. 한편 을두지(乙豆智) 같은 인재를 등용하여 국사(國事)를 맡겼는데, 28년 한(漢)나라의 요동 태수(遼東太守)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그의 지략(智略)으로 이를 물리쳤다. 32년 왕자(王子) 호동(好童)을 시켜 한사군(漢四郡) 중에서 아직 남아 있는 낙랑군(樂浪郡)을 정벌하게 하였으며, 37년 재차 공략(攻略)하였다. 왕의 시호(諡號)가 대무신왕인 것은 재위 중에 주위의 많은 나라를 공략하여 무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왕의 능(陵)은 대수촌원(大獸村原)에 있다. |
4 | 민중왕(閔中王) 생몰 : ? ~ 48 재위 : 44 ~ 48 |
고구려 제4대 왕(재위 44∼48). 이름 해색주(解色朱).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아우. 대무신왕이 죽자 태자 해우(解優:모본왕)가 어리므로, 대신 즉위하였다. 유언에 따라 민중원(閔中原) 석굴에 장사지냈다. |
5 | 모본왕(慕本王) 생몰 : ? ~ 53 재위 : 48 ~ 53 |
고구려의 제5대 왕(재위 48∼53). 이름 해우(解憂)·해애루(解愛婁).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아들. 민중왕(閔中王)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49년(모본왕 2) 한(漢)나라의 북평(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 등을 공격하였으나, 요동태수(遼東太守) 채동(蔡)의 제의로 화친을 맺었다. 원래 성품이 포악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다. 결국 신하 두로(杜魯)에게 피살되었다. 장지(葬地)는 모본원(慕本原)에 있다. |
6 | 태조(대)왕(국조왕, 대조왕) (太祖大王, 國祖王, 大祖王) 생몰 : 47 ~ 165 재위 : 53 ~ 146 |
고구려 제6대 왕(재위 53∼146). 휘 궁(宮). 아명 어수(於漱). 유리왕의 손자이며,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 국조왕(國祖王)이라고도 한다. 모본왕(慕本王)이 죽은 후, 태자가 영특하지 못하여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7세에 왕이 되었으나, 태후(太后)가 섭정하였다. 56년(태조왕 4) 동옥저(東沃沮)를 정벌, 영토를 동으로는 창해(滄海), 남으로는 살수(薩水:淸川江)에 이르게 하였으며, 72년 부족장인 달고(達賈)를 파견하여 조나(藻那)를 정벌하고, 121년 한(漢)나라의 요수현(遼燧縣)을 공격하여 요동태수(遼東太守) 채풍(蔡諷)을 죽이는 등, 서북면의 영토를 넓혔다. 또한 정치체제 확립에 힘써 종래의 부족국가적 형태에서 중앙집권적 형태로 체제를 정비하였다. 146년 동생인 수성(遂成:次大王)이 왕위를 탐내자 그에게 양위하고 별궁으로 은퇴하여 태조왕이라 하였다. 165년(신대왕 1) 119세로 죽어 한국 역사상 가장 장수한 왕이 되었다. 태조왕 때부터 중국의 사료에도 명확한 것이 많고, 이후 고구려 왕 세차(世次)의 확실한 연대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실질적인 국가로서의 면목을 갖춘 것은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
7 | 차대왕(次大王) 생몰 : 71 ~ 165 재위 : 146 ~ 165 |
고구려 제7대 왕(재위 146∼165). 휘(諱) 수성(遂成). 태조왕의 동생. 121년(태조왕 69)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현도태수(玄太守) 요광(姚光), 요동태수(遼東太守) 채풍(蔡諷) 등이 고구려를 침범하자 군사를 이끌고 나가 이를 대파한 뒤,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았다. 태조왕의 연로함을 기화로 정권을 노리다가 태조왕의 양위를 받아 왕의 자리에 올랐다. 차대왕은 사람됨이 용장(勇壯)하여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하지 못하였다. 147년(차대왕 2) 왕위 계승을 반대하던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을 죽이고, 148년 태조왕의 태자 막근(莫勤)마저 죽인 후 왕권을 확립하였으나, 횡포와 학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을 듣다가, 결국 명림답부(明臨答夫)에게 시해당하였다. |
8 | 신대왕(新大王) 생몰 : 89 ~ 179 재위 : 165 ~ 179 |
고구려 제8대 왕(재위 165∼179). 휘(諱) 백고(伯固)·백구(伯句). 태조왕의 계제(季弟), 재사(再思)의 아들. 어머니는 부여 사람. 둘째 형인 차대왕(次大王)이 포악무도하여 숨어 살던 중 차대왕이 명림답부(明臨答夫)에게 살해되자 좌보(左輔) 어지류(支留) 등의 추대로 77세에 즉위하였다. 166년(신대왕 2) 좌·우보(左右輔)의 직제를 국상(國相)으로 고치고 명림답부를 이에 임명, 패자(沛者)의 벼슬을 더하여 내외병마를 맡기고 나라를 다스렸으며, 차대왕의 태자 추안(鄒安)을 양국군(讓國君)에 봉하였다. 169년 한(漢)나라의 현도군태수(玄郡太守) 경림(耿臨)이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오자 스스로 항복하였으며, 이듬해 경림의 후임인 공손 탁(公孫度)을 도와 부산(富山)의 도적을 토벌하였다. 능묘는 고국원(故國原)에 있다. |
9 | 고국천왕(故國川王) 생몰 : ? ~ 197 재위 : 179 ~ 197 |
고구려 제9대 왕(재위 179∼197). 이름 남무(男武)·이이모(伊夷謨). 신대왕(新大王)의 둘째 아들. 국양왕(國襄王)이라고도 한다. 비(妃)는 제나부(提那部) 우소(于素)의 딸이다. 신대왕이 죽은 뒤,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184년 한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의 침입을 좌원(坐原)에서 막아 싸워서 대승하였다. 191년 을파소(乙巴素)를 국상(國相)으로 등용하여 현정(賢政)을 베풀고, 을파소를 천거한 안류(晏留)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194년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빈곤을 덜어주었다. 고국천왕 때를 계기로 왕위계승방법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뀌었다. |
10 | 산상왕(山上王) 생몰 : ? ~ 227 재위 : 197 ~ 227 |
고구려 제10대 왕(재위 197∼227). 이름 연우(延優)·이이모(伊夷模). 제8대 신대왕(新大王)의 아들이며, 제9대 고국천왕(故國川王)의 동생이다. 고국천왕이 아들 없이 죽자 왕후 우씨(于氏)에 의해 연우가 왕위에 올랐다. 연우 위에는 발기(發岐)라는 형이 있었다. 발기는 이를 분하게 여겨 고구려를 떠나 요동태수(遙東太守) 공손 탁(公孫度)에게 가서 그의 군사 3만 명을 얻어 고구려에 쳐들어왔다. 산상왕은 동생 계수(須)로 하여금 이를 막게 했는데 이 싸움에서 발기가 패하여 자살하였다. 207년(산상왕 11) 왕이 주통촌(酒桶村)에 미행(微行)하였는데 208년에 그곳의 한 처녀가 산상왕의 아들을 낳았다. 처녀는 소후(小后)에 봉해졌고 그 아들은 후에 제11대 동천왕(東川王)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왕은 서울을 환도(丸都)로 옮겼는데, 환도는 지금의 중국 퉁거우[通溝] 지방의 지안현[輯安縣]이다. 217년(산상왕 21) 8월에 한(漢)나라 평주(平川)의 하요(夏瑤)가 백성 1,000여 호(戶)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으므로 왕은 그들을 받아들여 지금의 중국 훈춘[琿春] 지방인 책성(柵城)에서 살도록 하였다. 능(陵)은 산상릉(山上陵)이다. |
11 | 동천왕(東川王) 생몰 : ? ~ 248 재위 :227 ~ 248 |
고구려 제11대 왕(재위 227∼248). 이름은 우위거(憂位居), 초명은 교체(郊). 산상왕(山上王)의 아들. 동양왕(東襄王)이라고도 하며, 213년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의 치세는 중국이 위(魏)·오(吳)·촉(蜀)으로 대립하고 있던 삼국시대로서, 236년(동천왕 10) 오나라 손권(孫權)이 사신 호위(胡衛)를 파견하여 화친을 청해 왔으나 사신을 죽여 위나라에 보냈고, 238년에는 위나라가 오나라 공손 연(公孫淵)을 토벌할 때 군사 1,000여 명을 보내어 위를 도왔다. 242년에 중국과 낙랑군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다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丘儉)의 반격을 받아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고, 장군 왕기(王)의 추격으로 남옥저(南沃沮)로 피란하였다. 이때 용장(勇將) 밀우(密友)와 유유(紐由)의 계책으로 적을 격퇴시켰으나, 환도성이 복구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되어 247년에 수도를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겼다. 248년에는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맺었다. |
12 | 중천왕(中川王) 생몰 : 224 ~ 270 재위 : 248 ~ 270 |
고구려 제12대 왕(재위 248∼270). 일명 중양왕(中壤王). 휘(諱) 연불(然弗:延弗), 동천왕(東川王)의 맏아들. 비(妃)는 연씨(椽氏). 동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 동생 예물(預物)과 사구(奢句)가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259년(중천왕 12) 위(魏)나라의 장수 위지계(尉遲階)의 침입군을 양맥곡(梁貊谷)에서 격퇴하였다. 죽은 후 중천원(中川原)에 장사지냈다. |
13 | 서천왕(西川王) 생몰 : ? ~ 292 재위 : 270 ~ 292 |
고구려 제13대 왕(재위 270∼292). 일명 서양왕(西壤王). 이름은 약로(藥盧)·약우(若友). 중천왕(中川王)의 둘째 아들이다. 255년(중천왕 8) 태자로 책봉되고, 271년 서부대사자(西部大使者) 우수(于漱)의 딸을 왕후로 삼았다. 280년 숙신(肅愼)이 내침하자 동생 달고(達賈)를 보내어 이를 격퇴하고, 단로성(檀盧城) 등 여러 성을 빼앗았다. 286년 반란을 도모한 동생 일우(逸友)·소발(素勃) 등을 주살하였다. 왕의 장지(葬地)는 서천원(西川原)이다. |
14 | 봉상왕(烽上王) 생몰 : ? ~ 300 재위 : 292 ~ 300 |
고구려 제14대 왕(재위 292∼300). 이름 상부(相夫)·삽시루(矢婁). 서천왕의 태자. 치갈왕(雉葛王)이라고도 한다. 자랄 때부터 교만하고 시기심이 많았다. 왕위에 오르자 숙부인 안국군(安國君) 달고(達賈)가 백성들의 추앙을 받음을 미워하여 살해하고, 이듬해 동생 돌고(固)마저 사사(賜死)하였다. 명신(名臣) 창조리(倉助利)를 국상(國相)에 등용하여 연(燕)나라 모용 외(慕容)의 침입을 격퇴하기도 하였으나, 차츰 사치와 방탕을 일삼게 되었다. 298년 대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주릴 때, 화려한 궁궐을 지으려 하여 창조리가 이를 말렸으나 끝까지 그의 간언을 듣지 않았다. 300년 폐위되고, 후환이 두려워서 자결하였다. 무덤은 봉산원(烽山原)에 있다. |
15 | 미천왕(美川王) 생몰 : ? ~ 331 재위 : 300 ~ 331 |
고구려의 제15대 왕(재위 300∼331). 성 고씨(高氏). 이름 을불(乙弗)·우불(憂弗). 서천왕의 손자, 고추가(古鄒加) 돌고(固)의 아들.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한다. 큰아버지 봉상왕이 아버지를 죽일 때 민가(民家)에 숨어 화를 면하였으며, 뒤에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 등이 봉상왕을 폐하자 왕위에 올랐다. 국토 확장에 진력하여, 302년 군사 3만으로 현도군(玄郡)을 공격, 적군 8,000명을 사로잡았다. 311년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점령하였으며, 313년 낙랑군(樂浪郡)을 공략하여 적군 1,000명을 사로잡았다. 이로써 낙랑군은 멸망하였다. 314년 대방군(帶方郡)을 정벌하여 영토로 삼았다. 미천지원(美川之原)에 장사지냈다. |
16 | 고국원왕(故國原王) 생몰 : ? ~ 371 재위 :331 ~ 371 |
고구려 제16대 왕(재위 331∼371). 이름 사유(斯由)·쇠(釗). 미천왕의 아들. 국강상왕(國岡上王)이라고도 한다. 314년(미천왕 l5) 태자로 책봉되고, 즉위하자 평양성(平壤城)을 증축하였으며 국내성(國內城)을 쌓았다. 342년 환도성(丸都城)으로 천도한 뒤 수차례 연(燕)나라의 침입을 받다가, 4만 군사를 거느린 모용 황(慕容?에게 미천왕의 시체를 빼앗기고, 왕모(王母) 주씨와 왕비(王妃)가 납치되었다. 343년 동생을 연나라에 파견, 조공(朝貢)을 바쳐 미천왕의 시체와 왕비를 찾아왔고, 355년 다시 조공하여 왕모를 찾아왔다. 369년 2만 군대로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패하고, 371년 침입한 백제 근초고왕과 평양성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
17 | 소수림왕(小獸林王) 생몰 : ? ~ 384 재위 : 371 ~ 384 |
고구려 제17대 왕(재위 371∼384).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구부(丘夫),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아들. 355년(고국원왕 25)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71년 고국원왕이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과 평양에서 싸우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전진(前秦)과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여 전진의 제도와 문화의 수입에 노력하여, 372년 전진 왕 부견(符堅)이 보낸 승려 순도(順道)가 가져온 불상과 경문을 받아들여 최초로 불교를 수입하였으며 같은 해 태학(太學)을 설립하였고, 373년 처음으로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375년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여 순도를 머물게 하였다. 그 해에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또 전년에 고구려에 온 중 아도(阿道)를 위하여 이불란사(伊佛蘭寺)를 지어 주지(住持)로 삼았으며, 같은 해에 백제의 수곡성(水谷城)을 빼앗았다. 377년 3만 대군의 백제군 침공을 물리치고 백제의 북변(北邊)을 역습하였으나 이듬해 거란(契丹)에게 북변을 빼앗겼다. |
18 | 고국양왕(故國壤王) 생몰 : ? ~ 391 재위 : 384 ~ 391 |
고구려 제18대 왕(재위 384~391). 이름 이련(伊連)·어지지(於只支). 소수림왕의 아우. 광개토왕의 아버지. 385년 군사 4만으로 요동(遼東)을 공격하였고, 이듬해 백제를 정벌하여 국토를 넓히는 등 외치(外治)에 힘썼다. 불교를 널리 펴서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국사(國社)를 세우고 종묘(宗廟)를 수리하는 등 국가체제 확립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
19 |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생몰 : 375 ~ 413 재위 : 391 ~ 413 |
고구려 19대 왕(재위 391∼413). 고국양왕(故國壤王)의 태자. 이름은 담덕(談德)이며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이다. 그의 완전한 묘호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며, 생존시의 칭호는 영락대왕(永樂大王)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약칭이고, 그가 쓴 영락(永樂)이란 연호는 한국에 알려진 최초의 연호이다. 즉위 초부터 대방(帶方) 탈환전을 개시하여 백제의 북쪽을 진격하여서 석현(石峴) 등 10성을 함락하였고, 396년(광개토왕 6:백제 아신왕)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여 58성을 차지하였으며, 왕제(王弟)와 대신 10인을 볼모로 삼아 개선하였다. 이리하여 한강 이북과 예성강 이동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400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의 원군을 보내어 왜구를 격퇴시켰으며, 동예(東濊)를 통합하고(410), 신라와는 하슬라(何瑟羅)를 경계로 삼았다. 또 연(燕)나라의 모용 희(慕容熙)를 반격하여 신성(新城)·남소(南蘇)의 2성 등 700여 리의 땅을 탈취하였고, 405∼406년 후연(後燕)의 모용 희의 침입을 2번 받았으나 요동성(遼東城)과 목저성(木底城)에서 모두 격퇴하였다. 407년 모용 희를 죽이고 자립한 고운(高雲)과는 수교를 맺기도 하였다. 410년에는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64성을 공파함으로써 철령(鐵嶺:安邊) 이북의 동부여가 고구려의 판도 안에 들게 되었다. 또한 남하하여 한강선까지 진출하였으며, 서쪽으로 후연을 격파하고 요동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만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그의 능은 소재 미상이나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광개토대왕비(中國 吉林省集安縣 通溝 소재)에는 왕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
20 | 장수왕(長壽王) 생몰 : 394 ~ 491 재위 :413 ~ 491 |
고구려 제20대 왕(재위 413∼491). 휘 거련(巨連:巨璉).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의 맏아들. 모습이 괴걸(魁傑)하고 지기(志氣)가 호매(豪邁)한 대장부로, 409년(광개토대왕 19) 태자로 책봉되고, 413년 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위 초기 중국의 진(晉)·송(宋)·위(魏) 나라 등에 사신을 파견하여 국교를 맺고, 427년(장수왕 15) 만주 퉁거우[通溝] 지방의 국내성(國內城)에서 평양으로 천도하여 적극적인 남하정책을 추진하였다. 승려 도림(道琳)을 백제에 첩자로 파견하여 백제의 허실을 탐지하는 한편 백제의 국고와 민력을 소모시키고 나서, 475년 친히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여 그 수도 한성(漢城)을 함락하였고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을 사로잡아 죽였다. 480년(장수왕 68) 말갈(靺鞨)의 군사와 함께 신라 북부를 공략하여 고명성(孤鳴城) 등 7성을 함락시켜 남으로는 아산만(牙山灣)에서 동쪽의 죽령(竹嶺)에 이르렀고, 북서쪽으로는 랴오허강[遼河] 이동(以東)의 만주지방 대부분을 차지하여, 한국 역사상 최대의 제국(帝國)을 건설하였다. 내정개혁에도 힘을 기울여 부족제도를 지방행정제도로 고쳐 5부를 신설하는 등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
21 | 문자(명)왕(文咨(明)王) 491 ~ 519 |
고구려의 제21대 왕(재위 491∼519). 이름 나운(羅雲). 장수왕의 손자이며 고추대가(古鄒大加) 조다(助多)의 아들. 문자명왕(文咨明王)·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한다. 아버지가 일찍 죽었으므로 장수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여러 번 세사(歲使)를 위(魏)나라에 보냈으며, 494년 물길족(勿吉族)에게 멸망한 부여의 왕과 그 일족의 투항을 받아들였다. 497년에 신라 우산성(牛山城), 512년에 백제 가불성(加弗城)·원산성(圓山城)을 점령하였다. 한편, 나제군사동맹을 통한 백제와 신라의 연합작전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기도 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광개토왕 이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여 장수왕을 거쳐 문자왕에 이르는 동안 판도가 넓어지고, 세력은 더욱 강성해져 대국(大國)으로 발전하였다. |
22 | 안장왕(安藏王) 생몰 : ? ~ 531 재위 : 519 ~ 531 |
고구려의 제22대왕 (재위 519~531) 이름은 흥안(興安).. 문자왕의 장자로 태어나 498년(문자왕 7)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왕의 사후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중국 양(梁)나라로부터 영동장군 도독 영평이주제군사 고구려왕 (寧東將軍 都督 營平二州諸軍事 高句麗王)의 지위를 인정받았고, 북위(北魏)로부터도 안동장군 영호 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 (安東將軍 領護 東夷校尉 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의 지위를 인정받았는데, 이처럼 중국의 남북조국과 양면에서 지위를 인정받는 한편, 양측과 조공무역관계를 유지하여 전대에 이미 확립된 대중국 양면외교정책을 따라 행하였고 이러한 양면외교정책은 남북조의 분열을 이용하여 대중국방면의 안정을 추구하던 고구려의 전통적 외교정책이기도 했다. 523년(안장왕 5)과 529년에는 백제를 침략하였다. 이것은 전통적인 남진정책을 계속 추진해나갔음을 보여준다. 내치에 있어서는 자료의 인멸로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다만, 왕의 재위기간에 고구려의 장기간의 안정이 점차 동요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지배체제의 동요 가운데 왕도 피살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중국 미녀와의 연애사건이 있었던 모양이나 그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왕이 죽은 해에 대하여, 《양서》에는 526년으로 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라 531년으로 보고 있다 |
23 | 안원왕(安原王) 생몰 : ? ~ 545 재위 : 531 ~ 545 |
고구려의 제23대왕 (재위 531~545) 일명 곡향강상왕(鵠香岡上王)·향강상왕(香岡上王) 또는 안강상왕(安岡上王)이라 하며 이름은 보연(寶延)이다. 안장왕의 동생으로 형의 사랑을 크게 받았으며 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신장이 7척5촌이나 되고 도량이 넓었다 한다. 즉위와 함께 남조의 양(梁)나라로부터 안장왕이 가졌던 지위를 계승할 것을 인정받았으며 532년(안원왕 2)에는 북위(北魏)로부터 ‘사지절산기상시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 (使持節散騎常侍 領護東夷校尉 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당시 중국은 북위와 양나라가 대립하고 있다가 534년 북위가 동·서위로 분열하게 되는데, 동위와 양나라와의 양면외교를 적극 전개함으로써 서방의 안정을 유지하였다. 동위로부터는 534년에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이라는 지위를 추가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한편, 백제와 신라는 군사동맹을 맺고 향상된 국력을 바탕으로 고구려에 대응함으로써 이들과의 대결은 540년에 백제군이 우산성(牛山城)을 침략하므로 그를 격퇴시켰던 사실 이외에는 대체로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국내적으로는 535년에 홍수·지진·전염병이, 535·536·541년에는 각각 가뭄·황충·기근·태풍 등의 재난이 계속되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욱이 왕의 후사를 둘러싸고, 두 왕비간에 각기 자기 소생을 왕으로 세우려 하여 그들을 후원하는 귀족세력들인 이른바 추군(群)과 세군(細群)의 암투는 고구려사회 전반에 동요를 가져왔던 것 같다. 왕은 545년 추군과 세군의 대립이 무력충돌로 비화하는 와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안원왕의 재위기간에 대해서는 중국의 《양서 梁書》에는 《삼국사기》와 달리 526∼548년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라 531∼545년간으로 보고 있다 |
24 | 양원왕(陽原王) 생몰 : ? ~ 559 재위 : 545 ~ 559 |
고구려의 제24대 왕(재위 545∼559). 휘(諱) 평성(平城). 안원왕의 맏아들.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양강왕(陽崗王)이라고도 한다. 533년(안원왕 3) 태자로 책봉되고, 안원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동위(東魏)·북제(北齊) 등에 조공하여 친선을 도모하고, 47년 백암성(白巖城)·신성(新城:撫順) 등을 중수하였으며, 50년 북제로부터 고구려 왕에 봉해졌다. 51년 돌궐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나, 신라·백제에게 한강 유역을 잃었다. |
25 | 평원왕(平原王) 생몰 : ? ~ 590 재위 : 559 ~ 590 |
고구려 제25대 왕(재위 559∼590). 휘 양성(陽城).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이라고도 한다. 양원왕(陽原王)의 태자로 559년 즉위한 후 중국의 진(陳)·수(隋)·북제(北齊)·후주(後周) 등 여러 나라와 수교하였다. 일찍이 장수왕(長壽王)이 평양의 북동쪽 대성산성(大城山城)으로 국도를 옮긴 뒤 양원왕이 장안성(長安城:평양)에 대규모의 축성 공사를 시작한 것을 586년(평원왕 28) 완성시켜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다. |
26 | 영양왕(嬰陽王) 생몰 : ? ~ 618 재위 : 590 ~ 618 |
고구려 제26대 왕(재위 590∼618). 이름 원(元)·대원(大元). 평원왕의 태자. 평양왕(平陽王)이라고도 한다. 즉위 후 수(隋)나라와 화친을 꾀하다가 598년 말갈(靺鞨) 군사 1만을 이끌고 요서(遼西)를 선공(先攻), 전략적 요충 확보에 나섰다. 이에 수나라 문제(文帝)가 30만 대군으로 침공하였으나 이를 격퇴시키고, 600년 태학(太學)박사 이문진(李文眞)에게 명하여 《유기(留記)》 100권을 재편수, 《신집(新集)》 5권을 만들게 하였다. 608년 신라의 변경을 습격, 우명산성(牛鳴山城)을 함락하고 군사 8,000을 포로로 잡았다. 612년 수나라 양제(煬帝)가 문제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113만 수륙군(水陸軍)으로 쳐들어오자,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을 시켜 살수(薩水)에서 적을 섬멸하고 그 뒤에도 계속 침공군을 무찔러 수나라 멸망의 요인이 되게 하였다. |
27 | 영류왕(榮留王) 생몰 : ? ~ 642 재위 : 618 ~ 642 |
고구려의 제27대 왕(재위 618∼642). 이름 건무(建武)·건성(建成). 영양왕의 이복동생. 즉위하자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수나라 양제(煬帝)의 고구려 침공 때 포로가 된 한인(漢人)을 송환하고 고구려의 포로를 찾아왔다. 624년 당에 조공(朝貢)하고 당나라 고조(高祖)로부터 상주국(上柱國) 요동군공(遼東郡公) 고구려왕에 봉해졌다. 631년 동북쪽의 부여성(扶餘城)으로부터 동남쪽 바다에 이르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의 축조를 시작,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역사(役事)의 감독을 맡겼으나 그의 반역으로 살해되었다. |
28 | 보장왕(寶藏王) 생몰 : ? ~ 682 (?) 재위 : 642 ~ 668 |
고구려의 마지막 제28대 왕(재위 642∼668). 이름 장(藏). 영류왕의 아우·태양왕의 아들.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643년 연개소문의 주장에 따라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道敎)를 구하여, 숙달(叔達) 등 도사(道士) 8명과 함께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을 받아들였다. 645년 당나라 태종이 침입하였으나 연개소문이 독전, 격퇴하였다. 661년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신라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지만, 다음해 연개소문이 다시 격퇴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병사한 뒤에 내분으로 국정이 어지럽자, 668년 나·당(羅唐)연합군은 다시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당시 연개소문의 장남 남생(男生)은 고구려를 배반하고 당나라에 협력한 때이므로, 둘째 아들 남건(男建)이 막리지(莫離支)로서 나·당연합군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는 망하였고, 그는 당나라로 압송되었다. 뒤에 당나라로부터 사평대상백원외동정(司平大常伯員外同正)에 책봉되었으며, 677년(문무왕 17) 요동주도독 조선왕(朝鮮王)에 봉해졌다. 그 지역의 말갈족과 손을 잡고 고구려 부흥을 도모하다가 실패하여, 681년(신문왕 1) 공주(州:쓰촨성 峽)에 유배되었다. 뒤에 당나라 고종은 위위경(衛尉卿)으로 추증하였다. |
중국-단둥에서 (0) | 2019.08.15 |
---|---|
중국-서대총西大塚, (0) | 2019.08.15 |
중국-환도산성고분군丸都山城古墳群, 고구려 귀족고분군高句麗 貴族古墳群, 집안(集安:지안) (0) | 2019.08.14 |
중국-만포진다리 (0) | 2019.08.13 |
중국-광개토대왕릉廣開土大王陵陵, 호태왕릉好太王陵, 태왕릉太王陵,, 영락대왕永樂大王 (0) | 2019.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