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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박열 의사기념관,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경상북도 기념물 제148호

구름에 달

by 碧巖 2019. 8. 21.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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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의사 기념관 朴烈 義士 記念館,  박열의사 생가지生家地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 44(마성면 오천리 95)

경상북도 기념물 제148호

 

 

 

박열 朴烈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 44(오천리 95)

1902(고종 39) ~1974

본관 함양(咸陽).

초명(初名) 박혁식(朴赫植), 

호적명 박준식(朴準植)

상주시 함창읍 구향리의 함창보통학교(咸昌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1917년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京城第二高等普通學校)에 입학,

1919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퇴학당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21년 김판국(金判國), 김약수(金若水), 조봉암(曺奉岩), 서상일(徐相日) 20여 명과 함께

신인연맹(新人聯盟)과 흑양회(黑洋會)를 통합하여 흑도회(黑濤會)를 창설 사회주의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2년 김약수, 백무 등 공산주의 계열과 분리,

1922년 12월  홍진유(洪鎭裕), 장상중(張祥重) 등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흑우회(黑友會)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의 기관지로 흑도(黑濤)·불령선인(不逞鮮人)·현대사회등을 발간하였다.

1923년 비밀결사인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였다.

 

1923년 10월로 예정된 일본 히로히토(裕仁) 황태자 결혼식을 기하여

일본 천황을 비롯한 일본 황실요인을 일거에 폭살시키려고

자신의 애인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같이 거사계획을 추진하던 중

9월 1일에 관동대지진(關東大震災)가 발생하고 불령사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붙잡혔다.

1926년 대역죄로 일본 대심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으나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222개월만에 석방되었다.

 

1946년 일본거류민단의 전신인 신조선건설동맹(新朝鮮建設同盟)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재일거류민단으로 개편되자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5월 백범 김구선생의 부탁을 받아 3열사들의 유해송환 책임을 맡았다. 

즉 항일 의열투쟁의 선봉에 섰다가 일본의 형무소 뒷자리에 버려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등 

3열사의 유해를 고국에 모셔 왔다.

이어 자신의 민족자주적 독립사상과 자유평등 이념을 밝힌  『신조선혁명론』을 발간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축전에 초대되어 귀국했으며, 

고향을 찾아 부인 가네코 묘소를 참배하고 친지들과 옛 스승을 만났다. 

그리고 재단법인 박열장학회를 설립하여 후학들을 위한 장학사업에 뛰어 들었다. 

1949년 5월 영구귀국을 결심하고 서울로 돌아와 머물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서울 점령으로 체포되어,  6월 28일 인민군에 의해 북으로 압송 당하였다. 

납북 이후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참여하였다. 

이 협의회는 당시 북으로 끌려간 조소앙, 안재홍, 엄항섭, 김약수 등 

민족지사들이 남북한 정권 모두에게 자주적 평화통일 원칙을 촉구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조헌영 등과 함께 이 협의회에 몸담으면서 

상무위원과 최고위원, 회장 등을 맡아 평화통일을 촉진하는 활동을 꾸준히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던 중 1974년 1월 17일 73세 나이에 평양에서 숨을 거두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22년 일본 동경에서 발행된 조선청년이라는 제목의 잡지

개 새 끼  박열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 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신조선 혁명론 박열

나는 사고하고 행동한다.

온 몸을 바쳐온

독립운동의 일꾼으로서

한 병졸로서 일한다.

 

나의 사상과 행동은

언제나 올바르고

보다 정의로운 것을

지표로 한다.

 

 

 

 

 

 

 

 

 

 

 

 

 

 

 

 

 

박열의 후원자 후세 다츠지 변호사

일본인이면서도 지극 정성으로 박열을 변호하며 구명에 앞장 선 일본인 변호사

 

 

 

 

 

 

 

 

 //함양(咸陽)박씨  박열(朴烈)의사 가계도//

 

문제공 치암 박충좌文齊公 恥庵 朴忠佐,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  예천 금당실 금곡서원(金谷書院)배향

7세손   찰방(察訪) 朴訥(박눌,1448~1528), 아들 5형제 대과(大科)

                           아들 박거인(朴巨鱗, 掌令)

                                  박형린(朴亨鱗, 吏曹參議)

                                  박홍인(朴洪鱗, 大司憲)

                                  박붕인(朴鵬鱗, 翰林司書)

                                  박종린(朴從鱗, 吏曹正郞, 1496~1553)

                                         셋째아들 박운(朴蕓 : 1535~1596)==박열의 13대조

   조부 박의성朴義聲

아버지 박지수(朴之洙), 호적명 박영수(朴英洙)

어머니 동래정씨 정선동(鄭仙洞) 31녀 중 막내

          형님 박정식(朴庭植)

          형님 박두식(朴斗植)

           박열(朴烈), 초명(初名) 박혁식(朴赫植), 호적명 박준식(朴準植)

           배위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배위 장의숙張義淑

                  장남 박영일朴榮一

                  장녀 박경희朴慶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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