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코 후미코 金子文子
생: 1903년 1월 25일 일본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졸: 1926년 7월 23일 일본 도치키 현 우쓰노미야 형무소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 44(오천리 95)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일본의 사회운동가, 아나키스트.
조선의 사회운동가였던 박열의 아내로,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과 식민지 조선의 독립에 힘썼다.
1923년 도쿄대지진 이후 구속되어 대역죄로 사형을 언도받고,
무기형으로 감형되어 수감중에 사망했다.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일본의 사회운동가, 한국의 독립 열사.
한국 이름은 박문자.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 부모에게서 버림받고 떠돌면서 자랐다.
10살이 된 1912년 조선으로 넘어와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의 고모 집에서 기식했으며,
부강심상소학교에서 공부했다.
어린 나이에 식모살이를 하는 등 구박과 차별을 받으면서 비참한 환경에서 살았고,
이웃에게서 얻어 먹은 보리밥에 감동을 받았을 만큼 굶주렸다.
1919년 3.1운동을 목격했는데,
이때의 기억은 그녀에게 식민지의 억압받는 민중으로서의 조선인에게 공감하고
독립적인 자아를 일깨우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919년 가네코는 17살에 일본으로 돌아갔으며, 아버지와의 불화로 도쿄로 옮겨 친척집에서 기거했다.
그녀는 신문배달과 가게 점원 등으로 일하면서
생계를 잇는 가운데 구조적으로 현실을 타개하는 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녀는 영어교습소에서 영어를 공부하면서
도쿄에 머물던 많은 조선인들과 어울리면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에 대해 공부했다.
그녀는 결국 무정부주의에 이끌려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로 구성된 '흑도회'의 성립을 주도하고 기관지인 <흑도>를 펴냈다.
이 시기의 그녀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 모두를 거부한 채 피억압자로서의 여성의 사회적 정체성에 관심을 가졌고,
입장이 유사한 식민지 민중의 삶에 대해서 공감했으며,
억압의 주체인 국가 권력과 기존 체제에 대한 부정과 저항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무기징역 감형 후 법정에서.. 당시 23세 가네코 후미코
"조선에 바친 조선민족으로서 선택한 길인데
몸과 마음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간
무기징역의 일본감옥 속에서 더 살아보았자
그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차라리 죽어서 그 뜻을 부군 박열에게 바치고
조선땅에 내 뼈를 묻음으로써
모든 것을 조선을 위해 바친다면
그 뜻을 언젠가 누구라도 알아주게 될 것이 아닌가?”
“나는 천황이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동일한 인간이지 결코 신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폭탄을 던져
천황도 우리와 똑같이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1922년 2월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동경의 유라쿠(有樂)정 스끼야바시(數崎屋橋) 근처에 있는
이와사끼(岩崎) 오뎅집에서 일하면서 오전의 한가한 틈을 이용해 세이코쿠(正則) 영어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와사키(岩崎)라는 사회주의자가 경영하는 오뎅집으로
주로 지식인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의 집합장소로 자주 이용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정우영을 만나 알게되어 세이코쿠 영어학교 가는 도중
정우영의 하숙집에 들러 조선청년이라는 제목의 잡지 교정 인쇄를 보게 되었다.
책에는 “개새끼”라는 박열의 시가 있었다.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박열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았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 것 없는 나는/ 개 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이 시를 읽고 강한 감동을 느꼈었다. 뭔가 힘이 강한 시였다.
한구 한구마다 나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갔다. 그리고 이 시를 다 읽었을 때 마치 황홀에 젖어 있을 정도였다.
나의 가슴에 피는 들끓고 어떤 힘이 나의 전 생명을 떠 받치고 있었다.
그리고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정우영에게
“지금 오랫동안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을 이 시속에서 찾은 느낌이 듭니다”라고 말하였다.
박열의 강열함에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한층 더 이끌려
“내가 찾고 있던 사람, 내가 하고 싶었던 일, 그것은 틀림없이 그 사람 안에 있다.
그 사람이야말로 내가 찾고 있던 사람이다. 그야말로 나의 일을 갖고 있다”라고 느꼈다.
이 때 박열은 일정한 직업도 없이 친한 친구집을 전전하면서 생활을 하였다.
얼마가지 않아 1922년 5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박열과 만나서
박열의 사상과 행동 생활방식 속에서 자기의 삶의 방향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평생 동지이자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를 만나게 된 박열의사는
아나키즘단체인 흑도회·흑우회 등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한편,
흑도회 기관지인《흑도》·《민중운동(民衆運動)》·《후토이센징(太い鮮人》·《현사회(現社會)》등의 잡지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1923년 4월 의사는 불령사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의열 투쟁을 추진하였다.
그해 가을 일본 태자의 결혼식 소식을 전해들은 선생은 의열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거사에 사용될 폭탄 구입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923년 9월 관동에 대지진이 발생하였고,
이를 기회로 일제는 한국인들과 일본내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탄압을 자행하였다.
이때 선생과 가네코 후미코를 비롯한 불령사 회원들도 피체되었고,
경찰의 취조 도중에 일왕 폭살을 위해 추진한 폭탄 반입계획이 드러나게 되었다.
일본 경찰은 9월 하순부터 10월 상순에 이르러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외
불령사 회원 14명을 차례로 검거 검속 취조하여 박열을 비롯한 불령사 동지 16명을
치안경찰법 제10조를 적용(비밀결사는 이를 금(禁)함)
10월 20일 동경지방재판소 검사국에 의해 치안경찰법 위반용의로 기소 이찌가야형무소에 수감시켰다.
또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박열에게 대역죄 혐의를 적용, 구속 기소하고
1923년 10월 24일 이찌가야형무소에 수감되어 재판에 회부
1925년 6월 6일까지 2년반 동안 동경지방재판소에서 무려 17회에 걸친 예심판사 다테마쓰의 예심을 받았다.
의사박열선생 추모비와 기념관
박열은 당시 조선인 유학생 회장이던 조헌영(1901~1988. 조지훈시인의 아버지)의
조선시대의 관복과, 신랑이 혼례 때 예복으로 입던 사모관대를 지입하여 관복차림으로 법정에 출정한다.
또 재판장은 박열을 피고라고 하지 않고 ‘그편’이라고 부르고 박열은 재판관을 ‘그대’라고 호칭했다.
실로 일본 재판 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1923년부터 1925년에 걸친 총 20여 회의 조사과정에서
박열 의사는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그리고 사형 판결이 나자 박열 의사는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고 일갈하며,
불굴의 독립의지와 민족정신을 표출하였다.
대심원은 1926년 3월 25일 박열과 가네코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어 10일 뒤 무기징역으로 형을 낮추었다.
이에 대해 일본의 우익세력과 군부는 이를 극렬히 반대하면서 내각에 대한 탄핵 움직임까지 보였다.
이에 더해 이른바 괴사진 춘화(春畵)사건마저 일어나 정국(政局)을 뒤흔들었으니,
법정안에서 같은 피고인으로서 피고인인 박열의 무릅에 앉아 있는 가네코 후미코의 사진이 유출 사건이다.
이후 무기형으로 감형되었지만 일제 패망 이후에도 ‘대역사범’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지 못하다가
1945년 10월 27일에야 풀려났다. 그러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옥중에서 사망했다.
일본 당국은 가네코씨가 그 해 7월 일본 우쓰노미야 형무소 여죄수 독방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가네코후미코가 자결한 후 그녀의 소원대로 그녀의 유골은 형 박정식과 헌병들의 호위속에 문경으로 옮겨져
주흘산 자락 팔령 중턱 아무도 찾지않는 박열의 선대들이 잠들어 있는
선산에 봉분도 없이 묻히고 철저히 통제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역사 속에 사라졌다.
박열의사는 1945년 해방이 되고도 출옥하지 못하다가
1945년 10월에 아키타 형무소 오오다테 지소에서 출옥하고 전 재일교포와 조국의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재일 교포의 새로운 지도자로 재일본 대한민국 거류민단의 전신인 신조선건설 동맹을 결성한다.
이 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거류민단의 초대부터 5대 회장을 역임하고
1949년 조국에 귀국하여 모든 정치적 유혹을 뿌리치고
재단법인 박열장학회를 결성하여 인재들을 일본으로 유학보내기 시작하였으나
1950년 6. 25 동란으로 납북되어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장을 맡고있다가
1974년 1월 17일에 73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타계후 1989년 삼일절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2003년 12월 팔령의 깊은 산속에 있던 가네코후미코 묘소는
박열의사기념사업회에 의해 오천리의 박열의사 기념공원 경내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성지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가네코 여사는 ‘일본을 움직인 10대 여장부’라고 하여 그에 대한 일본인들의 추모 열기는 대단하다.
문경의 기념관 옆 묘소에는 지금도 매년 많은 일본인들이 다녀가고 있다고 한다.
기념공원 열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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