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의왕-김노金魯, 첨지중추부사 동고 김노.僉知中樞府事 東皐 金魯

구름에 달

by 碧巖 2019. 10. 8. 21:40

본문

728x90

 

 

첨지중추부사 김노 僉知中樞府事 金魯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 산81

 

 

첨지중추부사 동고 김노.僉知中樞府事 東皐 金魯

 

[1498(연산군 4)1548(명종 3)]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의 문신이자 서예가. 홍문관(弘文館) 직제학(直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는 경참(景參), 는 동고(東皐).   본관 안동(安東),

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 김희수(金希壽),

어머니 남원 양씨(南原梁氏)는 삭녕군수(朔寧郡守) 양치(梁治)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양주목사(楊州牧使) 김숙연(金叔演)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김자행(金自行)이다.

호음 정사룡(湖陰 鄭士龍)과  절친이었다.

서법이 서성 왕희지(書聖 王羲之)의 필체를 따랐는데,

매우 뛰어나서 당시 조정의 모든 전책(典冊)은 물론 경대부(卿大夫)의 비갈(碑碣)마저 그가 썼다.

 

 

1516(중종 11)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19세였다.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공부하다가, 28세가 되던 1525(중종 20)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처음에는 승문원(承文院) 권지(權知)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차례에 따라서 정자(正字)로 승진하였다. 얼마 뒤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고, 3년 상례를 끝마친 후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다.

1530(중종 25) 홍문관 정자에 임명되었다가,

1531(중종 26) 홍문관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척신 김안로(金安老)를 유배에서 풀어주는 것에 반대하는 바람에

          이후 김안로가 다시 조정에 기용되면서 문의현(文義縣)으로 귀양을 갔다

 

 

1537(중종 32) 김안로가 문정왕후(文定王后)를 폐위시키려고 하다가 죽음을 당하자,

김노는 귀양에서 풀려나 예문관(藝文館) 대교(待敎)를 거쳐 예문관 봉교(奉敎)로 승진하였고,

이어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으로 옮겼다가

1539(중종 34) 이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

1540(중종 35) 가을에 동료들과 농담으로 한 말이 당시의 우찬성(右贊成)성세창(成世昌)에게 저촉이 되었는데,

좌찬성 소세양(蘇世讓)이 중국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 문서의 부본(副本)에서 글자가 삐뚤고,

또 글자의 크기도 같지 않다고 지적하는 바람에

그 글씨를 썼던 사자관(寫字官)  김노는 체직되고 품계도 낮추어졌다.

이때 성세창의 당질 성순(成詢)이 좌찬성 소세양을 부추겨서 김노를 중상한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김노는 좌천되어 서반직(西班職)의 사과(司果)에 임명되었다.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金公之墓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김공지묘

 

1545(인종 1)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7월 인종(仁宗)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의정부 사인에 임명되었다.

1546(명종 1)에는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어,

문정왕후의 명에 따라 임금이 억제하고 경계해야 할 억계(抑戒)의 글을 병풍에 써서 명종에게 바쳤다.

1547(명종 2) 내섬시 정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한직인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로 옮겼다.

 

그는 신병으로 휴식이 많아 항상 병가(病暇) 상태였기 때문에 관직에 심력을 다하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여겨,

()나라 북경(北京)에 가는 사신 행차에 끼이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천추절(千秋節)의 진하사(進賀使)에 임명되었으나,

요동(遼東), 북경(北京)으로 가는 험난한 길 때문에 병이 더욱 악화되었다.

돌아온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병이 다시 도지는 바람에

1548(명종 3) 1023일 서울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겨우 51세였다.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金公魯之墓  配贈貞夫人廣州李氏 墓祔葬子左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김공노지묘  배증정부인광주이씨 묘부장자좌

 

한편 그의 집안은 모두 문학과 서예로 후세에 저명하였다.

아버지 김희수는 해서(楷書)에 능하였으며,  김노도 필법이 아름다웠으므로,

김희수와 김노 부자를 두고 동진(東晋)의 왕희지와 그의 아들 왕헌지(王獻之)와 같다고 칭송하였다.

중종과 인종의 국상 때에는 종묘의 신주와 원릉(園陵)의 묘지명(墓誌銘)을 모두 김노가 썼다.

그는 서법 연구뿐만 아니라, 각종 책문(冊文)과 유명한 인물의 비문도 많이 썼다.

대표적인 것으로 이가서법(二家書法)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경기도 광주(廣州)에 있는 제안대군이침묘비(齊安大君李琛墓碑),

경기도 파주에 있는 청송성수침묘비(聽松成守琛墓碑),

영상정광필묘비(領相鄭光弼墓碑)등 다수가 있다.

 

 

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 金公 墓碣銘 幷序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김공 묘갈명 병서         정사룡(鄭士龍)

 

 

 

 

 

 

 

 

 

 

 

 

 

 

 

///첨중추부사 고 김노 가계도///

 9대조 김방경金方慶 충렬공 안동김씨 중시조

 8대조 김순金恂 상락군 문영공 上洛君 文英公

 7대조 김영후金永煦 복창부원군 상락후 정간공 福昌府院君 上洛候 貞簡公

 6대조 김장 金萇

 5대조 김수金綏 서운관정공파 파조

고조부 김질金晊 집의, 증 호조참판

증조부 김자행金自行 관찰사공  사위 徐甄서견,

   조부 김숙연金叔演 청주목사, 광주목사, 양주목사 증 이조참판

          김계연金季演 주부공(김희수의 숙부)

      부 김희수金希壽 유연재

           김노金魯 동고공

              자 김홍도金弘度 남봉(南峰)

 

벽암 두릉연가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