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 민영휘(荷汀 閔泳徽), 초명 민영준(閔泳駿)
강원도 춘천시 동면 장학리 산14
皇考 賜號 荷汀府君 神道碑
황고 사호 하정부군 신도비
불초 형식 읍혈근찬(不肖 衡植 泣血謹撰)
불초 대식 읍혈근서(不肖 大植 泣血謹書)
불초 규식 읍혈전액 (不肖 奎植 泣血謹篆)
오호라! 우리 선친은 지극한 품성과 탁월할 행적으로 후세에 드리워 보여줄 만한 것이 있으니,
진실로 우리 불초자들이 사사로이 할 수 있는 바도 아니며, 또한 우리 불초자들이 감히 말할 수 있는 바도 아니다.
그러나 선친이 일찍이 수비명(壽碑銘)을 직접 짓고 남에게 비문을 구하지 말라고 훈계하셨다.
그 글이 장차 인멸되어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기에 삼가 그의 행적 가운데 현저하게 드러나고
중요한 것과 관직에 나아간 후 빠트린 이력을 삼가 뽑고,
수장비에서 빠트리거나 생략한 것을 추가로 보충하니 실제로 불초자들이 어쩔 수 없이 한 것이다.
공은 성이 민(閔), 휘는 영휘(泳徽), 字는 군팔(君八), 하사받은 號는 하정(荷汀),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상의봉어를 지낸 휘 칭도(稱道)가 공의 시조이며,
20대를 내려와 인재(訒齋)라는 호를 쓴 대사헌 휘 시중(蓍重)이 공의 7대조이다.
6대를 전해져 휘 두호(斗鎬)는 판돈녕을 역임하고 의정에 추증되었고 諡號는 효헌이며,
정경부인에 추증된 청송심씨는 협판에 추증된 휘 영우(愚永)의 따님인데,
이 분들이 각각 공의 부친과 모친으로, 철종 임자년(1852) 5월 15일에 광주 옛 고을의 마을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훤칠한 체구에 순수한 얼굴을 지녔고 머리가 명석하였으며 수염은 성글지만 길었다.
소리는 금석을 울리는 듯 하였고 성품과 도량은 어질면서 강직하였다.
총명함이 특히 뛰어나 한번 보고 한번 들으면 조금이라도 잊지를 않았다.
일을 처리함은 삼가고 조심하며 질문하기를 좋아하였다.
부인은 평산신씨로 감역을 지낸 휘 명석의 따님으로 생전에 정경부인에 봉해졌다.
부인으로서의 거동과 규범은 부군이 지은 추기(追記)에 갖추어 수록되어 있다.
기유년(1849) 4월 5일에 태어나 을묘년(1915) 정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로 21년 후인 을해년(1935) 12월 5일 경진일에 공은 경성 관훈동 죽동의 관사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84세였다. 13일 무자일에 춘천 장항리 계좌 언덕 부인의 무덤 오른쪽에 합장하였다.
자식인 불초자 민형식은 본인인데 아들로 전위 민병주(丙疇), 민병길(丙吉)을 두었고,
딸은 전 전위(前 典衛)인 안동 김순한(金舜漢)에게 출가하였다.
둘째 아들 민대식(大植)은 아들로 전 감조관 민병수(丙壽), 민병옥(丙玉),
계부에게 출계한 민병도(丙燾), 민병완(丙玩), 민병선(丙瑄), 민병소(丙玿), 민병무(丙珷)를 두었고,
딸은 4명인데 첫째는 인동(仁同) 장지환(張智煥)에게 출가하였다.
셋째 아들 전 비서원증 민규식(奎植)은 아들로 민병서(丙瑞), 민병유(丙瑜)를 두었고 딸은 하나이다.
막내아들 참봉 민천식(天植)은 민병도(丙燾)를 양아들로 삼았다.
사위 이유익(李裕翼)은 아들로 이홍재(弘宰), 이달재(達宰)를 두었고 딸은 안동 김규호(金虎圭)에게 출가하였다.
민병주(丙疇)는 아들로 민성기(聖基), 민승기(承基), 민효기(孝基)와 딸 셋을 두었다.
민병길(丙吉)은 아들 민호기(虎基)를 두었고,
민병수(丙壽)는 아들 민덕기(德基)와 민헌기(獻基), 민공기(公基), 민석기(奭基)와 여섯 딸을 두었는데,
첫째는 김해 김관우(金寬羽)에게 출가하였다.
민병옥(丙玉)은 아들 민왕기(旺基)와 딸 셋을 두었고,
민병완(丙玩)은 아들 민흥기(興基), 민풍기(豊基)와 딸 하나를 두었다.
민병선(丙瑄)은 딸 셋을 두었고, 민병도(丙燾)는 딸 둘을 두었다.
민성기(聖基)는 아들 민경보(庚輔)와 딸 하나를 두었고,
민덕기(德基)는 아들 민경현(庚玄), 민경백(庚白), 민경목(庚穆), 민경화(庚和)와 딸 하나를 두었다.
장지환(張智煥)은 아들 장정기(正基)를,
김관우는(金寬羽)는 아들 김광세(光世)와 김광집(光集)을 두었다.
공은 갑오년(1894)에 관직을 보국숭록대부 좌찬성이사에서 그만두고
봉조하로 치사할 것을 간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난리를 만나 처리되지 못하였다.
그 후 궁내부특진관, 중추의장, 장례경, 규장학사, 태의경, 육군부장, 헌병사령관, 호위총관, 시종경,
표훈총재, 규장제학지후관을 역임하였는데 대다수가 겹쳐서 기록하지 않는다.
일강관, 친임내대신, 상방제조는 겸함(兼銜: 겸직)이다.
산릉(山陵: 왕족의 장례를 맡는 일) 효경전상호천릉도감,
교방사는 제거(提擧: 녹봉이 지급되지 않고 관료의 신분만 가진 무록관(無祿官))이다.
전교부총재, 진찬진연당상, 의궤영왕관빈은 경례(慶禮: 나라의 경사에 시행한 행사에서 예법을 담당하는 일)이다.
책시부사, 산릉석물도제조, 석의제조는 돈역(敦役: 국왕의 장례를 치를 때 직접 공사를 감독하는 일)이다.
1등에 훈작되고 특별히 대훈(大勳)에 특서된 것은 그의 품질(品秩)이다.
광무와 융희 연간에 한가하고 중요하지 않은 관직을 맡아 후반(候班)만 하고
중서성에 한 걸음도 들이지 않는 것으로 제한을 정한 것은 공이 원래 지니고 있던 생각을 굳게 지킨 것이다.
어렸을 때 한강을 건너며 시를 지었는데,
“십리 남쪽에서 향기로운 풀빛이 다가오는데, 한 사람이 큰 강물 소리 들리는 한가운데 앉았다.”라고 하였다.
상국 김병학(金炳學)이 듣고는 크게 허여하며,
“이 사람은 나라의 그릇이니 훗날 반드시 내 지위에 오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가주서로 임금의 명을 대기하면서, 글을 적어 내는 것이 상제하고 민첩하였다.
임금이 기뻐하며,
“이번 과거에서 한 명의 뛰어난 신하를 얻었다.”라고 할 정도로 임금의 칭찬과 사랑이 매우 중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영변을 다스리면서 백성을 구휼하고 학문을 진흥시켰고 향약을 만들어 시행하였다.
동경에 주재하면서 공관을 만들어 열고 이치에 맞게 일을 처리하였다.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해서는 과거시험을 실시할 것을 청하여 문학을 진흥시켰다.
기자의 무덤[墓]을 높혀 능(陵)으로 격상시켜 백성들로 하여금 성인을 그리워하도록 교육시켰다.
임기가 다 되어 돌아올 때 선혜청은 텅 비어 있었다.
공이 당상관으로 있었을 때는 해당 문서를 각 관청으로 이첩하면서 직접 스스로 판단하여 결재를 하였다.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아 하룻밤 사이에 오른쪽 소매가 해지고 구멍이 났으며,
수 개월이 지나자 재화와 곡식이 유통되었고 창고는 가득 찼다.
쌓아둠을 오랫동안 하고 아직 반포하지 않았으나 군수 물품과 관료의 봉급은 지급하고 공급하지 않음이 없었다. 국상(國喪)을 당하였을 때는 한결같이 의궤의 예법에 맞춰 조금도 구차하게 하거나 간소하게 하지 않았다.
순차적으로 공시(貢市) 를 담당하는 관직을 맡아 정리가 엄하고 밝으니,
사악하거나 속이는 일이 저절로 없어져 세금의 정책이 다시 새롭게 되었다.
북한산성을 중수할 때는 튼튼하고 치밀하게 하여 완전하고 견고하였다.
또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수리하여 새로이 군영을 설치하면서 규모가 엄격하게 정리되었고,
성지(城池)를 새로 닦고 식량을 비축하며 군인들을 훈련시켜
뜻밖의 전쟁에 대비하게 하면서 힘을 다 쏟지 않음이 없었다.
빈객의 지위로 이연(离筵,왕세자가 강론하는 자리)에서 시강(侍講)할 때는 뜻을 풀이함이 자세하면서도 밝아,
임금이 매우 칭찬하면서 “이 사람은 문무를 모두 갖춘 인재이다.”라고 하였다.
갑오년(1894) 봄에 떼를 지어 다니며 약탈과 살인을 일삼는 무리들이 창궐하자[갑오농민운동을 말한다]
임금이 청나라에 구원을 청하려고 하였다.
공이 임금 앞에 나아가 “어찌 차마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 우리 백성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불쌍하게도 저 우매한 백성들은 살아갈 곳을 잃게 되어 이렇게 나라를 어지럽히는 일을 초래하였습니다.
의당 덕스러운 교화를 펼쳐 그들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보여 주어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고쳐 각자 자기가 맡은 일을 편안하게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끝까지 마음을 고치지 않는다면
임금의 군대로 그들의 우두머리를 주살한다면 백성들의 마음은 저절로 안정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위급한 사태가 있게 되면
신은 청컨대 두 영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목숨을 바쳐 그들을 막아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말이 아직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끝내 난리가 터졌다.
공은 마침내 천진으로 가서 임금의 밀지를 아뢰게 되었다.
상강(湘江)과 호강(滬江) 사이를 두루 돌아다니다 을미년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귀국하였다.
이 해 겨울에 임금이 아관(俄館)으로 거처를 옮겼다.
공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안정시키는 계책을 임금에게 아뢰었다.
임금이 군정(軍政)을 맡기고자 하였으나 공은 불가하다는 뜻을 갖추어 아뢰고 사양하며 명을 받들지 않았다.
이때 러시아어 통역관인 김홍륙(金鴻陸)이 러시아 대사인 아롱다단(幻弄多端)에게 군정을 맡기려고 하였다.
공이 정색을 하고 문서를 찢어버리며, “외국 대사가 어찌 우리 내정에 관여하겠습니까?
또 홍륙은 말로 먹고사는 일개 통역일 뿐인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한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드디어 관직을 버리고 교외로 물러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역적 홍륙이 독이 든 차를 임금에게 올려
임금과 동궁이 갑자기 병을 앓게 되었고 동궁이 더욱 위중하였다.
나라 안과 밖이 이 일로 당황하고 혼란하자 임금이 급히 공을 불러 태의경으로 삼았다.
공이 의관 기창(基昌)을 거느리고 입조하여 진료하고 약을 제조하여 올려 마침내 다시 회복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노봉(老峰) 문충공 민정중(文忠公 閔鼎重)이
의관으로서 동지중추부사를 제수받고 합천군수와 삭녕현감을 지낸 유상(柳瑺) 을 등용했던 것에 견주었다.
병오년(1906)에 휘문학교(徽文學校)를 세웠다.
예전에 집에다 글방을 설치하였는데 배우려는 무리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집이 다 수용할 수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그 소식을 듣고 관상감사도시의 터를 하사하였고,
공이 또 관청의 땅과 민가의 여러 구역을 사들여 합쳐서 학교 건물을 세운 것이다.
공사가 끝나자 임금이 그 학교의 편액을 휘문(徽文)으로 하라고 명을 내리셨으니,
그의 이름에서 취하여 그를 기린 것이다.
후에 백만을 들여 재단법인을 만드니,
처음부터 끝까지 자본금과 경영에 필요한 비용은 모두 집안의 가산으로 채운 것이다.
이때 학도들이 학교 안에 동상을 세우고 은혜를 잊지 말자고 적었다.
이 학교가 설립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최초의 효시가 되니,
그가 실업에도 널리 관심을 지녀 또한 진흥시키기를 도모함에 힘쓴 실질적인 결실이다.
공이 시대의 흐름을 살핌에 남들보다 빨리 내다보는 능력이 밝았으니,
어찌 대중을 위하여 후생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려는 것이 아닌 것이 있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술년(1910) 국치를 당했을 때
모욕을 참고 수치를 머금으면서도 오로지 왕실을 위하여 변고에 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미년(1919)과 병인년(1926)에
고종과 순종 두 임금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자 공은 애통해하며 살고자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자 오직 임금의 국상을 처리함에 온 몸과 수고로움을 다하였다.
청량(淸凉), 용마(龍馬)에 모시자는 여러 의론을 배척하고
금곡(金谷)의 홍릉(洪陵)과 유릉(裕陵)에 각각 합장한 것이 이것이다. 이것은 두 임금의 유지를 따른 것이다.
공의 지극한 품성은 하늘에서 타고났다.
모친이 병이 있어 일어나 움직이고 음식을 평소대로 먹지 못한 것이 10년이었는데,
의원을 모셔오고 약을 구함에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가리지 않았다.
모친상을 당하자 날마다 십리를 가서 반드시 무덤에 참배하였다.
임인년(1902) 부친인 효헌공이 병에 걸려 자리에 누웠는데,
이때 공은 지위도 높고 나이도 많거니와 또 자손과 종들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직접 더우면 부채질을 하고 추우면 불을 때며 약을 맛보았고, 거상(居喪)을 예법에 맞게 하였다.
비록 비천하거나 어린 사람이 와서 조문하면
또한 반드시 곡을 하면서 맞이하여 마치 존귀하고 뛰어난 이를 받드는 것처럼 하였다.
효성과 정절이 뛰어난 이를 포상하고 곤궁하고 재난에 빠진 이를 구휼해주는 것은 늘상 하는 일이었다.
오호라! 공의 국가의 일을 맡아 처리하면서 드러난 공적은 의당 여기에서 그치지 않아야 하는데,
마침내 여기에서 그쳤으니, 아! 나이가 그렇게 된 것인가, 하늘의 뜻인가.
학교를 세운 하나의 일만으로도 공은 30년간 마음과 신경을 썼으니,
영재를 교육하는데 힘써서 재능과 지식을 깨우쳐 열어준 이가 이미 많았다.
그들이 일을 이루고 공을 세움은 또한 앞으로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은 거의 공이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오호라! 성대한 덕을 불초자들이 어찌 다 알 수 있겠으며, 또한 어찌 감히 군더더기 말로 덧붙이겠는가.
오직 사람들이 하는 말과 역사서에 기록된 것만을 모아서 감히 만세에 고한다.
단기 4275년 임오년(1942) 8월 일에 세운다.
하정 민영휘 荷汀 閔泳徽, 초명 민영준閔泳駿
1852년(철종 3) 5월 15일 서울에서 출생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군팔(君八), 호는 하정(荷汀)이다.
초명은 민영준(閔泳駿)이었으나 1901년 4월 민영휘(閔泳徽)로 개명했다.
증(贈)영의정 민두호(閔斗鎬)의 아들이다.
조선 말기에 판의금부사, 이조판서, 궁내부 특진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대한제국기에는 육군부장, 헌병대 사령관, 표훈원 총재, 신경봉공회 고문, 정우회(政友會) 총재 등을 지냈다.
일제강점기에는 대동사문회 회장, 모성공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35년 12월 30일 사망했다.
1877년(고종 14) 정시문과에 급제해 주서·정언을 지내고,
민씨척족세력을 배경으로 동지경연사·지돈녕부사 등을 지냈다.
1884년 갑신정변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고,
1886년 참의내무부사·도승지, 이듬해 주일변리대신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귀국한 뒤 민씨척족세력의 우두머리로 경리사·이조판서·선혜아문당상·친군경리사 등을 역임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청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도움을 요청해 토벌하려 했다.
이후 갑오개혁이 실시되자 탐관오리로 논죄되어 전라남도 영광 임자도로 귀양가게 되었으나
탈출해 벽동의 청군부대에 은신하고 있다가 중국으로 도망갔다.
1896년 대사령으로 귀국한 뒤 중추원의장·헌병대사령관 등을 지냈다.
한편 상업은행의 전신인 천일은행을 세웠고,
1906년 5월 휘문고등학교의 전신인 휘문의숙을 설립하였다.
1907년 9월 19일 육군 부장직에서 퇴역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 후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으며, 그밖에 매국 공채 5만원을 사들였다.
민영휘는 경제에 밝아 쉽게 갑부가 되었다.
관직에 있을 때 수탈한 재물을 이후에 잘 불려,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 최고의 갑부 중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었다.
輔國崇祿大夫行議政府左贊成兼 吏曹判書內務府事判義禁府事 知經筵春秋館事知訓鍊院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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