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숙공 원충갑 忠肅公元沖甲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38호.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 산25
충숙공 원충갑 忠肅公元沖甲
1250년(고종37) ~ 1321년(충숙왕8)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향공진사(鄕貢進士)로 원주의 별초(別抄)에 들어가 있다가
1291년(충렬왕 17) 합단적(哈丹賊)이 침입하여 원주성을 포위하자
전후 10차에 걸쳐 적을 크게 무찔러 예봉을 꺾음으로써 성을 지켰을 뿐 아니라 후세에까지 무명(武名)을 남겼다.
중랑장, 장군 등 여러 벼슬을 거쳐 삼사우윤(三司右尹)에 올랐다.
당시 간신 오기(吳祈)가 충렬왕 부자를 이간하고 어진 신하를 모해하는 바가 많았기 때문에
원나라 사신인 단사관(斷事官) 티므르부카[帖木兒不花]에게 오기(吳祈)의 처벌을 호소하였다.
1303년 홍자번(洪子藩)과 함께 오기(吳祈)를 잡아 원나라에 압송하였으며,
충선왕 때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이 되었다.
합단적(哈丹賊: 원의 반란군)을 물리친 공으로
1319년(충숙왕 6) 추성분용정란광국공신(推誠奮勇定亂匡國功臣)이 되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합단적(哈丹賊: 원의 반란군)의 침입
○고려 충렬왕 16년(1290) 원나라 반군 <내안(乃顔)>의 부장이었던 <합단(哈丹)>이 만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원나라 장수 <내만대(乃蠻帶)>에게 패하자 오히려 방향을 돌려 고려를 침입한 사건이다. ○고려는 중군만호 <정수기(鄭守琪)>, 좌군만호 <박지량>, 우군만호 <김흔(金忻)>으로 하여금 각각 금기산동ㆍ이천현계ㆍ권가현계를 지키도록 하는 한편, 원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합단의 무리는 원나라의 쌍성을 점령하고 고려의 등주(안변)를 함락하였으며, 이듬해 철령을 넘어 교주도 양근을 점령하였다. 이에 왕은 강화로 피란하는 한편 원주별초 소속의 <원충갑(元沖甲)>이 원주에 들어온 적을 물리쳤다. 원나라도 1만의 군사를 보내주었고, 원주에서 패한 합단의 잔당은 계속 남하하여, 주력은 충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들은 다시 연기(燕岐)에 집결하였다가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의 급습으로 대패하였다. (현재 세종시에 연기대첩비가 있음) 그들의 기병부대는 다시 전열을 정비하였으나 <한희유(韓希愈)>의 추격으로 <합단>과 아들 <노적(老的)>은 2,000여 기를 이끌고 북쪽으로 도망하였다. 이로써 1년 6개월 동안 <합단>의 침입은 끝나고 9월 왕은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
○ 원주원씨 <원충갑>의 따님이 원주이씨 중시조인 부령공 <이희백(李希伯)>의 배위로서
<원충갑>의 묘역과 사위인 <이희백>의 묘역이 같은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 그리고 치악산 영원산성 안에 ‘원충갑사’를 세워 제사를 모시다가
현종 10년(1669) 사당을 세워
원충갑을 주향으로 하고, <김제갑(金悌甲)>과 <원호(元豪)>를 배향하였으며,
현종 11년(1670) 윤 2월 7일 ‘충렬사’로 사액되었다.
○ 충렬사는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2009년 5월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 402-3에 복원되었다.
충렬사의 사액현판은 충북괴산 <김제갑> 목사의 후손인 안동김씨 제학공파 문숙공 종손가에 보관하고 있다가
원주시의 충렬사 현판 반환 교섭 결과, 2009년 4월 현판을 원주시에 기증하기로 결정하였다.
원주시는 사액현판 원본이 훼손이 심하여 보전 처리한 뒤
특수재질의 보관함을 만들어 원주시립박물관에 영구 보관하기로 하였다.
高麗匡國功臣光祿大夫鷹揚上將軍原州元諡忠肅公諱冲甲之墓 配貞敬夫人原州(益興)李氏合祔
고려광국공신광록대부응양상장군원주원시충숙공휘충갑지묘 배정경부인원주(익흥)이씨합부
고려사열전
원충갑(元冲甲)은 원주(原州 :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 사람으로 체구가 왜소했지만
영리하고 날래어 눈이 번갯불처럼 빛났으며 위기를 맞으면 능히 몸을 던졌다.
향공진사(鄕貢進士)로서 원주 별초(別抄)에 소속되어 있었다.
충렬왕 때 카다안[哈丹]의 적군이 철령(鐵嶺)을 넘어 난입하자
각 고을에서는 소문만 듣고도 다들 달아나는 통에 수비를 맡을 사람조차 없었다.
적이 원주로 들어와 진을 치고는
쉰 명가량의 기병이 치악성(雉岳城 :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 치악산) 아래에서 노략질을 하자,
원충갑이 보병 여섯 명을 데리고 그들을 쫓아낸 후 말 여덟 필을 빼앗아 돌아왔다.
도라도[都刺闍]·토에나[禿於乃]·보랄[孛蘭] 등이 거느린 군사 4백 명이 다시 성 아래로 와서
녹봉으로 줄 쌀을 탈취하자 원충갑은 중산(仲山) 등 일곱 명의 결사대와 함께 숨어서 감시했다.
중산이 먼저 적들 속으로 뛰어들어 한 명을 죽이고는 형문(荊門) 밖까지 추격하니
적은 안장 얹은 말들을 버리고 달아났다.
방호별감(防護別監) 복규(卜奎)가 크게 기뻐하며 빼앗은 말 스물다섯 필을 모두 그에게 주었다.
적이 수많은 깃발을 펼쳐들고 다시 쳐들어와 성을 겹겹이 포위한 후 글을 적어보내 항복을 권유했지만,
원충갑이 쫒아나와 그를 죽이고는 그 글을 머리에 매어 되던졌다.
적이 퇴각해 성을 공격할 수많은 장비들을 보수하기 시작하자 성 안의 사람들이 크게 겁을 내었다.
적이 포로로 잡은 여자 두 명을 다시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자 원충갑은 또 그들마저 죽여 버렸다.
적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온갖 작전으로 공격하니 빗발치는 화살에 성이 거의 함락될 지경에 빠졌다.
그러나 흥원창판관(興元倉判官) 조신(曺愼)이 성 밖으로 나가 싸우고
원충갑이 급히 말을 달려 동쪽 봉우리로 올라가서 한 명의 목을 베니 적이 차츰 혼란해졌다.
별장(別將) 강백송(康伯松) 등 서른여 명이 돕는 가운데
원주의 주리(州吏) 원현(元玄), 부행란(傅行蘭), 원종수(元鍾秀)가 국학생(國學生) 안수정(安守貞) 등
1백여 명과 함께 서쪽 봉우리에서 내려와 협공했다.
조신이 북채를 잡고 북을 치며 독전하는데, 화살이 오른쪽 팔뚝을 관통했으나 북소리가 줄어들지 않았다.
마침내 적의 선봉이 약간 후퇴하자 뒤에 있던 자들이 놀라서 소란해지면서 자신들끼리 서로 마구 짓밟았다.
원주의 군사들이 공격에 가담해 그 함성이 산악을 진동시키는 가운데
전후 열 번의 전투에서 적을 대패시켜 도라도 등 예순여덟 명을 죽였고 거의 절반은 활로 쏘아 사살했다.
이에 적들은 예봉이 꺾여 감히 공격을 못하였고 여러 성들도 수비가 견고해져 비로소 적을 얕잡아 보게 되었다. 이 모두가 충숙공 원충갑의 힘이었으므로 그 공으로 여섯 번 승진해 삼사우윤(三司右尹)이 되었다.
오기(吳祈)가 참소와 아첨으로 왕의 총애를 받고서 왕 부자를 이간질하면서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들을 모함하고 해치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갈았지만 화를 당할까봐 모두 입을 닫고 있었다.
원충갑이 쉰여 명을 이끌고 왕에게 오기의 죄악을 극언한 후 체포해 원나라로 압송했다.
이 사건의 전말은 「오기전(吳祈傳)」에 상세히 나와 있다.
충선왕 때 응양군(鷹揚軍) 상호군(上護軍)이 되었으며,
충숙왕 6년(1319)에 식목도감(式目都監)에서 표창을 상신하자
추성분용정난광국공신(推誠奮勇定亂匡國功臣)의 칭호를 내려주었다. 2년 뒤에 죽으니 나이 일흔둘이었다.
아들은 원대명(元大明), 원대재(元大材), 원대기(元大器)이다. [출처] 고려사열전17
충숙공 원충갑 忠肅公元沖甲 가계
조부 원응용元應龍
부 원민성元敏成 증 상호군문하시랑 贈 上護軍門下侍郞
충숙공 원충갑 忠肅公 元沖甲
정경부인 원주(익흥)이씨 貞敬夫人 原州(益興)李氏 진사 이영필李英弼의 따님
사위 이희백李希伯원주이씨
자 원대명(元大明)
원대재(元大材)
원대기(元大器)
손자 원도일元道一
증손자 원목元穆
벽암 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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