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이씨 증 승정원도승지 이경현(贈 承政院都承旨 李景賢)
충남 아산시 신창면 오목리 산 109-1
吐握聽民토악청민
吐握聽民
토악청민
토악청민吐握聽民
[1面]
公延安人諱景賢字明之號梅軒系出於延安侯李茂其先唐室懿親也至中葉有諱漬通禮門副使累傳諱淑琦戶判敵愾佐理功臣延安君諡靖襄諱世範弘文修撰贈左贊成諱國柱宰花山事贈延善府院君領議政諱尙閔知昌城事 贈吏曹判書公高曾祖若 考妣貞夫人完山李氏判官鶴壽女莞城君貴丁曾孫非一李也 宣廟己卯三月朔日擧公兄弟五人序一也性度嚴正才器聰慧異於凡年及就傅受讀于叔父五峯公從易敎也五峯公嚴立課程惓惓薰陶與人遠矣 公亦孜孜服膺不煩教導是以大肆力學問辭遂大就癸卯與仲公元之連璧司馬乙巳丁判書公憂光海庚戌拜世子衛洗馬壬子陞主典獄簿尋遷殿中都監郞廳轉通禮院
[2面]
引儀丁巳捷謁聖文科拜承文院校檢遷成均館典籍刑禮兩曹正郎成均直講軍資監僉正 仁廟甲子拜水曹郞乙丑接伴毛都司于關西由刑曹正郎任高陽事寔丁卯西邊事急元戎遇境公不得傍助犒饋無踈失元戎稱之是夏攺水部郞僉正太常院相禮己巳拜兵曹正郎陞軍器寺正未幾軍資監正轉宰高原興學校除煩刑明井田省稅賦而簡爭訟尙禮讓使北方落遠之民厚蒙王化於是賢其賢而無親疎以敦風俗致力田園而桑麻興以潤生計公莅玆惱神勳政有民無身而兼其風土媒疾卒于任所乃壬申九月二十日享年五十四是十二月以官葬延陵伏虎山向午原從先兆也後辛未春移厝于新昌鶴城之丁坐原以扈 聖原從勳贈銀臺 都承旨齊
淑夫人安東金氏兵使壽男女性姿柔嘉淑明以禮事舅姑孝奉夫子順與妯娌和敎子姪嚴御婢僕恩人不間焉從子享泰安也恒誨之曰牧民之道在博愛濟恤萃賢可想也後公歿二十一年之壬辰九月五日得年七十二祔公葬有四男二女長山賚淳昌郡守次海賚司僕寺正次大賚系叔父湖堂晩沙公后次命賚系石門延川君后女長適申得溟高靈人次適金鳳周慶州人也山男長濟亨進士次濟元濟俊出石門后女金鼎泰趙威明趙亨期得海男濟兼通德郞濟臣進士濟相 贈吏曹參議女李有發韓世謙郡守黃權朴奎世府使溟男濎鳳周男演內外舅玄八十餘人公品行端重簡黙淸白自守人不敢非義對之早喪嚴顔未能盛養抱終身
[3面]
之恨奉養貞夫人嗜之物替新供進與諸第曰集膝下悅親情話和樂且湛晨昏之省寒煥之間雖官高未嘗小懈早蒙 聖寵出入禁闥敬恭勤王能竭其忠出宰郡事吐握聽民竭力其職歷宰三郡室如縣罄其廉直可知也昆弟子姪接踵科捷振家聲此非祖先積德之蔭歟公十二代孫元永氏與三從叔鉉汶氏願窮乞銘正和之陋拙不敢碩人之狀三辭不獲而盥乎銘曰
吾家世德淸白 爲則入侍出治 恭修厥職三握 三吐民聲聽直 室如縣罄俯仰 無暱生就死歸
痛惜何克名長 身短天賦是嗇 公先室後宅兆 同域油毫題銘 記實非飾垂耀 流芳貞珉是刻
歲 壬申 之復陽日族後孫 正和 謹撰
癸酉 新陽節 水原后人 悳泉 金容基 謹書
공은 연안인(延安人)으로 휘는 경현(景賢)이요, 자는 명지(明之). 호는 매헌(梅軒)이다.
계출(系出)은 연안후(延安侯) 이무(李茂)인데, 그 선조는 당(唐)나라 종실(宗室)의 가까운 친척이다. 또한 조선 중엽에 와서 휘 지(漬)는 통례문부사를 지냈고 여러 대를 지나 휘 숙기(淑琦)는 호조판서 적개좌리공신(敵愾佐理功臣) 연안군(延安君)에 훈봉되고 시호는 정양(靖襄)이며, 휘 세범(世範)은 홍문관 수찬으로 증 좌찬성이고, 휘 국주(國柱)는 신녕현감(新寧縣監)으로 연선부원군(延善府院君)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휘 상민(尙閔)은 창성부사(昌城府使)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는데 이분들이 공의 고조(高祖)와 증조(曾祖)이다.
어머니 완산이씨(完山李氏)는 판관(判官) 학수(鶴壽)의 따님이며 완성군(莞城君) 귀정(貴丁)의 증손으로 같은 이씨(李氏)가 아니다. 1579년(선조 12) 3월 公을 낳았는데 다섯 형제중 맏이다. 성격과 도량이 엄정하고 재능과 기량이 밝고 지혜로워 보통사람과 달랐으며 어려서부터 책을 받아 읽어 감탄한 숙부(叔父) 오봉공(五峰公, 이호민(李好閔)이 가르쳤다. 오봉공은 엄한과정으로 곡진히 가르치니 실력이 멀리까지 소문이 나 오봉공이 기뻐하며 마음에 두고 이끄니 거침없이 학문에 진력하여 드디어 크게 성취하였다.
계묘년(1603년)에 아우 원지(元之, 李景仁의 字)와 함께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을사년(1605년) 통정대부가 되었다. 광해 경술년(1610년)에 세마(洗馬)에 제배되고 임자년(1612년)에 전옥서 주부(典獄署主簿)로 승진하였다가 얼마 후 전중도감 낭청(殿中都監郎廳)이 되고 다시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로 옮겼다. 정사년(1617년)에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교검(校檢)을 제수했다가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옮기고, 다시 형조·예조의 정랑(正郞)으로 옮겼다가 성균관 직강(直講)·군자감 첨정(僉正)으로 옮겼다. 1624년 수조랑(水曹郞)에 배수되고 이듬해 도사(都司) 모문룡(毛文龍)을 관서(關西)에서 접반(接伴)하였으며, 형조정랑을 거쳐 고양군수(高陽郡守)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정묘년(1627년)으로 호란(胡亂)으로 관서(關西)의 일이 급하게 되자 원수(元帥)가 출정(出征)하느라 그 군대가 고을을 지나가게 되자 공은 이웃 고을의 도움을 기다리지 않고 군사에게 음식을 제공하니, 원수가 칭찬하였다.
여름에는 공조랑(工曹郞)·태상시(太常寺=통례원) 첨정(僉正)·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로 바뀌었다. 기사년(1629년)에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제수되었다가 군기시정(軍器寺正)으로 승진하고 얼마되지 않아 군자감정(軍資監正)으로 옮겼으며, 다시 고원군수(高原郡守)로 나가서는 학교를 일으키고 토지제도와 세금의 재송을 살피고 부지런히 근무하여 ~~~치적이 있었으나 마침내 풍토병(風土病)으로 임소(任所)에서 졸(卒)하니, 바로 임신년(1632년) 9월 20일이었다. 향년 54세로 12월에 연릉(延陵) 복호산(伏虎山) 오좌향(午坐向)에 관장(官葬)하니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신미년(1631년) 봄에 신창 학성(아산시) 정좌(丁坐)향으로 옮겨 모셨다. 호성 원종훈(扈聖原從勳)으로 승정원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숙부인(淑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는 병사(兵使) 수남(壽男)의 딸인데, 유순(柔順)하고 현숙(賢淑)하며 예와 효로서 시부모를 섬기고 지아비와 자식을 따르며 동서간에 화합하고 아들과 조카를 엄하게 훈육하며 여비(女婢)와 노복(奴僕)을 은혜로 거느려 차별하지 않았다.
태안의 수령(守令)이 된 아들을 따라가 봉양을 받을 때에는 항상 훈계하기를, 목민관으로 차별없이 어려운 백성을 구제하고 어진 수령이 되기를 바랐다. 공 몰후 21년 지난 뒤인 임진년(1652년) 9월 초5일 향년 72세로 졸하자 공과 합장하였다.
4남 2녀를 낳았으니, 맏아들 이산뢰(山賚)는 순창군수(淳昌郡守)요, 차남 이해뢰(海賚)는 사복시정(司僕寺正)이고 삼남 이대뢰(大賚)는 숙부 호당(湖堂) 만사공(晩沙公)에게 출계하였고, 사남 이명뢰(命賚)는 석문(石門) 연천군(延川君)의 뒤를 이었으며, 장녀는 고령(高靈) 신득명(申得溟)에게 차녀는 경주(慶州) 김봉주(金鳳周)게 출가하였다.
이산뢰의 아들 이제형(李濟亨)은 진사이며, 다음은 이제원(濟元)과 이제준(濟俊)은 옥당에 나가고 맏딸은 김정태(金鼎泰)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조위명(趙威明)에게, 다음은 조형기(趙亨期)에게 각각 출가했다. 이해뢰의 아들 이제겸(濟兼)은 통덕랑이고 이제신(濟臣)은 진사이고 이제상(濟相)은 증 이조참의이다. 딸은 이유발(李有發), 군수 한세겸(韓世謙)· 황권(黃權),부사(府使) 박규세(朴奎世)이다. 이명뢰(命賚)의 아들은 이정(濎)과 이연(演)이고 내외손 80여명이다. 공은 품행이 단정하고 곧고 조용하며 청렴하였다. 스스로를 지키며 비리를 용납하지 않았고 조실부모했지만 엄숙한 얼굴로 ~~~
[側面2]
之恨奉養貞夫人嗜之物替新供進與諸第曰集膝下悅親情話和樂且湛晨昏之省寒煥之間雖官高未嘗小懈早蒙 聖寵出入禁闥敬恭勤王能竭其忠出宰郡事吐握聽民竭力其職歷宰三郡室如縣罄其廉直可知也昆弟子姪接踵科捷振家聲此非祖先積德之蔭歟公十二代孫元永氏與三從叔鉉汶氏願窮乞銘正和之陋拙不敢碩人之狀三辭不獲而盥乎銘曰
吾家世德淸白 오가세덕청백 우리 집에 쌓아 내려온 아름다운 덕은 청백이라
爲則入侍出治 위칙입시출치 목표는 임금을 뵙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 이었지
恭修厥職三握 공수궐직삼악 공손히 그 직분을 다하며 세 번 머리를 쥐었고
三吐民聲聽直 삼토민성청직 세 번의 먹던 음식 뱉으며 백성의 소리 들었네
室如縣罄俯仰 실여현경부앙 청빈한 살림에도 아래 위를 굽어보며 보살폈지
無暱生就死歸 무일생취사귀 사사로움 없는 삶은 구애됨 없이 죽어 돌아갔네
痛惜何克名長 통석하극명장 아픈 마음 이기지 못하는데 어찌 이름 오래갈까
身短天賦是嗇 신단천부시색 작은 키는 하늘이 준 것이지만 인색하지 않았네
公先室後宅兆 공선실후택조 공의 부인 묘소 뒤에 유택을 정하여 장사 지내고.
同域油毫題銘 동역유호제명 같은 묘역 구름 이는 곳에 붓으로 제명을 썼네
記實非飾垂耀 기실비식수요 사실을 기록하매 꾸미지 않아도 빛이나니
流芳貞珉是刻 유방정민시각 시간이 흘러가도 향기는 옥돌에 새겨 전하네
歲 壬申 之復陽日族後孫 正和 謹撰 1992년 족후손 이정화 근찬
癸酉 新陽節 水原后人 悳泉 金容基 謹書 1993년 수원김씨 덕천 김용기 근서
연선부원군 복경 이국주 延善府院君 攴卿 李國柱의 손자
증 승정원도승지 행통훈대부군기시정 이경현
軍器寺正 贈 承政院都承旨 梅軒公 李景賢 , 연안이씨
군기시정 증 승정원도승지 매헌공 이경현
1579년(선조 12) ~ 1632년(인조 10)
본관은 연안(延安). 字는 명지(明之), 호(號)는 매헌(梅軒)이다.
이세범(李世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연선부원군 이국주(李國柱)이며,
아버지는 창성부사 이상민(李尙閔)이고, 어머니는 판관 이학수(李鶴壽)의 딸이다.
7세 때 독서를 하였고, 1610년(광해군 2) 세마(洗馬)가 되었다.
1612년에 전옥주부(典獄主簿)가 되고, 곧 전중도감(殿中都監)을 거쳐 낭청이 되었다.
1617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교가 되고, 이어서 전적을 거쳐 형조정랑이 되었다가, 직강으로 옮겼다.
1623년(인조 1) 흥해군수로 나갔다가, 그곳 이민들이 소요를 일으키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1624년에 공조좌랑이 되었고,
1625년에 관서에 가서 북쪽 여진의 사신인 모도사(毛都司)를 접반(接伴)하였다. 형조정랑을 거쳐서 고양군수가 되고,
1627년에 공조의 낭청과 첨정(僉正)을 거쳐 통례원통례가 되었다.
1628년 공조정랑을 거쳐 군기시정(軍器寺正)으로 승진하고 이어서 군자감정(軍資監正)이 되었다.
그 해 고원군수로 나가 근무하였으며
1632년 임지에서 풍토병에 걸려 임지에서 졸 하였다. 이후 도승지에 증직되었다.
용주 조경(龍洲 趙絅)이 묘갈명을 지었다.
贈承政院都承旨 行通訓大夫軍器寺正李公景賢之墓 淑夫人安東金氏祔左
증승정원도승지 행통훈대부군기시정이공경현지묘 숙부인안동김씨부좌
연선부원군 복경 이국주延善府院君 攴卿 李國柱
1467년(세조13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발생하였을 때
적개공신(敵愾功臣)으로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고 호조판서를 역임한 이숙기(李淑琦)의 손자로서
1525년(중종20) 사마시에 합격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의장고(儀仗庫)의 낭청(郎廳)이 되었고
그 후 제용주부(濟用注簿)가 되었을 때 상배(喪配)를 하였는데 여주민씨(驪興閔氏) 민침(閔琛)의 딸 이었다.
이후 그의 큰아들 수졸재 이우민(守拙齋 李友閔,1515~1574)이 홀로 된 아버지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부부가 의논 끝에 계모(繼母)를 맞이하기로 합의하고 널리 혼처(婚處)를 구한 끝에
비안박씨(比安朴氏) 사직 박여(朴旅)의 딸인 17세 소녀와 재혼을 하였는데 이때 이국주(李國柱)는 51세였다.
수졸재 이우민(守拙齋 李友閔)내외는 자신들보다 나이가 적은 새로운 어머니를 맞이하여
자식 된 도리를 다하며 있는 성의를 다해 잔치를 크게 베풀었으며,
정성으로 받들어 모셔 보기 드문 효자로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이국주(李國柱)는 새로운 부인을 맞아 단란하게 살면서 67세 이후에 두 아들을 얻으니
넷째 아들로 연릉부원군을 제수받은 문희공 오봉 이호민(文僖公 五峯 李好閔)이며,
다섯째가 창성부사 증 이조판서에 오른 이상민李相閔이다.
문희공 오봉 이호민(李好閔)이 네 살 때
이천현감(利川縣監)으로 재직 중에 별세하니 이국주(李國柱)나이가 70세 이었다.
큰 아들 이우민(李友閔)의 효성이 아니었다하면
그의 아버지 이국주(李國柱)는 외로운 인생의 황혼(黃昏)길을 걸었을 것이요,
문희공 오봉 이호민(李好閔)을 얻지도 못했을 것이다.
문희공 오봉 이호민(李好閔)은 대학자 문신으로서 벼슬이 대제학 판서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러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가 되고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아버지 이국주(李國柱)에게는 연선부원군(延善府院君)의 작호가 승직되었다.
연선부원군 복경 이국주(延善府院君 攴卿 李國柱)의 손자
증 승정원도승지 행통훈대부군기시정 이경현 묘역 후경
//고원군수 매헌공 이경현(梅軒公 李景賢) 가계//
9대조 이지(李漬) 통례문부사공파 通禮門副使公派
8대조 이계손(李係孫)
7대조 이양(李亮) 전의감정典醫監正
6대조 이백겸(李伯謙)
5 대조 이말정(李末丁)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고조부 이숙기(李淑琦) 호조판서 연안군延安君 정양군靖襄公
증조부 이세범(李世範) 홍문관수찬 증 좌찬성
조부 이국주(李國柱) 연선부원군延善府院君, 자 복경(攴卿).
백부 이우민(李友閔) 수졸재守拙齋, 첨지중추부사,경상도황해도관찰사,장예원판결사
중부 이사민
중부 이희민(李希閔)
중부 이호민(李好閔) 문희공 오봉 文僖公 五峯, 동지중추부사, 좌찬성,연릉부원군
부 이상민(李相閔) 창성부사 증 이조판서
매헌 이경현(梅軒 李景賢) 고원군수高原郡守
배위 숙부인 안동김씨, 증 병조판서 병사 김수남(兵使 金壽男)의 따님
차남 이해뢰(李海賚) 사복시정司僕寺正
배위 숙인 전주이씨, 직장 이인(李寅)의 따님
손자 이제겸(李濟兼), 이제신(李濟臣), 이제상(李濟相)
증손자 이구정(李龜挺) 성균진사
증손자 이봉정(李鳳挺)
증손자 이인정(李麟挺)
손녀 이유발(李有發), 손녀 군수 한세겸韓世謙, 손녀 황권黃權, 손녀 부사 박규세朴奎世
장남 순창군수 이산뢰(李山賚)
손자 진사 이제형(李濟亨)
손자 이제원(李濟元) 옥당에
손자 이제준(李濟俊) 옥당에
손녀 김정태(金鼎泰), 손녀 조위명(趙威明), 손녀 조형기(趙亨期)
삼남 이대뢰(李大賚) 숙부 호당(湖堂) 만사공(晩沙公) 출계
사남 이명뢰(李命賚) 석문(石門) 연천군(延川君)의 뒤를 이었으며,
손자 이정(李濎)
손자 이연(李演)
장녀 고령인 신득명(申得溟)
차녀 경주인 김봉주(金鳳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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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두릉연가
∎토악(吐握) : 토악(吐握)은 토포악발(吐哺握髮)의 준말로 옛날 주공(周公)이 손님이 찾아오면 먹던 밥을 뱉고 감던 머리를 움켜쥐고 나가서 손님을 맞아들였다는 고사(故事).
∎삼토삼악(三吐三握)
일찍이 중국의 주(周) 나라 문왕(文王)은 천하에 대업을 이룩함에 있어서 인물을 구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 생각하고 경륜이 있는 정치가를 구하는 데 주력했다. 그 때 한 근신(近臣)이 이르기를 강여상(姜呂尙)아라는 인물이 가히 천하를 다스릴 재주가 있다고 추천했다. 주 문왕은 제왕의 몸으로 그를 부를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예가 아니라 생각하고 손수 여상(呂尙)을 찾아가기로 했다.
주 문왕이 여상을 찾아 위수(渭水)라는 곳에 이르니 마침 여상은 낚시질을 나가고 없었다. 주 문왕은 다시 낚시터를 찾아가 여상을 만나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 선생의 도움을 청하러 왔노라고 말했으나 여상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낚시질만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침나절에 강변에 도착한 주 문왕은 조금도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고 여상의 뒤에 서서 지켜보니 여상의 낚시는 물리지도 않는 곧은 낚시였다고 한다. 저녁때가 되도록 지치지 않고 제왕의 몸으로 점심도 거른 채 기다리는 문왕을 보고서야 여상은 문왕의 청을 받아들여 주나라의 정치를 맡기 시작했는데, 이 사람을 가리켜 후세인들은 강태공(姜太公)이라 불렀다.
주 문왕이 죽자 그 아들 무왕(武王)이 등극했고, 무왕의 뒤를 이어 다시 나이 어린 성왕(成王)이 등극했다. 나이가 어린 성왕이 정사(政事)에 밝지 못하게 되자 주 문왕의 아들이며 무왕의 아우인 주공(周公)이 섭정(攝政)을 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조카를 꾸짖을 일이 있으면 차마 왕을 나무라지 못하고 엉뚱하게 자기 아들인 백금(伯禽)을 잡아다가 종아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아들 백금이 성장하여 노(魯) 나라의 제후로 떠날 때 주공은 아들을 앞에 앉혀놓고 훈계하기를,
“나는 문왕의 아들이요, 무왕의 아우이며, 금상(今上=성왕)의 숙부이지만, 천하에 뜻있는 손님이 찾아오면 식사 한 번하는 동안 밥을 먹다가도 씹던 밥을 삼킬 겨를이 없이 그것을 뱉어내고 달려 나가기가 세 번이었고(三吐), 머리를 감다가도 머리채를 움켜쥔 채로 달려 나가기가 세 번이었으니(三握), 아무쪼록 너도 제후의 몸으로써 더욱 겸손하며 거만함이 없도록 삼가라.” 고 타일렀다.
주 문왕이 일개 촌로(村老)를 모시기 위해 제왕의 몸으로 뙤약볕 아래서 하루를 기다렸고, 주공은 왕의 숙부로 ‘삼토삼악’의 겸손함으로 현사(賢士)를 얻어 800년의 주나라가 흥왕(興旺)할 수 있었고, 공자는 이 주공이야말로 중국의 성현 중에 으뜸이라고 칭송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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