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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허난설헌許蘭雪軒, 허초희許楚姬, 서당 김성립 西堂 金誠立,허난설헌 묘소,양천허씨

구름에 달

by 碧巖 2020. 1. 27.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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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許蘭雪軒,   허초희許楚姬

경기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산 29-5

경기도 기념물 제90호

 

廣州齋室 慕先齋

광주재실 모선재

 

 

 

 

 

 

 

허난설헌許蘭雪軒, 허초희(許楚姬

1563(명종18)~589(선조22)

허난설헌(許蘭雪軒)

난설헌의 본관은 양천(陽川) 허씨, 이름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이다.

초희라는 이름은 장성해서까지 사용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경번(景樊)이라는 자는 난설헌 자신이

중국에서 전해져온 여선(女仙)인 번부인(樊夫人)을 사모하여 지은 것이라고 한다.

난설헌(蘭雪軒)이라는 호의 유래는 직접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고 다만,

난초()의 이미지와 눈()의 이미지에서 지어진 것이라 생각된다.

난설헌(蘭雪軒)은 강릉(옛 지명은 임영(臨瀛)) 초당리에서

아버지 초당 허엽(草堂 許曄) 과 어머니 김씨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허엽(1517-1580)은 호가 초당(草堂)으로 후에 경상감사를 역임하였고 동서분당 때 동인의 영수가 된 인물이다.

난설헌의 어머니는 허엽의 둘째 부인이었으며

허엽은 첫째 부인인 한씨부인과의 사이에 두 딸과 아들 허성(許筬)을 두었고

김씨부인과의 사이에는 하곡 허봉(荷谷 許篈), 허난설헌(許蘭雪軒), 교산 허균(蛟山 許筠)21녀를 두었다.

아버지 초당 허엽(草堂 許曄)은 난설헌(蘭雪軒)이 18세 때 상주에서 객사하였다.

 

 

난설헌보다 15세 위였던 큰오빠 악록 허성(岳麓 許筬,1548~1612)은 이조판서와 병조판서까지 지냈으며,

작은오빠 하곡 허봉(荷谷 許篈,1551~1588)은 자가 미숙(美叔)인데 홍문관 전한을 지냈고

강직한 성격으로 임금에게 직언을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허봉(許篈)은 33세 때인 1583, 난설헌이 21세 때 율곡 이이의 잘못을 탄핵하다가 귀양 갔다가

3년 후 방면되지만 불우하게 지내다가 술에 의해 몸을 망쳐서 난설헌 26세 때인 38세를 일기로 객사하였다.

그는 난설헌보다  나이가 12살 많게 차이가 많이 났지만 난설헌의 재능을 아껴주었다.

그리고 동생 교산 허균(蛟山 許筠, 1569~1618)

난설헌보다 여섯 살 아래로 형조와 예조판서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그는 아주 총명하고 지식이 막힘이 없었으며 개혁의식이 뚜렷했다.

허균은 봉건적 사회제도의 개혁을 부르짖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작자이며,

후일 혁명을 준비하다 역적의 누명을 쓰고 50세에 처형당했다.

간단히 말해서 허봉, 허난설헌, 허균은 모두 자유분방한 예술가적 기질을 갖고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모두 불행하게 죽었다.

난설헌의 집안은 아버지와 자녀들이 모두 문장에 뛰어나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허씨 5문장(허엽,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이라 불렀다.

허엽은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화담 서경덕 등에게 문장을 배웠으며,

난설헌은 작은오빠 허봉, 동생 허균과 같이 강릉에서 태어났지만

서울 건천동에서 장성했고 결혼 생활도 서울에서 한 것으로 보인다.

건천동은 김종서, 정인지, 이순신, 유성룡 등 많은 인재들이 배출된 곳이라 ㅎ한다.

난설헌은 일찍부터 집안에서 문장과 글을 깨우쳤고 도교의 신선 세계에 대하여도 배웠다.

난설헌은 어려서 태평광기(太平廣記)라는 책자를 즐겨 읽었는데

이는 중국 송()나라 학자 이방 등이 편찬한 설화집으로  신선들과 도술 등의 이야기를 엮는 책이라 한다.

난설헌은 8세 때인 1570년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어 신동으로 소문이 났는데,

신선 이야기속  달()의 광한전에 백옥루를 새로 짓는다고 상상하고 그 건물의 상량문을 쓴 것이었다.

 

 

 

난설헌의 글재주는 허균과의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허균 자신도 글재주가 남보다 뛰어났는데 어릴 적에 시를 써서 누나인 난설헌에게 보였다.

그 시의 시구에

女娘撩亂送秋千

여랑료난송추천    '여인이 흔들어 그네를 밀어 보낸다.' 란 시구가 있었다.

이를 보고 난설헌이 '잘 지었구다. 다만 한 구절이 잘못되었구나.'라고 말했다.

동생 허균이 어떤 구절이 잘못되었는가 물으니 난설헌이 곧 다음과 같이 고쳐 주었다.

門前還有斷腸人 白馬半拖黃金鞭

문전환유단장인 백마반타황금편

"문 앞에는 아직도 애간장을 태우는 사람이 있는데, 백마를 타고 황금 채찍을 하면서 가버렸다."

 

난설헌의 시들은 도교적인 측면과 당나라 시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는 것들이 많다.

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이 화담 서경덕에게 배웠는데

이것도 난설헌이 도교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드는데 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리고 작은오빠 하곡 허봉은

난설헌보다 12세나 위였기 때문에 난설헌의 어린 시절에 충분히 그녀를 가르쳐 줄 위치에 있었다.

봉은 자기의 글벗인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글을 배우게 해주었다.

이달은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는데 서얼로 태어났기에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상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고

떠돌이 생활을 했으며 틀에 박히지 않은 당시 풍의 글을 썼다.

난설헌은 손곡 이달(蓀谷 李達)에게서 자유분방한 성격을 지닌 당나라 시풍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한다 

 

 

 

허난설헌許蘭雪軒,   허초희許楚姬 묘소

허난설헌은 15살에 안동김씨 집안의 한 살 많은 김성립(金誠立)과 혼인을 하였다.

5대나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 집안이였으며, 자는 여견(汝見), 여현(汝賢), 호는 서당(西堂)이었다.

나름대로 문장을 했지만 난설헌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고 하지만

2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이는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평균 나이 36.4세에 비하면 우수한 실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처남이었던 허균은 그를 "문리(文理)는 모자라도 글을 잘 짓는 자"라고 평하면서 깍아내렸으니

, 글을 읽으라고 하면 제대로 혀도 놀리지 못하는데 과문(科文; 과거(科擧)의 문장은 우수하였다 한다

남편인 서당 김성립(西堂 金誠立)5대가 문과에 급제한 문벌고관의 자제로 태어나 과거에 전념하느냐고

한강 서재에서 별거하다시피 하여 부인과의 사이가 돈독하지는 않았으나

1589년 어린 아들과 딸을 앞세운 부인 허난설헌(許蘭雪軒)2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김성립은 같은 해인 28세에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로 급제하여

글 재주가 특출하던 급제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홍문관 저작(弘文館 著作)으로 근무하였으며,

이후 임진왜란 시기의 육필본인 정만록(征蠻錄)에 따르면,

서당 김성립(西堂 金誠立)31세인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용진강에 머물다가

왜군이 선정릉을 파괴할때에 결사 항전하다가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후손이 그의 시신을 찿지못하여 평소 입던 옷으로 의관장(衣冠葬)을 치뤘다고 한다.

이후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교산(蛟山)의 기록에 부부간의 사이는 좋지 않았고, 고부간 갈등도 있었다고 한다.

부부간의 갈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얘기들이 전해온다.

남편 김성립이 접(: 글방 학생이나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모여 이룬 동아리)에 독서하러 갔는데,

난설헌은 남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古之接有才 今之接無才

고지접유재 금지접무재    '옛날의 접()은 재주()가 있었는데 오늘의 접()은 재주()가 없다'

즉 파자를 사용해서 지금의 접은 에서 자가 빠진 (여자)만 남아있다고 하며 방탕하게 노는 것을 꾸짖었던 것이다.

 

다른 얘기에는 김성립과 친구들이 집을 얻어서 과거 공부를 하고 있었을 때

김성립의 친구가 거짓으로 '김성립이 기생집서 놀고 있다'고 했다.

난설헌이 이를 전해 듣고는 안주와 술을 보내면서 시를 한 구절 써서 보냈다.

郎君自是無心者 同接何人縱半間

낭군자시무심자 동접하인종반간 

"낭군께선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찌된 사람이길래 이간질을 시키는가?"

이를 보고 사람들은 난설헌이 시에도 능하고 기백도 호방함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김성립은 공부를 한다고 하면서 난설헌을 멀리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고

또 역설적으로 평소 기생집에서 놀았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조선 시대 사대부가 도령들의 유락 생활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贈貞夫人陽川許氏之墓

                              증정부인양천허씨지묘

15795(난설헌 17)에 아버지 허엽이 경상감사가 되어 내려갔다.

다음해인 15802(난설헌 18), 아버지가 병에 걸려 서울로 올라오다 상주 객관에서 사망했다.

이때부터 허씨 집안이 기울기 시작한다.

작은오빠 허봉은 시집간 누이동생인 난설헌을 아껴서 시도 지어 보내고 붓도 선물하였다.

난설헌의 글재주를 아끼는 마음과 형제애를 느낄 수 있는 사건이다.

특히 1582(난설헌 20)에는 허봉이 난설헌에게 "두율(杜律)" 시집을 보내 주면서

"내가 열심히 권하는 뜻을 저버리지 않으면

희미해져 가는 두보의 소리가 누이의 손에서 다시 나오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라고 써주었다.

강직한 성격의 허봉은 1583(난설헌 21)에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가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1585년 봄 (난설헌 23), 상을 당해 외삼촌댁에 머물렀는데 이때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는 시를 지었다.

이 해에 허봉이 방면되지만 서울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떠돌아다녔다.

15889(난설헌 26), 금강산에 있던 작은오빠 허봉이 황달과 폐병으로, 향년 38세의 나이로 객사를 한다.

난설헌에게는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었는데 아들의 이름이 희윤(喜胤)이었다.

그러나 딸을 먼저 잃고 다음 해에 아들을 잃었다. 이들이 태어나고 죽은 연도는 명확하지 않다.

희윤의 묘비명을 허봉이 지어준 것을 보면 모두 허봉이 귀양(난설헌 21세 때)가기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난설헌은 몰락해 가는 집안에 대한 안타까움과 자식을 잃은 아픔,

부부간의 우애가 좋지 못함과 고부간의 갈등,

그리고 사회의 여성에 대한 억압 등등을 창작으로 승화시켰음에 틀림없다.

 

난설헌의 죽음은 신비롭다.

허균의 학산초담과 구수훈(具樹勳)이순록(二旬錄)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1589년 초, 27세의 난설헌이 꿈에 월궁(月宮)에 이르렀는데, 월황(月皇)이 운()을 주면서 시를 지으라고 하여, 꿈에서 깨어난 뒤 그 경치가 상상하며 "몽유기(夢遊記)"를 지었다.

蘭雪軒 夢遊記 난설헌 몽유기

碧海浸瑤海

벽해침요해  푸른 바닷물이 구슬의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

청난의채난  푸른 난새는 채색의 난새에 기대니

芙蓉三九朶

부용삼구타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 붉게 늘어져

紅墮月霜寒

홍타월상한  달빛 서리 위로 차갑기만 하여라

 

이후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다음과 같은 절구를 남기었다고 한다.

今年乃三九之數 今日霜墮紅

금년내삼구지수 금일상타홍     '금년이 바로 3 · 9수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3· 927이라.....

 

난설헌은 그렇게 1589319, 향년 27세로 요절했다.

집안에 가득 찼던 그녀의 작품들은 불태워 달라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모두 불태워졌다고 한다.

 

 

 

 

 

 

난설헌의 자녀 희윤자매 묘

 

喜胤 墓誌 許荷谷

희윤 묘지 허하곡

피워보지도 못하고 진 희윤아!

희윤의 아버지 성립은 나의 매부요. 할아버지 첨은 나의 벗이로다,

눈물을 흘리면서 쓰는 비문,

맑고 맑은 얼굴에 반짝이던 그 눈!

만고의 슬픔을 이 한 곡(哭)에 부치노라

 

이 비문은 난설헌 허씨의 큰 오빠 하곡 허봉공이 누이의 아들 희윤의 죽음을 슬퍼하여 쓴 묘지로서

난설헌시집책 머리에 기록되어 전하여 오다가

금번에 유자녀 희윤과 그 누이의 묘전에 비문을 전재하고 뜻을 번역하여 이 비를 세운다. 서기199411월 일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종중회립 이사장 김학영,   양제 김재준 근서

 

 

                                    蘭雪軒詩碑

                           난설헌시비

 

哭子곡자

去年喪愛女

거년상애녀  지난 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今年喪愛子

금년상애자  올해는 사랑하런 아들 잃다니

哀哀廣陵土

애애광릉토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 땅이여.

雙墳相對起

쌍분상대기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蕭蕭白楊風

소소백양풍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鬼火明松楸

귀화명송추   도깨비불 무덤에 어리비치네

紙錢招汝魂

지전초여혼  소지올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玄酒存汝丘

현주존여구  무덤에 냉수를 부어 놓으니

應知第兄魂

응지제형혼  아무렴 알고 말고 너희 넋이야

夜夜相追遊

야야상추유  밤마다 서로서로 얼려 놀테지

縱有服中孩

종유복중해  아무리 아해를 가졌다 한들

安可糞長成

안가분장성  이 또한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浪吟黃坮詞

낭음황대사  부질없이 황대사 읊조리면서

血泣悲呑聲

혈읍비탄성  애끓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許米子허미자 譯해석하고,   (십일대손,十一代孫)

鄭良婉정양완 書쓰다.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의 딸

 

 

 

 

 

蘭雪軒詩碑난설헌시비

夢遊廣桑山몽유광상산 (꿈에 광상산에 오르다.)

碧海浸瑤海

벽해침해요  푸른 바다가 요지에 잠겨들고

靑鸞倚彩鸞

청란의채란  파란 난새는 아롱진 난새에 어울렸어요

芙蓉三九朶

부용삼구타  스물이라 일곱송이 부용꽃은

紅墮月霜寒

홍타월상한  붉은 빛 다 가신 채 서리 찬 달 아래에.....

雨田 辛鎬烈 우전 신호열 (1914~1993),    羅孫 金東旭 나손 김동욱 (1922~1990)

 

 

허난설헌許蘭雪軒, 허초희(許楚姬) 묘역 후경

 

//허초희許楚姬 허난설헌(許蘭雪軒)가계도//

할아버지 허한許澣 군자감부봉사 증 이조참판

   할머니 창녕성씨 돈녕부판관 성도成燾의 딸

   아버지 초당 허엽(草堂 許曄) 동지중추부사

   어머니 정부인 청주한씨, 서평군 한숙창(西平君 韓叔昌)의 딸

             이복오빠 악록 허성(岳麓 許筬), 예조(禮曹), 병조(兵曹), 이조판서(吏曹判書)

   어머니 정부인 강릉김씨, 예조판서 김광철金光轍의 딸

             오빠 하곡 허봉(荷谷 許篈)

             동생 교산 허균(蛟山 許筠) 첨지중추부사 좌참찬

                남편 서당 김성립 西堂 金誠立1562~1593

                       허초희許楚姬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

                           유자 허희윤許喜胤 조졸

                           유녀                    조졸

                           계자 김진金振, 증광시 문과급제, 생부 노은 김정립(老隱 金正立)

                                 계손 김대성金大成 통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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