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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상산임씨부자충신문,충무위부사과 임수전林秀筌, 훈련원주부 임현林贒

구름에 달

by 碧巖 2020. 3. 10.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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常山林氏父子忠臣碑

상산임씨부자충신비

충북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산 28


父子忠臣門 부자충신문

충신문은 문백면 구곡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임수전(林秀筌)과 임현(林賢) 두 부자(父子) 의 충의(忠義)를 기리기 위하여

조선 경종(景宗) 원년(1721)건립되었다.

임수전(林秀荃)은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모집 영솔하고 죽산 봉성(竹山 鳳城)에서 왜적과 싸워 많은 적을 무찔렀으나

군사와 무기가 부족하여 마침내 는 적의 칼날에 맞아 장열한 전사를 하였다.

임현(林賢)은 임수전(林秀荃)의 아들로 명군과 후금군(後金軍)이 싸울 때

명나라에 대한 원군(援軍)으로 강홍립군(姜弘立軍)에 출정하여 싸웠으나

만주 부차성(富車城)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그 뒤 숙종 25(1699)

임수전(林秀荃)에게는 형조참의(刑曹參議),

임현(林賢)에게는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증직(贈職)하고

경종 원년(1721)에 부자충절(父子忠節)의 정려(旌閭) 건립의 명()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다.


                                                       常山林氏父子忠臣碑

                                                       상산임씨부자충신비


사과공(司果公)의 휘는 수전(秀荃)이니 가정임자(嘉靖壬子 서기1552) 913일에 태어났다.

재주가 있고 용맹도 있었다.

6세 때 시를 짓기를 인간이 천지간에 태어나서 충효 두 가지를 가장 먼저 해야 한다고 했다.

장성해서는 학문이 훌륭하고 용맹과 지략이 뛰어났었다.

오음(梧陰 尹斗壽윤두수) 윤 정승이 기이하게 여겨 칭찬하는 시를 지었는데

그대의 재략이 모든 사람에 뛰어났으니 조만간에 명성을 날릴 것이다.”했다.

공이 일찍이 무과(武科)에 올라 행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충무위부사과(忠武衛副司果)를 역임했다.

늘 높이 날고 사나운 기상이 있어서 일직이 시를 짓기를

 이릉(李陵-전한시대 중국의 무장)은 살기를 위한 장수에 지나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어찌 감히 잊으리오.

한번 천산(天山)을 드는 것이 나의 뜻이니 가을 밤 병서를 읽으며 서릿발 같은 칼날을 어루만지노라.”했다 


임진왜란을 당해 옷깃을 걷어 올리고 진중으로 나가려 할 때

동생 임수형(林秀衡) 임수의(林秀萓)가 왜적을 토벌하러 가서 살아 돌아오니 공이 크게 꾸짖기를

남아가 마땅히 마혁리시(馬革裏尸남자는 항상 전장에 나아갈 준비를 해야만 하고 말가죽으로 자기 시체를 싼다는 말로 죽음을 두려워 말라 라는 뜻)해야 하거늘 너희가 어떻게 돌아 왔느냐.

비록 그러나 노모가 계시니 너희가 잘 봉양하라.”라고 곧 의병 천 여 명을 거느리고 노모에게 절학 작별을 했다.

죽산산성에 이르러 한 병정이 도망을 가거늘 공이 크게 꾸짖고 베어 죽였다.

공이 성벽을 뛰어 넘어 나가고 뛰어넘어 들어가니 왜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바라보고 말하기를

임장군은 양쪽에 날개가 있다.”했다.

적의 무리는 점점 많아지고 아군은 형세가 줄어드니 공이 칼을 내리치며 맹세하기를

“작은 군사로 많은 군사를 대적 하는 것은 병가(兵家)에 승수(乘數)이고

몸이 나라 위해 죽는 것은 신하의 당연한 직분인 것이다.”하고 적병을 무찌른데 좌충우돌하니

칼날이 번개처럼 번쩍여 한칼에 베이는 것이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적의 무리는 더욱 세력을 확장하고 공은 온 몸에 상처를 입었고 후원군이 단절되어

군사의 기세가 더욱 줄어드니 사세가 어지 할 수 없었다. 공이 하늘을 우러러 소리치기를

남아가 살아서 능히 나라를 위해 난리를 쓸어버리지 못했으니 죽어서 여귀(厲鬼)가 되어 오랑캐를 섬멸하리라.”

하고 드디어 진중에서 전사하니 임진년 1211일이다.

이 때 나이 41세이다.

같은 동네 한 군사가 돌아오는데 공의 적삼을 가지고 초혼(招魂)을 해 평산리 통산에 장사 지냈다.

숙종무진(서기1688년 숙종14)년에 사과공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증직을 하고

경종신축(서기1721년경종원년)년 형조참의공(刑曹參議公)

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

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官을 더 증직하고,

부자분이 다 같이 충신정려(忠臣旌閭)를 받았다.

     후손 기창(基昌)이 정려각 앞에 비석이 없는 것을 혐오스럽게 여겨

비문을 나에게 청하거늘 내가 사양 하지 못하고 드디어 전해오는 문자의 줄거리를 추려서 부탁을 답하노라.

단기4300년 정미(1967) 3월 일에 세움.

八溪 卞榮寅 逑弁書 팔계 변영인이 짓고 쓰노라.



忠臣 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  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行  忠武衛副司果林秀筌之閭

충신 증가선대부호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행  충무위부사과임수전지려



忠臣 贈嘉善大夫兵曹參判兼   同知義禁府事行 禦侮將軍訓練院主簿 林贒之閭

충신 증가선대부병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행  어모장군훈련원주부 임현지려

崇禎九十四年辛丑十日月 日 命㫌

숭정구십사년신축십일월 일 명정 171611월 정려

崇禎二百三十三年癸丑六月 日 命加 贈

숭정이백삼십삼년계축육월 일 명가 증 18616월 증직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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